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64화 (65/201)

64화. 지하실의 편돌이 (1)

새벽 근무하는 동안 별일은 없었다. 주말 다 지났는데 진상들도 좀 쉬어야지.

해 뜨고 아침 8시 되어서는 직장인들 상대로 디펜스 좀 하고, 디펜스 끝나고 나서는 샌드위치나 커피 흘린 자국으로 난장판 된 테이블 치우고, 쓰레기통 비우고….

대걸레로 바닥 밀고 있자니 9시 20분 즈음에 점장이 왔다. 점장이 오고 나서야 새벽 내내 궁금했던 걸 물어볼 수 있었다.

“지하창고는 왜 내려가신다는 겁니까?”

내가 지하창고를 딱 한 번 내려가 봤다. 그것도 근무 첫날에.

그 뒤로는 내려가 본 적이 없다. 갈 이유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새벽 중에 언제 손님 올지 모르는데 자리 비울 수도 없고, 아침에 짬 내기도 좀 그렇고. 밤새워서 졸려 죽겠는데 잠을 자야지, 지하는 왜 가.

이런 이유로 내가 창고에 대해 아는 거라곤 두 가지뿐이다. 하나, 뭔가 신기한 게 많다는 거. 둘, 아무튼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라는 거.

재고는 대부분 점장이 마법으로 채웠고, 내가 채우는 건 주류 쪽 코너가 전부였으니까. 지금까진 점장이 별말이 없었기에 나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젠 이유가 생긴 듯했다.

“그게… 잠깐만.”

점장은 카운터 안쪽에 자기 짐을 집어넣고는 구석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전에 작성했던 근로계약서였다.

“우리, 재계약하기로 했었잖어.”

“예.”

그러려고 자격증 딴 거였으니까. 내 몸뚱어리가 특이하단 걸 숨길 수가 없으니, 아예 숨길 일이 없도록 자격증 따고 이곳에 재계약해서 알을 박자는 거.

“재계약을 하려면, 우리 편의점에서 반마법사가 필요해서 고용했다고 적어놓긴 해야 하는데….”

말하며 근로계약서의 업무내용 부분을 가리키는 점장. [상품판매, 매장관리 및 관련 부대 업무]라 적혀있다. 바코드 잘 찍고 청소 잘하고 손님 받으면서 트러블 안 일으키는 게 지금 내 일이란 뜻이다.

내가 딴 자격증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들이다. 여기가 이세계 편의점이긴 해도, 지금 가판대에 진열된 품목들은 정상적인 부류의 것들이었으니까. 라면, 과자, 즉석식품, 음료수, 주류, 기타 등등.

가끔 뱀파이어나 드워프들이 알코올 섞인 혈액팩이나 수염크림 같은 걸 사 가기는 하지만, 이것들도 브랜드 있고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제품들이라 내가 딱히 만질 필요가 없다고도 하고….

“그래서 생각하신 게 지하창고 관리라는 말씀이신 거죠.”

여기까진 이해가 됐는데,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지옥마 박제든 뭐든, 진열대에 진열도 안 할 상품들을 왜 굳이 지하에 창고까지 만들어서 보관해두는 것인가?

묻자, 점장은 살짝 얼굴이 붉어져서는 부끄럽다는 어투로 대답해왔다.

“그게, 좀 우스운 얘기인데… 듣고 나서 웃으면 안 된다?”

“네.”

“사실, 내가 장사 시작한 게 이 편의점이 처음이야.”

“이 편의점이 첫 가게라는 얘기세요?”

“응. 그래서 지하에 있는 것들도 처음엔 진짜로 진열해서 팔려고 했었거든?”

편의점에서 파는 품목에 제한사항이 거의 없긴 하다. 업주가 원하기만 한다면 패딩점퍼나 삼선 쓰레빠를 들여다가 팔아도 되고, 부탄가스를 가져다 팔아도 된다. 그나마 제한이 있다면,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의약품들 정도?

심지어 이 세상 편의점법은 나 사는 곳보다도 훨씬 더 느슨해서, 업주가 관련 자격증만 소지하고 있다면 지옥마나 드래곤 비늘을 팔아도 상관없다는 게 점장의 설명이었다.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자격증 따둔 거 많구. 찬이 꺼는 없지만.”

“옛날에 대체 무슨 일을 하셨길래….”

“마법사 했지. 여기저기서.”

