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82화 (83/201)

82화. 묘약은 사랑을 싣고 (2)

게시글 내용이 이러했다.

[자사에서 개발 중인 신약의 효능에 대한 검증을 의뢰하려 합니다. 연락처 기재해 두겠습니다.]

이게 내용의 전부였고, 외에는 PDF 파일이 하나 첨부되어 있다.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점장이 부연 설명을 해줬다.

“이건 찬이가 할 일이 딱 정해져 있을 것 같거든. 이론도 거의 필요 없을 거구.”

효능에 대한 검증. 이걸 단순하게 해석하면, 약 거의 다 만들었으니 테스트 좀 해달라는 소리란다. 절반도 채 완성 안 된 약을 검증할 리도, 이유도 없으니까.

이론 단계는 이미 지났을 테니 내가 신간 마법서를 뒤적일 일도 없지 않겠냐― 는 게 점장 의견이었는데, 들으면서 나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들더란다.

“음….”

“왜. 어려울 것 같아?”

“아뇨. 그것보다는 다른 게 좀….”

묘약, 제약회사. 나랑 관련이 없어야 정상인 단어들일 터인데, 분명 들어본 기억이 난다. 이걸 어디서 들었더라….

들은 수준이 아니라, 직접 만나봤다. 제약회사 다니는 서큐버스. 묘약 만든다고 했었으니 다루는 상품도 일치한다.

“점장님, 전에 제가 서큐버스 손님 말씀드렸던 거 기억나십니까?”

점장은 나보다 떠올리는 속도가 빨랐다.

“계산대에 부침개 부치신 그분?”

“예. 그분이 제약회사 다닌다고 점장님께서 말씀해 주셨었고.”

“그것도 기억… 아, 혹시 그분 일하시는 곳이 여기야?”

“그건 저도 몰라요.”

그 서큐버스가 자기 다니는 회사가 어디인지는 말을 안 해줬다. 서로 사랑 어쩌고 하며 헛물 켜느라 바빴으니까.

이 세상에 제약회사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 테지만, 랩실에 협업 의뢰할 정도면 규모가 작은 곳 같지는 않다. 본사가 있다면 도심지에 있을 거고, 그 서큐버스도 도심지에서 출퇴근하고 있으니….

난 이 생각이었는데, 점장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다.

“재수가 좋으면?”

“그야 뭐, 얼굴 몇 번 본 사이니까요.”

“…….”

뭔가가 걱정된다는 얼굴인데, 그게 뭔질 모르겠다. 생각하며 슬쩍 바깥을 바라보니, 정류장에 버스가 한 대 서 있었다. 그 앞 신호등은 빨간불.

“점장님. 저 버스 타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어? 어… 아, 응.”

후다닥 짐을 챙겨서는 정문 밖으로 나가려던 점장이, 잠깐 멈칫하고는 날 돌아보며 외쳤다.

“아무튼 난 그 일 괜찮을 것 같으니까, 한번 해봐. 그리구!”

“예.”

“혹시라도 정말 서큐버스분 만나거든, 가능하면 일 얘기만 해야 돼! 알았지!”

그게 뭔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점장은 뛰쳐나가 버렸고, 버스에 타자마자 신호등이 바뀌고 버스가 떠났다. 가능하면 일 얘기만 해라. 음….

“무슨 의미야?”

만나게 되거든 당연히 일 얘기만 해야지. 그러려고 만나는 건데.

당연한 말을 굳이 왜 했는가를 생각해 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었다. 우선 본업이나 끝내자는 생각으로 담배 세고, 현금도 세고….

도중에 간간이 오는 손님들을 받으면서도 생각하다가, 관뒀다.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로 고민할 필요 있나.

20분쯤 지나서는 손님도 뜨문뜨문해지고 할 일도 없어져서, 확실하게 일어날 일로 고민을 좀 해보기로 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켜, 아까 띄워놨던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러다가, 뒤로가기. 게시글 목록을 하나씩 훑어봤으나 하나같이 못 알아먹을 것들 뿐이다. 고유명사로 시작하는 것 하며, ‘이론’ 두 글자로 시작하는 것들 하며….

“…….”

보고 있자니 여러 생각이 든다. 이 세상서 마법 관련된 일들은 전부 남 일일 뿐이었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담배 파는 데에 마법적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내 몸뚱어리엔 마나가 없기 때문이다.

