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89화 (90/201)

89화. 5살 차이는 친구 해도 돼 (4)

이 첫 손님 이후로는 별 소득 없었다. 가족 손님이 뜨문뜨문해져서이기도 했고, 들어와서는 볼일만 보고 나가버리기도 해서였다.

“우와! 깡아지―”

“어허, 강아지 만지면 안 돼. 우리 수영장 가기로 했잖아.”

9시 40분경에 편의점에 애랑 애 엄마가 들어와 딱 이 두 마디를 나누고 나갔는데, 강아지 만지는 거랑 수영장 가는 거랑 뭔 상관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어차피 샤워하고 들어갈 거 아니야?

“본견, 흙바닥에서 뒹군 적도 없는데. 늘 잔디나 도보만 밟고 다녔는데….”

이 녀석도 이젠 서러워서 못 해 먹겠다는 것 같았고. 더 했다간 멍멍이 심리상담까지 하게 될 것 같아서, 나도 포기하고 카운터 밑에 앉혀놨다.

이후, 물어봤다.

“야, 멍멍아. 페이는 어떻게 줄까.”

“페이? 그게 무엇이오?”

“아까 일 같이 하자고 했잖냐. 월급 줄라고 그러지.”

이 녀석이 40분 정도 매장에 있었다. 최저시급에 2/3을 곱하면 간단하겠지만….

“일단은 만 원 줄라는데, 어떠냐.”

“만 원이면… 자판기 세 시간 어치가 아니외까?”

“햄버거 4개 값이기도 하지. 그래서, 콜?”

“하지만, 본견이 그렇게 오래 일한 게 아니잖소. 4개는 너무 많으니, 3개로 합시다.”

“아, 그냥 만 원 받으라고. 내가 계산하기 귀찮아서 그래.”

정말 귀찮아서이기도 했고, 견생 첫 노동에 대한 보상이 최저시급 미만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번 달 공과금, 집세 전부 해결해 놨으니까. 집요정은 자유예요! 다음 달까지는!

“아니면 뭐, 임금협상 들어갈까? 너 자신 있냐?”

“아, 아니오. 감사히 받겠소.”

“그래. 그리고 주는 건 현금, 아니면 현물….”

“현물은 또 무엇이외까.”

“…아니. 아니다.”

이것도 느낀 바가 있다. 이 멍멍이가 5만 원 주워서는, 그걸로 편의점 햄버거를 죄다 사버리겠다 했던 놈이다. 그럼 만약에 50만 원을 주웠다면?

대형 패스트푸드점에 쳐들어가서 버거란 버거는 죄다 과독점하려 들었겠지. 이놈이 돈을 직접 벌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돈 씀씀이가 무척 충동적이다.

현금이나 현물을 직접 줄 게 아니라, 누군가 관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다. 현금을 주려고 해도, 계좌도 지갑도 없는 놈한테 돈을 어떻게 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올 때마다 햄버거 하나씩 줄게, 임마. 유통기한 안 지난 걸로. 상관없지?”

“세어주시기만 하면 괜찮소.”

알았다고 대답한 뒤, 바로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걸로 당분간은 햄버거 먹일 때 은혜를 입니 뭐니 씨름할 일은 없겠지.

“이렇게 하는 걸로 하고… 지금 너 배 안 고파?”

“어… 출출하긴 하오. 공원을 하도 뛰어다니다 보니.”

“지금 하나 꺼내 줄 테니까 먹고, 하나 너도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저어는 갠차나여. 꽈자 먹어갖구….”

“그럼 목마르겠네.”

진열대에 고칼슘 우유 있던 걸 봐뒀다.

햄버거를 데운 뒤, 우유도 같이 가져와 둘에게 쥐여줬다. 멍멍이는 포장지 위에 올려진 햄버거를 깨작깨작 먹어치우고, 꼬마는 반 모금씩 우유 홀짝이고.

나는 턱 괸 채로 산소나 씹어먹었다. 이러고 있다가 10시 5분 전이 되어, 점장이 왔다.

“찬아, 하이.”

“옙, 점장님.”

인사를 나눈 뒤, 카운터 안의 꼬마와 멍멍이를 보고는 손뼉을 한 번 치더라.

“어, 오늘은 반가운 얼굴이 좀 많네?”

“둘인데요?”

“찬이, 멍멍이, 그리구 이 꼬마애 셋. 셋이면 충분히 많지, 뭐.”

매일 얼굴 보는데 뭐가 반갑단 건지. 나긋하게 카운터로 와서는, 꼬마를 내려다보며 묻는 점장.

“안녕, 꼬마야. 우리 오랜만에 본다. 그치.”

“안냐새여, 언니.”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에….”

점장 질문에 꼬마가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신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조씨 보고 시퍼서… 안 대나여?”

“안 될 거 있겠니. 멍멍이는?”

“두 번째로 뵙는구려, 사장님. 아니 글쎄 본견이―”

견생 최대의 술래잡기에서 잡히지 않았던 게 자기 딴엔 꽤나 뿌듯했던 건지, 이걸 다시 한번 말하더라고. 그러고는 덧붙였다.

“그걸 겪고 나니, 사장님 얼굴이 생각나서 말이오. 그래서 찾아온 것이오.”

“들어보니까, 찬이가 인망이 엄청 좋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젠 나도 내 정체성이 뭔지 헷갈린다. 어젯밤엔 반마법 전문가 해 먹고, 오늘은 유아보호소 소장을 해 먹고 있으니까. 생각해 보니 나 좀 유능한 거 아닌가?

“둘이 말문도 튼 것 같구.”

