60화. 실기 보는 편돌이 (5)
안내양과 관장이 납골당 밖까지 바래다줬다.
“안녕히… 가세요….”
“하는 일… 잘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가슴 따듯해지는 배웅이었지만, 차마 웃는 얼굴로 대답을 못 하겠더라. 느릿느릿 상가 앞 거리까지 걸어 나와, 태블릿 PC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은행 ATM 강도를 잡아달라. 흠….
“누나, 이게 말이 됨?”
“네 생각은 어떤데.”
내 생각에, 이건 그냥 말이 안 된다.
다른 내용이 자세히 적힌 것도 아니다. 은행 ATM 강도를 잡아달라, 이게 전부야. 하긴, 은행에 강도가 들었다는데 느긋하게 의뢰 내용 적어서 보낼 여유가 없기야 했겠지. 이해를 하려면 해줄 수 있다.
근데… 이걸 왜 112를 안 부르고 날 시키는데?
이 세상 치안이 묘하게 이상하단 건 나도 알지만, 최소한 은행 강도 정도는 경찰에 신고하면 어련히 출동해 줄 것 같은데 말이다. 백번 양보해서 경찰이 출동할 여유가 없다 쳐도….
아니, 은행에 강도가 들었으면 여유고 나발이고 먹던 짜장면 그릇 내던지면서라도 출동해야지, 이걸 내가 왜 양보해야 돼.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한 줄 의뢰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누나도 이 점에는 동의했다.
“다 떠나서, 은행에 강도가 들었으면 진즉에 다 털고 나갔을 것 같은데….”
“내 말이 그거라니까?”
은행 강도를 신고하고, 그걸 학원 실기시험 출제자한테 의뢰해서, 그 의뢰를 받은 응시자가 찾아오는 동안 강도가 얌전히 기다려준다고? 가정교육 참 판타지로 받았, 아니. 이 세상이 판타지는 맞는데….
“아니면 이미 튄 강도를 잡아달라는 걸 수도 있고….”
“그것도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긴 해.”
이런 판국이라, 은행으로 향하면서도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보면 알겠지.
근데… 와서 봐도 전혀 모르겠더라.
은행이 있는 골목 근처까지 다다를 즈음, 저 멀리 은행 간판이 달린 앞에 짜리몽땅한 고블린 하나가 서성이는 게 보였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니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인생 다 살았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다. 이 고블린이 의뢰한 양반인 듯했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혹시 은행 직원분이신가요?”
우선 말을 걸었다. 바로 고개를 들어 나와 누나를 번갈아 쳐다본 고블린은, 피던 담배를 하수구에 던져버리고는 되물었다.
“학원에서 왔냐?”
“…그렇습니다.”
알바하면서 손님으로 받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이 코쟁이 종족 놈들 말 참 짧다. 은행 직원이 이래도 되냐?
“실기시험 의뢰 건으로 찾아왔습니다. 의뢰 내용은 ‘은행 ATM 강도를 잡아달라’고 적혀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을 여쭙고 싶―”
“들어가서 보면 알아.”
설명은 이게 끝. 꽤나 부실한 설명이다 싶었으나,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블린이 피식 웃고는 번복했다.
“귀찮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들어가서 보면 바로 알아.”
확신 가득한 어투다. 누나랑 서로 어깨 으쓱하고 은행 안으로 들어서고, 내부 풍경을 확인하자마자 고블린이 어떤 의미로 이렇게 말해왔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 현금, 또는 카드를 투입해. ]
상황이 뭔가, 기묘했기 때문이다.
* * *
일단 바닥에 영수증 용지가 가득했다.
깔린 용지들에 죄다 가려져 버려서, 대리석 바닥이 아예 보이질 않는 지경이었다. 이것만 봐도 충분히 마음이 심란해지는 광경이긴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 원하시는 서비스, 현금. ]
정면에 자리 잡은 ATM의 상태가 몹시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가까이 간 것도 아닌데, 고장 난 라디오마냥 짜깁기된 음성녹음을 반복해 대고 있다.
[ 또는 통장, 카드를 투입해. ]
[ 어서. ]
“아니, 이게….”
뭐냐?
