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묘약은 사랑을 싣고 (5)
점장 질문에 한 20초가량 멍해졌다.
멍하니 있다가 손님 한 분 담배 팔아서 보낸 뒤, 주둥아리에서 답변이랍시고 끄집어낸 게 이거였다.
“제가 약을 두 번 먹으면 어떨까요. 어쩌면 제 내면과 외면이 서로 교감하게 될 수도―”
[ 찬이, 자아분열 가능해? ]
“까짓거, 노력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습니까?”
[ 설령 되더라도, 난 찬이가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
나도 내 자아를 둘로 나누고 싶지 않다. 허나, 당장 다른 방도가 안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진짜 뭐 어떻게 해야 되냐고. 몸에 팻말 걸치고 뛰쳐나가서, 잠깐이면 되니까 서로 사랑 좀 해 보자고 해? 아무나 붙잡고?
갓 정신병원 탈출한 놈이랑 다른 게 뭔지 모르겠다. 천만다행히도, 점장이 침착했다.
[ ‘사랑하는 두 대상이 서로 솔직해지는 묘약’이라구 했지. ]
“예.”
[ 그럼, 서로를 사랑하는 기준이 어느 정도여야 돼? ]
“기준이요?”
[ 단순하게 예를 들면, 엄청 많이 사랑해야 약효가 발휘되는지, 아니면 조금만 사랑해도 약효가 발휘되는지를 묻는 거야. ]
나도 모른다. 이런 질문을 할 생각도 못 했을뿐더러, 떠올렸다 한들 구태여 물어봤을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상업성을 고려한다면….
“어… 조금만 사랑해도 되는 쪽이 좋을 것 같긴 한데….”
1년 차 커플을 타겟으로 약을 만들면 10년 차 커플들도 복용할 수 있지만, 10년 차 커플 타겟으로 약을 만들면 1년 차 커플은 복용을 못 하잖은가.
많은 커플한테 팔아먹으려면, 복용 제한을 최대한 낮추는 게 맞지 않냐는 생각이다. 대답한 뒤, 바로 떠오른 걸 물었다.
“그런데 점장님, 사랑에 많고 적다는 기준이 있습니까?”
[ 나도 없다는 생각이긴 하지만, 그 제약회사 마케팅 부서 분들은 어떻게든 기준을 정해야 했을 거야. 기준을 명시 안 해두면 허위판매가 되어버리는 거니까. ]
이게 왜 허위판매가 되는지를 생각해 보다가, 깨달았다. 우리 사랑하는 사이인데 묘약이 왜 말을 안 듣냐? 이것보다 더 사랑하라고? 따위의 클레임이 걸릴 수 있단 거다.
[ 그리고 찬이가 말했다시피, 기준이 낮을수록 더 많은 분들한테 팔 수 있는 거고. 그러면 기준을 최소치로 잡았을 텐데, 그게 어느 정도일까? ]
사랑의 최소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내가 어떻게 알아?
내게 사랑은 남들 다 하는데 나만 못 하는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꾸역꾸역 생각하다 보니, 뭔가가 떠오르기는 했다.
“어… 호감을 가지는 정도?”
내 생각엔 사랑의 발단이 다양하다.
싸대기를 맞은 도련님이 ‘날 때린 여자는 니가 처음이야’라며 사랑 비슷한 것에 빠질 수도 있는 거고, 총 맞아서 빈사 상태가 된 자신을 치료해 준 간호사를 사랑하게 될 수도 있는 거고….
그 외에 뭐든 간에, 호감이 없으면 안 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한쪽에만 있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지. 양쪽 다 없는 건 논외고.
[ 내 생각도 그래. 사랑은 서로 호감 가지는 데서부터 시작한다는 거. ]
“하지만, 점장님. 단순히 호감 가지는 수준으로 묘약이 작동하게 만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생길 것 같은….”
[ 안 생길걸? 나는 묘약도 처방받아야 살 수 있는 걸로 알고 있거든. 정신과에서. ]
막 연애를 시작한 남녀가 손 꼭 잡고 정신과에 걸어 들어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려 했는데, 잘 안됐다. 막 연애 시작한 커플이 정신과를 데이트 코스로 삼을 것 같진 않아서였다.
[ 좀 빙 돌아가긴 했는데, 요점은 이거야. 사랑의 묘약은, 두 대상이 서로 호감이 있는 정도의 사이이기만 해도 발동한다는 거지. ]
말인즉, 나도 누굴 붙잡고 사랑할 필요까지는 없단 말이렷다. 호감. 좋게 여기는 감정 정도만 있는 대상이면 된다는 거지.
난이도가 낮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어렵다. 그나마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라면… 어…….
“점ㅈ”
[ 나도 찬이를 좋아하지만, 그 부탁은 안 들어줄 거야. ]
“예….”