난 마법을 쓸 수도, 쓸 일도 없다. 이 생각으로 관심 다 끄고 살았다. 여기서 일하게 된 이유도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였지, 인생에 자극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근데… 오늘부턴 그렇게 못 살 것 같다. 인과가 어찌 됐든 이것도 내 일이 되어버렸고….

이 지경까지 온 이상, 시골 촌놈이라는 변명도 더는 안 통하겠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키워야 하겠단 생각에 목록을 훑어본 건데, 보면 볼수록 판단 능력이 아니라 자괴감만 커지더라. 6페이지쯤 넘긴 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 감독관 양반이 왜 실기를 그런 식으로 냈는지 이제야 체감이 된다. 한계를 얼마나 빨리 깨닫고 포기할 수 있냐고?

없는 지식 쥐어짜 내는 건 포기하겠다. 지금은.

대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련다. 일 안 미루는 거. 제약회사 게시글에 적힌 연락처를 복사한 뒤, 바로 메시지로 전송했다.

‘랩실 협약 의뢰 확인했습니다. 메시지 남길 테니, 확인 후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밤 10시 넘은 시각에 문자 보내는 게 찝찝하긴 하지만….

이 게시글이 업로드된 시각도 어제저녁 9시 20분이었다. 당장은 아니어도, 내일 아침에 확인하거든 연락 주지 않을까―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답장 보낸 지 몇 초도 안 됐다. 뭐 이렇게 빨라?

잠깐 뜸을 들인 뒤, 가능하다고 재답장을 보냈다. 10시간 뒤나 10초 뒤나 그게 그거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 에이메르 제약 수석연구원 올리비에입니다. 빠른 답장 감사드려요. ]

여성 목소리에 종족은 모르겠고, 커리어우먼 느낌이 물씬 난다. 추가로 사무적인 느낌이 나기도 해서, 일단은 나도 똑같이 대답했다.

“네, 반마법사 이찬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 두 자 앞에 이런 직함을 달아서 통성명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헌데, 편의점 매니저라고 직함을 댈 수는 없잖은가? 장난 전화도 아니고.

그래도 직함을 대고 나니, 예전에 회사서 거래처 전화 받던 그 시절이 떠오르더라. 그때 했던 대로만 하면 문제는 없겠다 싶었다.

“이런 시간에 문자 남겨서 죄송해요.”

[ 아니에요. 아직 회사에 있거든요. 의뢰 남긴 그 시제품 건으로. ]

“어휴, 밤늦게까지 고생하시네.”

이런 식으로 서로 잡담 좀 하다가, 분위기 풀어졌을 즈음 일 얘기 꺼내면 잘 풀리곤 했는데 말야….

[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길게 통화할 여유까지는 없어서. 바로 안건 말씀드려도 될까요? ]

“예.”

여유 없어서 안 된단다.

대답하자마자 수석연구원께서 안건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개요가 대충 이러했다. 올해로 5년째 개발 중인 마법의 묘약이고, 임상시험 3단계 중 1상 시험을 앞둔 상태.

[ 혹시 첨부해드린 PDF 파일 확인하셨나요? ]

“아직 못했습니다. 메시지 남긴 뒤에 확인해 볼 생각이었어서.”

[ 그럼 굳이 확인하시지 말고, 제약팀 연구원이랑 직접 미팅 가져보시는 게 덜 번거로우시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가요? ]

설명해 줄 연구원 한 명을 붙여준다는 뜻이라면, 나야 환영이다. 솔직히 그 PDF 파일 본다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저도 그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럼 그러는 걸로 하고, 언제쯤 컨택 가능하신지? ]

“음….”

밤 10시부터 오전 10시 사이엔 카운터 봐야 돼서 힘들다, 라고 생각은 하고 있다. 있지만, 미팅이면 얘기만 나누는 것일 테니까….

“혹시 장소를 제가 직접 정할 수 있을까요?”

[ 어디 말씀이시죠? 먼 곳은 좀…. ]

“아뇨. 멀지는 않아요. 근처에 지하철역 있고….”

이 편의점에서 만날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말을 늘이며, 바로 영수증 한 장을 뽑아 적혀있는 편의점 주소를 그대로 읊었다. 여기가 편의점이라는 것만 빼고.

[ 본사에서 멀지는 않네요. 음…. ]

“이 장소에서 만나는 거라면, 원하시는 일정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씩 주고받자는 거다. 시간은 내가 맞출 테니, 장소는 나한테 좀 맞춰달라.

