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70화 (71/201)

70화. 편의점 꽃가루 주의보 (5)

누나 돌려보낸 뒤엔 하도 할 게 없어서, 점장이 빌려준 패드로 밤 내내 녹화된 뉴스만 봤다.

그 중엔 오늘 아침 일기예보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날씨는 맑으나 건조하고 바람이 좀 분다고 했다. 그러니까 꽃가루 조심하고 가급적이면 마스크 쓰고 다녀라.

보고서도 몇 시간 동안은 별생각 없었으나, 해가 뜰 즈음 퍼뜩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 이거 큰일 난 거 아닌가?

이 우려는 애석하게도 현실이 되었다.

“사장님, 혹시 마스크 있나요?”

“있기는 한데, 어떤 거 필요하십니까.”

“전부 다요!”

“저희가 전부 다는 못 드리고….”

“사장님, 마스크 있습니까?”

“지금 앞의 손님 받고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리시―”

“사장님, 마스크 주세요.”

어디서 집단 최면이라도 걸고 있나 보다.

어미만 살짝씩 바뀔 뿐,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이 다 똑같은 소리에 똑같은 요구를 해대고 있다. 마스크 좀 달라고. 근데 어쩌냐? 우리도 이젠 남은 게 없는데?

어젯밤에 누나가 가져온 마스크가 대충 80개쯤.

전표 찍고 재고 파악 할 때만 해도 이 정도면 이틀은 버티겠다 싶었는데, 이틀은 개뿔. 이십 분 만에 다 팔려버렸다. 심지어 낱개로만 팔았는데도.

하여 8시 20분부터는 손님들 태반을 돌려보내기만 했다. 알았다며 얌전히 돌아가 주는 손님이 제일 적었고, 대부분의 손님은 어떻게든 대체품을 찾으려고 했다.

“그럼… 티슈 있나요?”

그거야 있지. 위치를 알려줬더니, 가져와서 결제하고는 바로 한 움큼을 뽑아서 코랑 입을 가린 채로 나가버렸다.

다음 손님은 떡대 오크였는데, 코 한 번 훌쩍이고는 의약품 함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비염약 있어요?”

이건 없다. 편의점서 의약품을 팔기는 하지만, 처방전 없으면 못 사는 것들은 못 팔거든. 기껏해야 파스, 감기약, 소화제, 빨간약 정도가 전부다.

“비염약은 약국을 가 보셔야 합니다만….”

“약국이 아직 안 열었어요.”

이게 문제다. 난 이 세상 이종족들 출근 시각을 난 오전 9시 ‘까지’로 짐작하고 있다. 매일 이맘때쯤 붐비다가 9시 전후로 손님 뚝 끊기니까 맞겠지.

그리고, 마스크? 비염약? 이것들 다 약국가면 훨씬 더 많이 팔고, 좋은 것들 판다. 근데 그 약국 셔터가 아직 안 올라갔단 말이다. 9시가 안 돼서.

밤에야 술 며칠 덜 먹으면 되지― 하며 안 나오면 될 일이지만, 출근은 하기 싫다고 안 할 수가 없잖은가. 이런 생각이라, 이 오크가 궁여지책으로 편의점을 찾아온 심정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해는 되는데… 없는 걸 어떻게 파냐고. 대신 차선책이라도 넌지시 말해봤다.

“혹시 꽃가루 때문에 눈 따갑거나 하시면, 인공눈물이라도 하나 사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거 안약이에요?”

“안약은 저희가 못 팔죠. 다른 거예요.”

이거 착각하는 손님 가끔 있긴 하지. 인공눈물이랑 안약이 똑같은 건 줄 알고 안약 찾으러 오는 손님들.

엄연히 다른 거고, 그래서 의약품 함에 넣어 팔지도 않는다. 티슈가 있었던 위치를 똑같이 알려주니, 잠시 뒤 인공눈물 50개입 한 통을 가져와서는 냅다 결제하고 나가버렸다.

직후에 고블린 하나가 들어와, 바로 카운터로 와서는 내게 물었다.

“야, 알바야. 안에 잠깐만 있다가 가도 되냐?”