난 요리 보고 조리 봐도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한편, 정면의 ATM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누나는 뭔가 떠오른 듯 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게 이 소리였구만.”
“누나는 뭐가 짐작이 돼? 이걸 보고?”
“맞잖아. 은행, ATM, 강도.”
여기가 은행이고, 저게 ATM인 건 나도 보면 안다. 근데 강도가 없잖아, 강도가….
생각하다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태블릿 PC에 적힌 내용이 ‘은행 ATM 강도를 잡아달라.’ 이게 은행 ATM을 털고 있는 강도를 잡아달라는 게 아니라―
“저 ATM이 강도질을 하고 있는 거다?”
“정황상으론 그래 보이지 않냐?”
들어본 적 없는 조합의 문장이었다. 누나는 내가 얼타고 있는 걸 오히려 어리둥절해하는 눈치였다.
“너 설마 저런 거 처음 봐?”
“어.”
“와, 운 좋네. 회사 일 하다 보면 싫어도 한 번쯤은 봤을 텐데.”
대체 어떤 블랙기업에서 일해야 저딴 걸 볼 수 있는 건데….
아니, 내가 이 세상 ATM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맨날 보고 살지. 우리 편의점에도 구석에 시퍼런 놈 하나 있거든.
그래도 별 신경은 안 쓰고 살았는데, 왜냐면 우리 편의점 ATM은 애가 참 착하기 때문이다. 현금이나 카드 투입하라고 쓰레기통 둥둥 띄워대면서 떼를 쓰지도 않고, 건방지게 반말 찍찍 내뱉지도 않으니까.
근데 저 ATM은 대체 뭐가 불만이라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누가 지폐투입구에 오줌이라도 쌌냐?
[ 현금. ]
이러는 와중에도 ATM이 음성녹음을 출력했고, 동시에 둥둥 떠다니던 쓰레기통이 바닥을 한 번 쿵 찍고는 다시 솟구쳤다. 잘은 몰라도 몹시 화가 나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저거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마귀 들린 거지, 뭐. 나도 직접 본 적은 거의 없긴 한데.”
“뭐가 들려?”
“마귀. 그러니까….”
운을 떼고는 누나가 짧게 설명해 준 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는 마력을 지니고 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극히 미세한 양의 마력을 흘리면서 산다. 사람이 숨 쉬면서 이산화탄소 내뱉는 그런 느낌으로.
그 흘러나온 마력 찌꺼기들이 한데 모여서 생긴 게 저거란다. 마귀. 아무 데서나 막 생기는 건 아니고, 주로 사념이 깃들기 쉬운 물건들을 매개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뭐 저주 들린 항아리, 그런 거?”
“항아리는 안 생기지. 혼자서 빚잖아.”
단순히 연식이 오래된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 가능한 많은 이종족들이 접촉할 수 있고 접촉 후에는 쌍욕이 튀어나오게 만드는 물건들. 그러니까, 길바닥에 튀어나온 돌부리나 머리 부딪치기 쉬운 계단 천장 같은 것에 마귀가 들리기 쉽단다.
“대체로는 별로 안 위험하고. 좀 더 잘 걸려 넘어지거나, 머리 좀 더 잘 부딪치거나, 그 정도?”
“저놈은 쓰레기통 집어 던지고 있는데?”
“초동대처를 잘못하거나, 너무 오래 방치하면 저렇게 되기는 해. 어쨌든… 네가 왜 불려왔는지는 이제 잘 알겠다.”
나도 대충은 알 것 같다. 저 ATM을 때려 부숴달라는 게 아니라, 저 안에 든 마귀 없애달라고 부른 거잖아.
저게 마력 찌꺼기 같은 거라고 했으니, 잡는 것 자체는 간단할 터다. 저 ATM 안에 있을 마귀를 건드리기만 하면 될 테니까. 문제는 어떻게 그러느냐다.
[ 유효시간이 초과되었습니다. ]
저놈이 이젠 반쯤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수십 kg가량 될 영수증파쇄기는 바닥에 쾅쾅 내려찍어대고, 찌그러진 쓰레기통은 가속도 붙은 인공위성마냥 ATM의 머리 위를 붕붕 회전해 대고 있다.