[ 나는 묘약 상관없이 찬이한테 늘 솔직할 거거든. 거짓말은 아예 안 할 거구. 그러니까 효과도 없을걸? ]
그걸 솔직하게 말하게 만들어 주니까 마법의 묘약….
아니다. 점장 마법사잖아. 묘약에 영향을 안 받는 방법도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 찬이도, 묘약 상관없이 나한테 솔직할 거구. 약속했잖아. ]
“네. 했죠. 약속.”
누나랑 있었던 일을 숨긴 걸로 한 번 홍역을 치렀었고, 점장한텐 당분간 아무것도 안 숨기겠다고 다짐했었다. 솔직해지는 약까지 먹어가며 그걸 증명할 생각은 없다.
[ 흐름만 보면, 나는 그 서큐버스분이랑 상의해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찬이는 어떻게 생각해? ]
나도 이게 맞다고는 생각한다. 관계자 외의 타인에게 먹이면 외부 유출이잖아. 다만, 그 서큐버스에게 내가 호감이 있느냐를 묻는다면, 어….
일단, 그녀와의 첫 만남이 최악이긴 했다.
그래도 그 건을 없는 셈 치고 오늘 일만 본다면, 약 좀 가져와 달라, 여기 와서 좀 일해 달라 했던 내 부탁을 전부 들어준다고 했다. 일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앓는 소리 한 번 정도는 낼 만하지 않았나.
결론은, 싫지는 않았다. 그럼 좋은 거 맞겠지.
“저는 괜찮아요. 그분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문제지.”
생각하고 자시고, 그 서큐버스랑 나랑 나란히 세워놓으면 원숭이랑 여조련사 관계로 보일걸? 안면 구성요소 측면에서 특히.
왜 그렇게 태어났냐며 동정심을 가져준다면 모를까, 그쪽도 내게 호감이 있을 거란 말은 빈말로라도 하기가 힘들다. 여기서 점장이 한 번 말을 줄였다.
[ 나는 그 부분은 괜찮을 거라 생각하지만…. ]
“하긴, 뭐. 어쩔 수 없겠네요. 일이니까.”
[ …뭐, 괜찮겠지…. ]
어째 하고 싶은 말을 참는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이유가 있으니까 말을 안 하는 거겠지.
[ 어쨌든, 이건 찬이가 말 잘해야 돼. 그분한테 무리한 부탁 한다는 건 알지? ]
“네.”
임상실험조차 안 된 신약을 먹어달라 하는 것이다. 나야 이상한 거 주워 먹어도 괜찮은 체질이라 괜찮다 쳐도, 그 서큐버스는 아니잖은가. ‘심리적인 부분에서의 부작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 부작용도 내가 없앨 수는 있을 거다. 타인의 몸에 손을 대서 마법을 지우는 게 가능하단 걸 해봐서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부작용을 한 번 겪었다는 사실까지는 못 지운다. 이게 사실상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란 말이지.
“그 부작용이 심할까요?”
[ 심하진 않을 거야. 심했으면 1상 시험 계획 얘기는 나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어… 안심 잘 시켜드리고. ]
“알겠슴다.”
[ 이외에 또 궁금한 거 있어? ]
안심시키는 방법으로 뭐가 좋을지를 물어보려다, 말았다. 이것도 그때 가봐야 알 부분 같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제가 이러는 거 싫지는 않으십니까?”
[ 어떤 게? ]
“편의점 일 안 하고 부업 뛰는 거 말입니다.”
[ 그건 다 얘기 끝난 거잖아. ]
“그래도요.”
자기 돈 받아 가는 놈이 대놓고 딴 일에 관해 물어보고, 조언 구하는 게 점장 입장에서 달갑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느껴지거든.
잠깐의 정적 뒤에 점장이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좀 더 차분해져 있었다.
[ …찬아. 내 생활 패턴이 어떤지 알아? ]
“하루 12시간은 카운터 보실 거고, 나머진 잘 모르겠네요.”
[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맥주 한 캔을 마셔. TV 보면서. 가끔은 침대에 누워서 빈둥거리고, 천장만 보고, 스마트폰 보고. ]
“바깥 공기도 좀 쐬고 그러시지.”
[ 그래 보려고 했는데, 베개에 머리 붙이면 베개에서 머리가 안 빠지더라구…. ]
“하하….”
웃겨서 웃었다. 점장이 팔자 늘어지게 침대에 누워, 바깥 공기를 쐴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 상상돼서.
[ 찬이 오기 전까진 아예 24시간 편의점에 있었구. 며칠 근무하다 지겨우면 잠깐 문 잠그고 카페 가고, 윤하 불러서 얘기도 하고…. ]
“그건… 힘드셨을 것 같습니다.”