“잠깐이 어느 정도 말씀하시는 겁니까?”

“버스 올 때까지.”

버스정류장이 딱 서른 걸음 거리에 있고, 나 서 있는 카운터에서도 버스 정차하는 게 보인다. 밖에서 꽃가루 들이마시긴 싫으니, 편의점 안에서 기다리다 버스 오는 걸 확인하고 나가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된다고 할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 매뉴얼대로 했다.

“껌이라도 한 통 사신다면야.”

“껌은 왜 사라는 건데. 뭐 자릿세라도 받겠다고?”

“비슷합니다.”

지금 이 고블린 요구를 받아줬다간 나중에 와서 똑같은 소리 하는 방문객들도 죄다 받아줘야 될 건데, 그러다간 여기가 간이 버스정류장 부스가 될 게 뻔했다. 아니면 난민수용소든 뭐든.

그렇다고 쫓아내긴 좀 그렇고, 차라리 난민 대신 손님을 해주면 안 되겠냐는 의미로 권해봤다. 내 말에 고블린이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껌 진열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기다려 봐. 뭐 살지 골라볼 테니까.”

그러고는 10분을 말 그대로 골라보기만 하다가, 버스 오는 거 보자마자 뛰쳐나가더라고. 이 고블린 놈들은 언제쯤 내가 이겨보려나 모르겠다.

이후로도 손님들 무진장 밀어닥치고, 오는 손님들 거리로 반송하고.

그러다 9시 정각 되자마자 귀신같이 손님이 뚝 끊기고, 한가해졌다. 의미 없이 바빴던 탓인가, 평소보다 더 진이 빠지더란다.

오늘 근무는 이걸로 끝이겠거니 하며 테이블을 치우려 했는데, 정문 앞에 느닷없이 그림자가 졌다. 바라보니, 샛노랗게 도색된 중형차 한 대가 코앞 갓길에 막 차를 세우고 있었다.

어째 유치원 승합차 같다. 아니, 하다 하다 이젠 단체 손님까지 찾아와…?

다행히도 단체 손님은 아니었다. 차에서 내린 게 운전석의 샐러맨더 운전수 딱 하나. 평소에 받는 샐러맨더 손님들보다 눈가에 주름이 덜하다. 느낌이 나랑 비슷한 나이 또래처럼 보인다.

샐러맨더가 매장에 들어와 물건을 고르는 사이, 승합차 안쪽을 슬쩍 바라봤다. 썬팅된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내부가 보이기는 했고, 꼬꼬마들이 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장님, 계산 부탁드릴게요.”

금세 골라왔구만. 가져온 건 보리차 PET 딱 한 병. 계산하고 보내려다, 딱 궁금한 게 생겼다. 잠깐 질문을 고른 뒤 슬쩍 물어봤다.

“애들 태워서 막 돌아가는 중이신가 봐요, 손님.”

이 정도면 덜 부담스럽겠지. 샐러맨더는 편돌이가 느닷없이 말을 걸어온 데에 놀란 눈치였으나, 잠시 뒤 이해했다는 얼굴이 되었다.

“어… 아. 아녜요. 애들 태우고 가던 건 아니고. 저거 빈 차예요.”

“아, 그래요?”

“네. 어제부터 임시휴원 중이거든요. 꽃가루 때문에.”

이놈의 꽃가루 때문에 애 부모들이 애들을 밖으로 안 내보내고, 유치원서도 그걸 알아서 자체적으로 문을 닫았단다.

“방역 다 끝나기 전까진 계속 휴원할 것 같고요. 헌데….”

말을 줄이는 게, 그건 갑자기 왜 묻냐는 의미 같다. 둘러대야 할 정도로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 솔직하게 말했다.

“단골손님 중에 유치원생 애가 하나 있는데, 얼굴 못 본 지 며칠 됐거든요. 혹시 아실까 싶어서.”

“애가 단골이라구요?”

“네. 며칠 간격으로 와요. 용 종족 애인데.”

종족까지 말하자, 샐러맨더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저희 유치원은 용 종족 애가 없을 텐데….”

“걔가 그, 저쪽 학원지구 쪽 유치원 다니는 애거든요?”