심지어 액정 안의 화면이 간간이 위로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리 봐도 눈이 뒤집힌 걸로밖에 안 보였다. 저러고 있는 놈한테 어떻게 맨몸으로 다가가냐고.
[ 입금. 현금. 어서. ]
“혹시 저 마귀 잡는 법도 알아?”
“우선… 가까이 다가가지만 않으면 해는 안 끼칠 거야. 빙의한 물체에서 멀리 못 벗어나니까. 그리고, 방법은… 음….”
턱에 손 짚고 곰곰이 생각하다, 자신 없다는 듯 의견을 말해왔다.
“대화를 한다든가?”
“대화를 하라고? 저 눈 돌아간 놈이랑?”
“지금 저놈도 우리한테 말 걸고 있잖아. 현금 입금하라고. 최소한 왜 저러는지도 모르고 가까이 가면 더 난리 치지 않겠어? 지금도 저러는데?”
“그…게 그렇게 되나…?”
“애초에 내가 마귀에 대해 빠삭한 것도 아니고. 내가 마수, 게이트 전공이지 마귀 전공 헌터인 것도 아니니까―”
“알았어, 일단.”
당장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화로 해결하자는 방안 자체는 나도 마음에 든다. 우선, 대화가 통하는지부터 알아야 하니….
“야!!”
ATM에게 말을 걸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내 말 알아듣냐?! 내 말 들리면, 어, 별 버튼. 틀리면 우물 정 자 버튼을―”
[ 현금. ]
음성인식 두 글자를 출력하고는, 쓰레기통을 바닥에 쾅쾅 내리찍어 댄다.
“저 쓰레기통 두들기는 게 혹시 모스 부호인가?”
“야 이찬, 너 지금 상태 안 좋아 보인다.”
많이 안 좋다. 미친 ATM 상대로 대체 뭔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였다. 편의점에서 첫 근무하던 날에 딱 이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 또는 통장, 카드를 투입해. 어서. ]
“…왜 달라는 건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거면 돼?”
누나가 ATM의 말을 받아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ATM이 둥둥 띄워대던 파쇄기와 쓰레기통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고, 현금 투입구가 덜컹거려대기 시작했다.
[ 현금을 투입해 주십시오. ]
“현금 없는데.”
[ 현금을 투입해― ]
“…저러는 거 보면, 쟤가 우리 말을 알아듣지는 못하는 것 같고.”
음성인식 기능이나, 카메라 달린 ATM이 드물긴 하다. 그래도 지갑에 바로 반응이 온 걸 보면, 어떤 수단으로 우리 모습을 보고 있다는 건데.
천장을 슬쩍 올려다보니, 방범카메라가 고정이 반쯤 헐거워진 채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걸 눈으로 삼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간다.
[ 현금. 또는 통장, 또는 카드. 어서. ]
“이찬. 너 카드 있냐?”
“난 없어. 아까 시험장에서 지갑이고 맛폰이고 다 반납하고 와갖고.”
“나도 오늘 법인카드밖에 안 들고 왔다, 야.”
법인카드는 입출금이 안 된다. 허나, 이건 당장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입출금 여부보다는, 일단 들고 다가가면 저놈이 우리 공격하진 않을 거 아냐. 입금해야 되니까.”
“…그렇네. 넣기 전까진 법인카드인 줄도 모를 거고.”
“가까이 다가가서 저 ATM 만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일단 그거라도 들고 가보는 게 어때?”
여기까지는 누나도 별 이견 없이 동의했다. 누나가 지갑 안에서 법인카드를 꺼내자, 쓰레기통과 영수증 파쇄기가 아예 바닥에 얌전히 내려앉았다.
머뭇거리면 꿍꿍이가 있는 걸 들킬 것 같아, 최대한 허리 꼿꼿이 세워 당당히 걸어갔다. 누나와 나란히 선 후, 슬그머니 ATM 키패드 위에 손을 얹었다.
[ 카드를, 화살표 방향으로 넣어. ]
“뭐?”
[ 어서. ]
“이찬, 뭐 해. 오래 걸려?”
누나가 작게 속삭여 왔으나,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게….”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