여기저기라고 말해도 난 잘 모르겠다.

이 세상 법이 대체 왜 그러냐는 부분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음주운전도 한국에선 면허취소지만 엘살바도르에선 총살형이고, 불가리아에선 2회 적발 시 교수형이고 그러잖아. 단지 궁금한 게….

“진열한 거 보고 손님들이 뭐라고 하진 않았어요?”

“뭐라고 안 했지. 들어오지도 않으셨으니까….”

라면 한 봉지 사러 편의점 왔더니 정문 앞에 갈기 활활 타오르고 있는 지옥마 한 마리가 굳건히 서 있는 거다. 아니면 그 비스름한 거든가.

당연히 아무도 안 들어왔고, 당시만 해도 초보 장사꾼이었던 점장이 이걸 깨닫고 각성하는 데에 정확히 반나절이 걸렸다고 한다.

들으면서 좀 의외였던 게, 나는 점장이 평생 상식인으로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이걸 듣고 나니까 좀… 깬다.

“그래도 처음엔 잘될 줄 알았는데….”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점장 얼굴이 홍당무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채였다. 다 듣고 나서도 딱히 웃을 마음이 들지는 않았고, 안쓰럽기만 해서 덧붙였다.

“뭐… 차별화가 리스크가 큰 전략이긴 합니다, 점장님.”

“으으….”

“정 찝찝하시면 저도 제 흑역사 하나 말씀드릴까요?”

“…….”

“네.”

어제 점장이 ‘마법사는 논리적인 듯하면서도 지극히 비논리적인 직종이다’라느니 뭐니 했던 게 떠오른다. 그게 점장 본인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었구만.

어쨌든 이러한 사연이 있어 진열은 안 해도, 안 팔리는 건 또 아니란다. 팔리는 빈도도 이틀 내지 하루에 하나꼴로 꽤 잦은 편이라 하고.

“그 손님들은 진열도 안 하는 걸 뭔 경로로 알고 찾아온답니까.”

“경로야 많지. 윤하 통해서 찾아오는 헌터분들도 있고, 입소문 듣고 찾아오는 분들도 있고.”

“많다고 하셔도, 저는 받아본 적이 없어서 잘….”

“내가 낮에만 와달라고 부탁했거든. 밤에 일하는 직원은 잘 모를 거라구.”

그랬단다. 낮에만 오는 손님들이 워낙 자주 찾아오기도 해서, 굳이 창고를 닫지는 않고 지금까지 운영해오고 있다― 는 말로 설명을 마친 점장은, 직후 날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찬이만 괜찮다 하면, 창고 일도 맡겨보고 싶은데….”

“그러셔요.”

바로 대답했다. 점장이 눈을 크게 떴다가, 고개를 갸웃해왔다.

“어떻게 일할지 아직 얘기도 안 했는데?”

“그렇긴 한데, 이게 못 하겠다고 안 해도 될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안 하면 재계약 못 하는 거잖아. 그럼 해야지, 뭐.

더해서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ATM이 손님들 상대로 강도질도 하고 그러는 무시무시한 세상인데, 마냥 쫄면서 살 수는 없는 거고 말이다. 이런 거에 익숙해져야 나중에 다른 일도 하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단지 점장한테 미안한 게 있다면, 기존에 일해오던 전문가들 대신 날 시키려 하고 있다는 거. 똑같은 돈 받고 일 더 잘하는 양반들이 있다면 그 양반들 시키는 게 난 맞다고는 생각하지만….

“처음부터 잘하는 이종족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렇긴 하죠. 그러니까 다들 경력직 뽑는 거고.”

“난 그거 싫어, 찬아. 전부 경력직만 뽑으면, 신입은 어디서 경력을 쌓아?”

나한테 이 질문에 대답할 만한 창의력이 있었다면, 진즉에 구글 본사에서 일하고 있지 않았을까. 날 뚫어져라 바라보던 점장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리구 나는 전혀 걱정 안 해. 찬이는 금방 잘할 테니까.”

“점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세요?”

“응.”

“그럼 저도 그런 줄 알겠습니다.”

이런 대화를 하다 보면, 나도 운이 나쁘진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역만리 이세계에서 이렇게까지 나 믿어주는 사람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잡담은 이렇게 맺어졌고, 이젠 일을 어떻게 할지를 배울 차례였다.