[ 힘들진 않았어. 그래도… 심심했지. 원해서 시작한 일인 건 맞지만, 너무 원하는 일들만 일어나버리는 거야. 매일, 매주, 몇 달 내내 말야. 안정적으로. ]
난 안정적인 삶이 좋다. 반평생 불안정한 삶을 살아왔고, 이로 인해 엿같은 점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점장 말에 쉽게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당장 나조차도 이세계에서 고블린, 오크, 엘프를 진상으로 받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고, 제발 그만 좀 오라고 속으로 빌면서 살게 됐으니까.
[ 근데, 찬이가 왔어. 와서는 나는 딴 세상에서 왔고, 마법이고 이종족이고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런 말들을 하면서 말야. ]
“그건… 이해 좀 해주십쇼. 전들 알바하러 온 편의점 정문이 이세계 차원문일 줄 알고 들어왔겠습니까?”
[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재밌었어. ]
“재밌으셨다고요?”
[ 찬이가 그때 했던 질문들에 대답을 생각하는 거. 전부 처음 생각해 보는 것들이었거든. 정말 다른 세상이 실존하나? 그곳엔 정말 엘프도, 오크도 없나? 이런 것들. ]
실존하는 게 맞고, 엘프도 오크도 없다. 그게 전부이긴 하지만.
[ 그것뿐만도 아냐. 평범한 이세계 사람일 줄 알았던 내 직원이, 알고 보니 반마법 쪽에 특출난 재능이 있기까지 한 거지. 찬이가 체질 얘기 했을 때, 내가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
“얼마나 놀라셨는데요?”
[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 떨어트릴 정도로 놀랐지! 아. 다 마신 맥주캔이었으니까, 걱정 안 해두 돼. ]
“안 그래도 걱정하려던 참이었습니다.”
[ 내 그럴 줄 알았지. 어쨌든, 이번에도 빙 돌아가긴 했지만, 요점은… 즐겁다구. ]
“…….”
[ 매일매일이 말야. 오랜만에. ]
나와 하루하루 얘기하고, 통화하고. 내가 이상한 일들, 신기한 일들, 세상일들 겪어가면서 자리 잡고, 그걸 지켜보는 것.
그 모든 게 즐겁단다. 점장이 내 연락에 늘 공백없이 답장해주는 이유도 이젠 알 것 같았다. 매장 상황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내가 점장 답장이 절실했듯, 점장도 내 연락이 절실했단 거다. 내 입으로 말은 못 하겠지만.
[ 윤하도 내가 예전에 비해서 웃음이 많이 늘었대. 찬이 눈에도 그렇게 보여? ]
“점장님 예전에 어땠는지 저는 모르죠. 저한테는 늘 웃어주셨으니까.”
[ 그래? 어쨌든, 나는 찬이가 부업으로 매장 며칠 비우는 것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는 입장이야. 나도 웃고 사는 게 좋으니까. ]
“저도요.”
[ 응. 그러니까… 이러는 게 싫으시냐, 이런 질문 안 해도 돼. 난 그게 더 싫어. ]
알았다, 앞으론 안 하겠다.
대답하려던 찰나, 손님이 들어왔다. 엘프에 후줄근한 낚시조끼를 입고 있었고 바로 카운터로 와서는 내게 묻더라.
“부탄가스 어디 있어?”
“저기 네 번째 진열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는데, 이 엘프 양반이 눈앞에서 한 번 휘청거렸다. 이후 계산대에 손 올린 채로 비틀거리는 걸 보니, 심하게 취한 듯했다.
이 상황이면 어디에 있다고 씨름하는 것보다, 직접 가져오는 게 맞다. 점장에게 말했다.
“점장님. 손님 오셔갖고. 전화 끊겠습니다.”
[ 응. 아, 문제 생기면 연락 주고. ]
“…예.”
문제 생기면 연락 달라. 이 말이, 일상적인 통화는 이걸로 그만하자는 뜻으로 해석됐다. 전화를 끊고 부탄가스가 진열된 코너로 가니, 4개가 통째로 밀봉되어 있었다.
별 생각없이 포장을 뜯어 하나를 꺼내 가져왔는데, 부탄가스를 보고는 역정을 내더라.
“낱개로 된 거 말고, 4개 묶여있는 거 있잖아.”
“어… 하나만 찾으시는 줄 알고 포장 뜯었습니다.”
“에이 씨. 야, 편돌아. 부탄가스를 낱개로 누가 사 가는데?”
대표적인 예로 내가 있다.
라며 따졌다간 하루 종일 궁시렁댈 기세여서, 큰맘 먹고 재활용 가능한 봉투에 담아서 계산해 줬다. 봉투값 안 받고.
이후 자리에 앉아, 문제가 생기길 기다렸다. 새벽 동안은 아무 일도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