“다른 유치원이네. 저 일하는 곳이 세계수 1단지 안에 있는 유치원이거든요. 거기보다 좀 더 먼 곳.”

“그럼 아닌 거 맞겠네요. 묻는 게 좀 뜬금없으셨을 텐데, 그래도 대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뭘.”

서로 작게 고개 꾸벅인 뒤, 샐러맨더는 차를 타고 떠났다. 확실하게는 못 들었지만, 용 꼬맹이가 요 며칠간 왜 얼굴을 안 비치고 있는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더 먼 곳에 있는 유치원도 휴교했다잖은가. 그러니 그 꼬맹이 유치원도 당연히 문 닫았겠지.

방역 끝날 때까지는 볼 일 없을 것 같고. 어련히 집에서 잘 지내고 있을 애한테 띠띠동갑 아재인 내가 구태여 연락하긴 좀 그렇고….

혹시라도 걔 엄마가 볼지도 모르고. 키즈카페 알바하던 시절에 체감한 게 하나 있는데, 애 부모들이 애랑 같이 있을 땐 애한테 휴대폰을 잘 안 쥐여주더란다. 내 추측으로는 폰게임하다 소액결제 할까 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시간을 보니 9시 10분.

딴생각 그만하고, 내 일부터 끝내고 보련다. 우선, 샌드위치나 삼각김밥 포장지로 난장판이 된 테이블부터 치운 다음….

바닥에 물걸레질 좀 하고, 담배 검수를 끝내고도 시간이 좀 남았다. 매장 안에서 할 일은 다 했고, 바깥 갓길 담배꽁초를 치우다 보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다.

하여 대빗자루를 들고 정문 밖으로 나왔는데, 도보를 딛는 감촉이 좀 기이했다. 꼭 살눈 위를 밟는 기분이다.

발바닥을 떼보니, 디딘 도보 위에 또렷하게 발자국이 남아있다. 신발 바닥은 핑크빛이 되어버렸고.

꽃가루였다. 이놈의 꽃가루가 마스크를 씌우는 걸로도 모자라, 거리 전체에 다 내려앉고 있다.

“이런 씨, 남 일인 줄 알았더니….”

담배꽁초보다 이것부터 먼저 치워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살눈 수준이지만 쌓이고 쌓이다 보면 함박눈 될 거 아닌가. 그거 손님들이 밟고 들어오면 매장 바닥도 꽃가루 천지 될 거고.

이 생각으로 몇 번 쓸어봤는데, 마냥 단순한 꽃가루가 아닌지 쓸어봐도 꿈쩍을 안 한다. 다른 매장은 어떻게 하나 싶어 거리를 둘러봤더니, 저 멀리서 연갈색 머리 여자가 총총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제 9시 50분인데, 점장이 좀 일찍 나왔다. 가까이 온 점장한테 바로 목례부터 하고, 바로 물었다.

“오늘 좀 일찍 나오셨네요, 점장님.”

“오늘 버스 배차가 좀 애매해갖구, 좀 일찍 와야겠더라구.”

“아하.”

“근데, 찬이는 왜 밖에 나와 있어? 꽃가루 마시게.”

“사실 그래서 나왔어요.”

이게 어지간히 많아서 중간에 안 치우면 문제 생길 거 같다. 말하자, 내가 손에 쥔 대빗자루와 도보를 번갈아 보고는 중얼거렸다.

“확실히, 한번 치우긴 치워야겠다.”

“저도 그 정도 생각인데, 대빗자루로는 아무리 해도 안 쓸리더라고요. 혹시 저희 매장에 양동이 있습니까?”

“양동이가 있기는 한데, 물로 쓸어내리는 건 안 될 것 같구… 음….”

잠깐 고민하던 점장이 내 얼굴, 정확히는 내 마스크를 슬쩍 바라보고는 물었다.

“찬이는 꽃가루 마시면 어때? 몸에 문제없어?”

“저요? 저는… 괜찮은 거 같은데.”

마스크 벗고 숨 쉬어봐도 살짝 텁텁하기만 할 뿐, 크게 문제는 없다. 점장이 물어본 것도 순전히 걱정돼서 묻는 건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 꽃가루가, 나무들이 오염된 마나를 먹고 과잉 성장해서 이렇게 됐다고 그랬잖아. 뉴스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긴 하… 아하.”

