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80화 (81/201)

80화. 여긴 난장판이지 편의점이 아니에요 (3)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카운터 밑에 분실물로 처리해 뒀다.

언제가 됐든 생각나면 어련히 찾으러 오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무려 50만 원이잖은가. 이 돈이면 라면 25박스를 살 수 있다고?

허나 새벽 중에는 안 오셨고, 해 뜨고 나서 몰려오는 직장인들 중에도 어르신은 없었다. 손님들 사이에 어르신이 계시나 안 계시나를 틈틈이 살피다가….

때려치웠다. 신경 쓸 겨를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힐 한 갑만 주세요.”

“어… 죄송함다. 다 팔렸어요.”

“그럼… 퍼플 한 갑만.”

“그것도 다 팔려서 없슴다.”

“아니, 편의점에 담배가 다 팔려서 없는 게 말이 돼요?”

마진과는 별개로, 편의점 매출은 담배가 절반이다. 편의점 말고 담배 파는 곳 찾기가 힘들잖아.

그래서 이 반응이 이해는 된다. 되는데, 진짜로 다 팔려서 없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밖에서 마른 잎사귀 몇 장 뜯어다 말아줘? 이면지에?

이런 식으로 앵무새마냥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편의점에 담배가 왜 없어요?’라는 말을 듣다 보니 사람이 참, 지치고 초연해지더란다. 50만 원이고 나발이고, 언제가 됐든 알아서 찾아가겠지….

어느 쪽이든 오늘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9시 이후로는 아예 돈 쪽을 쳐다도 안 봤다. 무심하게 담배 좀 세고, 재고도 채우다가―

“찬아, 나 왔… 응?”

9시 50분에 점장이 왔다. 매장에 들어서서는 담배 진열대를 한 번 보고 고개를 갸웃하고, 이어서 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두 배로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오늘도 무슨 일 있었어?”

점장이 ‘오늘도’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하는 게 좀 많이 슬프더라. 여기에 아무 위화감을 못 느끼는 내 인생도 뭣같고….

“별일 있었던 건 아니고, 손님이 좀 많았어요.”

운을 뗀 뒤, 인수인계부터 했다. 밤에 해골 군인 양반들한테 담배 다 털리고, 어르신 한 분이 매장 기프트카드들도 죄다 털어갔다. 재고 채우셔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다 털어간 어르신께서 분실물도 하나 두고 가셨구요.”

카운터 밑에서 50만 원을 꺼내 올려놓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점장이 소감을 말해줬다.

“오히려 분실하기가 힘든 액수 같은데….”

“사연이 있어요, 이게.”

기프트카드 쓰는 걸 내가 도와줬고, 사례로 주겠다는 걸 내가 안 받았다. 그랬더니 돈이 아니면 관상이라도 한번 봐줘도 되겠냐고 하시더라.

이 부분에서 점장이 떠오른 게 있는지, 내게 바로 물었다.

“혹시 그 어르신 종족이 어떻게 돼?”

“종족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진장 나이 드신 것 같았고, 츄리닝 입고 계셨―”

“아, 알겠다. 그분, 토지신 님일걸?”

“예?”

토지신은 또 뭐야. 내가 어젯밤에 접신을 했다는 소리야?

“음, 그러니까, 정말 신 님인 건 아니고, 음….”

말하고는 곰곰이 말을 고르다 내게 역으로 물은 게, 이 도심지가 도심지가 되기 전엔 뭐가 있었겠냐는 것.

“그야… 소가 달구지 몰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농사지었을 거고.”

“응, 그때 농사 잘되게 해주신 마법사분들이야. 마법으로.”

곡식이 잘 익게 하거나 가뭄 해결해 주는 농사 관련 마법 전공하신 마법사분들이고, 이 근방 살던 주민분들이 고맙다는 의미에서 붙여준 호칭이 토지신이란다.

단순히 호칭만 붙고 끝난 것도 아니고, 그분들 대부분 땅 일부를 사례받았다고도 하고. 일종의 명예직 비슷한 거라 보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마법 쓰시는 분이 이런 도심지엔 왜 계신답니까? 지방쪽 농사짓는 데 가시면 아이돌 되실 것 같은데.”

“그분들도 은퇴는 하셔야지. 평생 일할 순 없잖아.”