[ …잠시만 통화 끊을게요. ]

연구원들 일정 체크하려나 보다. 알았다고 대답하자 전화가 끊어졌고, 2분가량 지나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예, 말씀하세요.”

[ 저희 쪽 일정에 맞출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지금도 괜찮으신가요? ]

지금? 달이 중천인데?

[ 연구원 중 한 명이 막 퇴근한 참인데, 자기가 갈 수 있다고 해서요. 어차피 그 앞에서 버스 타야 된다면서. ]

‘제가 갈 수 있어요’ 보다는 ‘어… 제가요, 팀장님? 저 퇴근 중인데?’라며 똥 씹은 표정이 됐을 연구원 얼굴만 상상되기는 했다. 그래도.

“지금도 괜찮습니다.”

[ 아, 정말요? ]

나야 환영이다. 길어봐야 막차 끊기기 전까지일 테니 오래 얘기하지도 않을 거고, 손님도 딱 끊길 타이밍이고. 그 연구원은 졸지에 야근하는 셈이 됐지만, 뭐….

헤어질 때 피로회복제 한 박스 쥐여주면 욕은 안 하겠지. 괜찮다고 재차 대답하자, 잠시 뒤에 연락처 하나를 보내주더라.

[ 그 연구원 연락처 보냈으니 얘기해 보시고, 그 외에 궁금한 점 있으신가요? ]

“아뇨, 딱히.”

[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

이러고 통화는 끝.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며, 더 해야 할 일이 뭐가 있을지를 생각해 봤다. 우선, 그 연구원이 편의점 찾아왔을 때 유니폼을 입고 있기는 좀 그러니까….

허락부터 받아야겠지. 점장한테 바로 톡을 보냈다.

‘점장님. 제약회사 분이랑 얘기 끝냈는데, 잠깐 괜찮으세요?’

‘응’

‘근데, 톡으로 하자. 버스 안이라 통화는 좀 그래’

얼른 할 말 다 썼다. 일을 하기는 할 건데, 이 일에 대해 설명해 줄 연구원이 이 편의점에 찾아오게 됐다, 얘기 좀 해보려고 한다.

‘그럼 유니폼 벗고 있어야겠네, 그치’

‘예, 아무래도’

잠깐 벗고 있는 정도는 문제없지 않냐? 할 수 있겠지만, 문제가 있다.

프랜차이즈 편의점의 경우 격월, 혹은 몇 개월 단위로 매장 영업 점검을 나와 점수를 매기기 때문이다. 신상품 제때 진열하는가, 청소 잘되어 있나, 알바가 친절한가, 유니폼 잘 입고 있는가, 등등.

이 중에 점수가 제일 많이 까이는 게 편돌이가 유니폼을 안 입고 있는 거.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라 점수도 기본 점수를 다 까버리는 게 아닐까, 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굳이 해석까지 안 해도, 축구선수들이 춥다고 패딩에 벙어리 장갑 끼고 경기를 뛰지도 않잖은가. 감기 걸릴 텐데 왜 안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유니폼 귀찮다고 안 입다가 알바 짤린 놈을 본 적이 있기도 했던지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반면 점장 대답은 시원시원했다.

‘걱정 말구 벗고 있어’

‘정말 괜찮으세요?’

‘찬이, 여태까지 유니폼 벗고 있던 적 한 번도 없잖아?’

그렇긴 했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잘해야 돼.

‘우리 편의점이 프랜차이즈인 것도 아니구. 개인 점포거든.’

‘고건 몰랐네’

‘내가 대장이구, 찬이가 부대장이야. 다른 건?’

‘부탁드릴 건 없고….’

궁금한 점은 하나 있다. 적으려는 찰나, 또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수석연구원이 보내준 그 연락처로부터였다.

‘지금 전화 와서, 나중에 여쭙겠습니다’

‘응’

답장 온 걸 확인한 뒤,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연락받고 전화드렸는데요! 그….]

명랑한 데에 더해, 귀에 익은 여성 목소리였다. 어떤 말을 해올지 기다리고 있자니, 상대방 쪽에서 먼저 말해왔다.

[ 그. 혹시, 사장님이세요? 제가 그러니까, 어…. ]

“카운터에 부침개 부치셨던 분을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 엣. ]

그 서큐버스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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