“과정은 정말 별거 없어. 우선 POS기에서 간이 전표 뽑구.”

POS기에 꽂혀있는 열쇠 두 칸 돌리고, 전환된 화면에서 관리메뉴 항목을 누르는 점장. 이후 구석의 출력 항목을 터치해 전표를 뽑아서는 내게 내밀어왔다.

“전표에 적힌 물건들 오른쪽에 보면 만료 기간 적혀있지?”

“네.”

“그게 관리받은 것들 만료 시한인데, 1주일 미만으로 남은 것들만 확인해주면 돼. 매주마다 한 번.”

“오늘 관리해야 될 게 많아요?”

“하나밖에 없어. 그래서 30분 일찍 왔지.”

점장 말마따나 과정 자체는 간단해 보였다. 출력된 전표도 짧았고. 제때 퇴근할 수 있다는 게 좋긴 한데, 어째 전표에 적힌 품목이… 좀….

“점장님. 용사 세트가 대체 뭡니까?”

바로 떠오르는 게 없어 물었으나, 점장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찬이네 세상은 용사 하면 어떤 느낌이야?”

“어… 매일 던전에 들어가서 폐지를 줍습니다. 8명 정도가 번갈아 가면서.”

“용사가 폐지를 주워? 그것도 8교대로?”

“다들 쌀값 버느라 바빠갖고….”

사실 이렇다 할 이미지가 없긴 하다. 보편적인 거라면 한손검과 방패를 든 인간 남캐가 있겠지만, 요새 한국에서 검방 든 인간 남캐는 죄다 똥캐 취급받잖아?

이외에도 일본에서 용사 하면 근엄한 얼굴로 동네 항아리란 항아리는 다 깨고 다니는 강도 놈이라는 인상이고.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할 부분 같아서 나도 잘은 모른다고 했다.

“차라리 직접 보는 게 더 빠르겠다.”

“저도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여 정문 잠그고,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라 적힌 코팅지의 뽁뽁이를 붙인 뒤 점장과 나란히 음료 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을 열자, 그동안 이 악물고 무시해왔던 지하창고 문짝이 눈에 들어왔다.

읏차― 하며 능숙한 발놀림으로 문손잡이에 발을 끼워 열어젖히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단을 내려간다. 뒤를 따라서 한 층 계단을 내려가자, 창고였다.

첫날 들어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참 기이한 곳이다.

음료 창고 지하에 지어놨는데도 춥질 않고, 사방이 시멘트로 되어있음에도 습하질 않다. 천장 조명은 전깃줄 연결된 것도 없는데 불이 어떻게 켜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찬이, 윤하한테 창고 얘기 들은 거 있어?”

“아직은요. 여기서 네 칸 너머에 드래곤 비늘 들어있는 건 기억나는데.”

“그게 아직 안 팔렸기는 한데, 오늘은 거기까지 갈 일은 없구.”

창고 구조에 대한 간략한 설명. 총 여섯 칸이고,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칸에는 편의점에서 당장 팔아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무난한 물건을 들여놨다고 한다. 가끔 재고 오발주 날 때도 여기다 들여놓는다고 하고.

그 뒤쪽으로 가면 갈수록 좀 더 매니악한 물건들이 많다고 하며, 복도 끝 마지막 칸에 대해서는 점장이 아예 이런 식으로 말을 맺었다.

“저기는… 찬이는 안 들어가도 돼. 아직은.”

“뭐가 들었길래 그러십니까.”

“평소엔 얌전한데, 취급 잘못하면 위험한 것들.”

어째 다이너마이트나 우라늄 같은 게 떠오르는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터진 거라곤 건전지 들어간 전자레인지가 전부였으니, 저기도 별일 없겠지….

다시 전표를 들여다보며 점장에게 물었다.

“이 용사 세트는 몇 번째 칸에 넣어놓으신 거예요?”

“첫 번째 칸.”

용사 세트가 편의점에서 당장 팔아먹어도 안 이상할 물건인가?

긴가민가했는데, 점장 따라 들어가서 직접 보니 더욱더 긴가민가해졌다. 쌓여 있는 여러 물건 중 큼지막한 돌멩이에 검 한 자루가 떡하니 박혀있는 게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저게 용사 세트야.”

“어….”

혹시나 싶어 물어봤다.

“저거 진짜예요?”

“아니? 장난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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