“아하.”

“더 일할 이유 없으신 분들이기도 하구.”

그야 그럴 터다. 수십 년 전에 이 동네 땅 받으셨다 했고, 여긴 지금 도심지가 되어버렸으니까. 올라가는 빌딩이나 건물 수만큼 땅값도 올랐겠지.

여기까지 알고 나니, 그 어르신께서 조만간 가챠겜 헤비과금러가 되실 광경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돈에 대해 1도 신경 안 쓰리란 것도 잘 알겠고….

내가 마음대로 써도 문제없을 거란 것도 알겠다.

“그래도, 저는 계속 분실물 처리 해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긴 해요.”

“아, 그래?”

“네. 역시 마음에 걸려갖고.”

난 고등학교 졸업한 뒤로 내내 일만 해왔고, 일한 만큼만 받으며 살아온 놈이다. 이런 식으로 돈 받아본 적이 처음이라, 어떻게 취급할지도 감이 안 잡힌다.

“가능하면 점장님께서 보관해 주셨으면 싶기도 하고요. 저는 나중에 모르고 써버릴 거 같아서.”

“나야 상관없긴 한데… 얼마나?”

“한 달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때까지도 안 찾아가시면, 뭐… 저희 밥 사 먹는 데 쓰고.”

“에이, 밥값을 왜 이걸로 내. 내가 사야지.”

“아무튼 쓰긴 써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 찬이 월세 내는 데 써.”

“벌써 냈는데요?”

이 주제로 잠깐 논쟁을 벌였다가, 쓸 일 생기거든 내가 알아서 하는 걸로 결론냈다. 이렇게 돈은 처리가 됐고, 다음 걱정되는 게….

“그분이 제 관상 봐줬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거 신빙성이 좀 있는 거예요?”

점장한테 설명을 듣기 전까지, 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정도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헌데, 신이라잖은가. 명칭뿐이긴 하지만, 아무튼.

“뭐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큰일을 몇 개 겪는다 하시더라고요.”

“다음에는?”

“그것들 다 잘 해결될 거라고 하셨고, 그 이유가 제가 인복이 좋아서라고도 하셨고….”

작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라고도 했지. 말하고 보니 참 모호한 것들뿐이다. 점장도 똑같이 느꼈는지, 설명보다는 추론을 해왔다.

“일을 큰일이라 느끼는 기준이 각자 다르잖아. 내 경우엔, 버스 배차 놓치면 큰일이구.”

“수수하시네.”

“그 토지신 님 경우엔, 바둑 지는 게 큰일이실 거구. 물론, 그분이 이걸 생각 안 하고 말하셨을 것 같진 않으니까….”

내 기준의 큰일이 일어나지 않겠냐는 게 점장의 결론. 잘은 몰라도 큰일이 일어나는 건 맞나 본데….

밤을 새워서 그런가, 떠올려보려 해도 머리가 잘 안 돌아갔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거래 봐야, 방주인한테 방 빼라는 소리 듣는 것 말고는 없―

* * *

밤에 일어나 출근했더니, 내 기준 큰일이 나 있었다.

“아, 찬이 일찍 왔네.”

“예, 근데….”

해맑게 인사를 건네는 점장 앞에, 날카로운 눈매의 손님 하나가 서있던 것이다. 입고 있는 검은 코트며 창백한 피부며, 몇 번 만났던 적이 있는 양반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데카드. 나 자격증 시험 치를 때 감독관 하던 그 뱀파이어. 누군지는 알겠는데, 이 양반이 여긴 왜 왔대냐?

“자격증 전달차 방문했습니다.”

내 얼굴에 쓰여있기라도 했는지, 툭 내뱉고는 코트 앞섶에서 수첩같은 걸 하나 꺼내 내밀어 왔다. 표지에는 큼지막한 육망성이 새겨져 있고, 위에는 ‘국가자격증’이라 적혀있다.

“수일 이내로 전달받으실 거라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기억해요. 하고는 있는데, 전 이게 택배로 올 줄 알았어갖고.”

이 양반이 자기 입으로 ‘배송’이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당연히 택배인 줄 알았지. 다 떠나서, 상식적으로 감독관이 직접 합격증 갖다주는 경우가 어디 있어?