도중에 이해했다. 나무가 마나를 잘못 먹어 생긴 꽃가루니까, 꽃가루도 오염된 마나를 머금고 있을지 모른다. 이 얘기 아닌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몸을 숙여 만져봤다.

까끌까끌한 대빗자루로 쓸어도 꿈쩍도 안 하던 꽃가루들이, 손가락이 닿자마자 푸석 먼지를 일으키고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런 거 할 때면 내 몸뚱어리가 참 쓸 만하단 게 체감이 된다.

“잘되는 것 같네요, 점장님.”

“응. 근데… 난 찬이한테 동의 먼저 구하려구 했었는데.”

“예?”

이것도 도중에 이해했다. 점장이 내가 쇠뿔을 단김에 빼려고 들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좀 더 듣고 나서 할 걸 그랬다.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어차피 집 들어가서 씻으려고 했고.”

“그래도 좀… 피부에 안 좋을 건데.”

“석회가루나 시멘트 맨손으로 만지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그러면… 하는 대신, 세 번 씻고 자는 걸루. 꼭.”

“네.”

옛날에 비슷한 짓 할 때는 젊은 놈이라 괜찮다며 장갑도 잘 안 줬었다.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지, 뭘.

그래도 몸 숙이고 허리 숙인 채로 쓸다간 디스크가 재발할 것 같아, 잠깐 고민하다 신발을 벗었다. 양말도.

나름대로 효율성을 고려한 선택이다. 아무래도 손보단 발이 더 크잖은가?

우습게 보이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점장이랑 나 말고는 거리에 행인도 없었다. 맨발바닥으로 도보 위 꽃가루들을 슬슬 쓸고 있자니, 점장이 소감을 말해줬다.

“고생하네, 찬이.”

“뭘요. 당장 저는 이게 되니까 하는데, 점장님은 어떻게 하신답니까.”

“나는 걱정 말구. 밖은 어떻게 못 해도, 매장 안에선 청소마법 쓰면 되거든.”

“그…럼 저 지금 이러는 거 별 소용 없는 거 아녜요?”

“소용 엄청 있지. 찬이가 치운 만큼 청소 덜 해도 되는 건데.”

헛짓하는 건 아니라니 다행이다. 치우는 동안 10시가 조금 지났고, 정문 앞도 보도블럭 패턴이 보일 정도까지는 청소가 됐다.

슬슬 집에 가련다. 인수인계를 마친 뒤, 점장이 알아야 할 내용들을 추가로 말했다.

“오늘 오전 중에 마스크 찾는 손님이 8할이었습니다, 점장님. 그중 2할한테밖에 못 팔았고.”

“에구. 그게 발주 최대한 많이 넣은 거였는데….”

“물량 모자라는 게 이해가 되긴 해요. 제 동네도 작년에 마스크 때문에 한번 난리 난 적 있거든요.”

“찬이네는 어땠는데?”

“뭐… 사재기도 하고 사기도 치고, 마스크 관련주는 죄다 상한가 치고. 한 3개월쯤 그랬나?”

당장 나도 마스크 하나 구하겠다고 온 동네 약국 편의점은 다 뒤지고 다니던 추억이 새록새록… 아니지. 이건 빈말로라도 추억은 못 된다.

이 꽃가루야 일시적인 현상이니 그 꼴까진 안 나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오늘 오전 같은 근무를 며칠 더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시청에서 방역 작업을 끝낼 때까지.

하여 편의점을 나서기 직전, 점장에게 작게 푸념해 봤다.

“이놈의 꽃가루 좀 빨리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이놈의 꽃가루가 여럿 잡는 것 같다.

누나는 지금도 잔업 뛰고 있을 거고, 치와와는 개판 된 회사에서 쌍욕하고 있을 거고, 꼬마는 밖을 못 나오고, 점장은 마스크 구한다고 고생이고, 난 마스크 못 팔아서 고생이고.

뭔가 답답했다. 말로 표현은 못 하겠지만,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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