“마침 이 근방에 볼일이 있었습니다.”

교수가 이 근방에 볼일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분, 30분 전부터 여기서 기다리구 계셨어.”

뒤에서 지켜보던 점장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 양반, 자격증은 핑계고 내 쌍판 한 번 더 보겠단 심산으로 찾아온 것 같다. 이유야 뭐, 그때 하다 만 교수직 제안을 다시 하려는 거일 테고….

점장 말에 감독관이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나 보다. 잠시 뒤,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재차 자격증을 흔들어왔다.

“그래서. 받을 겁니까, 안 받을 겁니까.”

“아. 주십쇼.”

받아서 펼쳐봤는데, 내부 구성이 꽤나 단출했다. 첫 페이지에 주의사항, 두 번째 페이지에 내 이름과 사진, 사진은 편의점 이력서에 붙였던 사진을 점장이 그대로 낸 것 같고….

외에 자격번호, 자격종목 적혀있고, 이 뒤로는 페이지 수는 많은데, 죄다 텅텅 비어있다. 뭔 구성이 이러냐. 매직―잉크로 쓰이기라도 한 건가?

“궁금하신 점 있습니까.”

“이거 술집 갈 때 신분증 대용으로 내도 돼요?”

감독관이 이 말을 듣고는 무척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내겐 나름 중요한 문제였다. 언제까지고 신분증 없는 불체자로 지낼 수는 없잖아.

“됩니다.”

“예. 그리고, 뒷면에 텅 빈 용지들 말인데요, 이것들은 용도가 뭡니까?”

“이제부터 당신이 채워야 할 곳들입니다.”

뭐래. 내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런 소린가?

감독관도 자기 말이 애매하다 느꼈는지, 자기 소매를 슬쩍 걷어 시계를 확인하고는 덧붙였다.

“일을 보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전달사항도 마저 말하고 가겠습니다.”

이러고는, 거절할 새도 없이 테이블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 감독관.

근데 지금 시간이 9시 55분이다. 차라리 지금 근무교대를 하고, 카운터에서 얘기 듣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은데….

“나 여기 좀 더 있다가 갈 테니까, 얘기 잘 듣구 와.”

“괜찮으시겠어요?”

“응.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구, 난 이쪽이 마음 편해.”

“…후딱 듣고 올게요.”

조만간 점장한테 밥은 못 사도, 맥주라도 한 세트 사든지 해야겠다. 감독관의 옆자리에 앉자마자 감독관이 입을 열었다.

“우선, 첫 번째 전달사항입니다. 현 시간부로, 당신은 반마법 전문가입니다.”

“어….”

“축하합니다.”

해주는 건 좋은데, 왜 축하를 전달사항으로 하냐고. 누가 억지로 시키기라도 했어?

“다음 전달사항은,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사무적인 어조로 마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 이 시점부터,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 전제하에 어떤 반마법 일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헌터 쪽 일도 상관없고, 민간 쪽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게 일을 맡길 의뢰자가 있다는 전제하의 얘기다.

“당신이 실기, 필기 수석 합격자이긴 하지만… 외부의 시선으로 봤을 때, 당신은 경력 4일 차 새내기일 뿐입니다.”

“다들 경력직만 찾는다는 말 같네요.”

“통념적으로는요. 하여 자격증 취득자들 대부분, 기존에 자신이 종사하던 업종 쪽 인맥을 통해 초기 커리어를 시작하는 편입니다.”

다들 지인 찬스를 쓴다는데, 내가 아는 지인이래 봐야 누나나 점장 말고는 없다. 듣고 있자니, 점장이 나한테 창고 일을 맡긴 것도 천운으로 느껴진다.

“아니면, 정책적으로 보완을 받든지.”

“정책요?”

“아카데미를 졸업한 직후에 자격증을 딴 자들, 갓 성인이 된 이종족들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경우, 기존 자격증 보유자가 사수 역할을 대신하는 정책이 있습니다. 수가 적어 거의 시행되지 않았던 정책이긴 합니다만.”

특별히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라, 내게 이 정책이 도입될 거라 한다. 말인즉슨, 반마법 전문가 한 명이 내 사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건데….

“혹시, 저한테 붙는 사수가 누굽니까?”

“접니다.”

이야, 그 어르신 참 영험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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