“예. 잘 놀더라고요, 둘이서.”

“이런 상황이면 퇴근은 좀 힘들겠다.”

이 말은 점장이 나만 들리도록 속삭여 말해왔고, 나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퇴근하려면 문 걸어 잠그고, 커튼치고 편의점 통째로 공간이동을 한 번 해야 한다. 그걸 얘네랑 같이 할 순 없잖아.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 구슬려서 보내볼 텐데, 둘 다 나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니 퇴근해 버리기도 좀 찜찜하다.

“이런 것도 다 방법이 있지.”

“어떤 방법 말입니까?”

“보고 있어 봐.”

보고 있으라니 보고 있으련다.

점장은 크흠, 하며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꼬마와 멍멍이 쪽으로 쭈그려 앉아 말했다.

“얘들아. 정말 미안한데, 우리 좀 있다가 청소할 시간이라서.”

“청소하시는 거면여, 저도 도와드릴께여!”

“본견도 돕겠소. 바닥에 먼지 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소이다. 꼬리로.”

“그런 게 아니구, 화장실 청소할 거거든. 변기.”

변기. 이 두 글자를 들은 꼬마의 얼굴에 암운이 드리워졌고, 멍멍이는 반사적으로 죽상을 지었다.

“변…기여…?”

“응. 변기가 막혀서, 손 집어넣어서 뚫을 거야.”

“손을…? 그게 참말이오?”

“참말이지.”

“끙아 때문애 마킨 거애여?”

“응. 끙아 때문에.”

이야, 이 단어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끙아.

더해서 이 단어를 점장과 꼬마 입을 통해 듣고 있자니, 내 머릿속 환상이 살짝 찌그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여자들은 끙아라는 단어 안 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너희들이 도와주면 좀 편할 것 같은데. 혹시 도와줄 수 있니?”

“그개여… 에…….”

“그….”

이 둘이 나이에 비해 조숙한 녀석들이긴 했지만, 차마 막힌 변기에 손 넣어 뚫을 용기까지는 없을 터다. 각각 울기 직전, 하울링하기 직전의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점장도 날 바라봤고. 알아서 장단 맞추란 거겠지.

“나 혼자 할 수 있으니까, 너희는 할 일들 하러 가.”

“진짜루여…?”

“난 그게 더 편해.”

이 녀석들이 우정과 정신건강 중 후자를 택한 모양새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신경 안 쓸 생각이다. 매장 청소여도 이 녀석들 안 시켰을 건데, 뭐.

“고무장갑 줄게. 찬아.”

“예. 근데 소 자는 아니죠? 작은 건 손에 안 맞아서.”

“아조씨, 제송해여….”

“참으로 송구하오, 사장님. 본견은 본견 똥도 스스로 치울 수가 없는 몸이라….”

“신경 안 쓸 거고,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 마라. 점장님, 언제부터 하면 됩니까.”

“지금 바로.”

여기까지 말하니, 이 둘도 슬슬 나갈 때가 됐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각자 우유를 챙기거나, 빵 쪼가리를 입에 물고는 나와 점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아조씨, 힘내새여.”

“본견도 똑같은 의견이오.”

“그래. 가는 길 조심하고.”

이러고는 정문 밖으로 나가서는 멈칫했는데, 왜 저러나 싶어 귀를 기울여봤다. 이런 대화를 하고 있더라.

“멍뭉아. 우리 집 갈래?”

“본견이? 아가씨 댁에를 말이외까?”

“웅. 우리 집 널버가꾸, 뛰어 놀 수도 잇써.”

저건 또 처음 듣는 얘기다. 집이 뭐 50평쯤 돼?

허나 이 다음 내용은 둘이 멀어지기 시작한 탓에 들리지 않았고, 잠시 뒤엔 모습도 보이질 않게 됐다. 둘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 점장에게 물었다.

“저 진짜 변기 뚫어야 됩니까?”

“아니? 막힌 적도 아직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점장이 말하는 어투가 하도 자연스러워서, 나도 반쯤은 진짜인 줄 알았다.

“화장실은 아니어도 청소를 하긴 할 건데, 그건 내가 마법으로 할 거니까 찬이는 걱정 말고 퇴근하구. 10시 다 됐다.”

“예. 그런데, 점장님. 가기 전에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거?”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 세상에서 용은 대체 어떤 존재인 것인가?

“아까 저 꼬마한테 듣고 떠오른 건데, 유치원 애들이 저 애 무서워하는 거 같더라고요. 용이라서.”

“아, 그래?”

“예. 어른 손님들은 저 애 귀여워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고.”

나 살던 세상의 경우, 어린 애가 다른 누군가를 이유도 없이 무서워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꼬마가 덩치가 크거나, 인상이 사나운 것도 아니니까.

대화, 교류, 어느 것도 제대로 안 해 본 채로 용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서워하고 있다.

“찬이네 세상은 용이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닌가 봐?”

“무서운 존재는 맞아요. 무서워하라고 만든 거라서.”

옛날 서양, 상상력 풍부한 이야기꾼들이 ‘내 이야기에 무서운 존재가 좀 필요한데, 뭐가 있을까?’ 하다가 떠올린 게, 불 뿜고 꼬리로 사람 패는 파충류. 드래곤이다.

아니면… 타격감 좋은 동네북이 필요해서일 수도 있겠고. 역사 설화들만 봐도 뭐, 어지간한 왕들은 다들 드래곤 한 번씩 조져봤다고들 하잖은가.

이게 용 꼬리가 별미여서인지, 나라에 해가 돼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쟤가 해를 끼치는 존재란 생각은 안 들어서요.”

“찬이, 내가 이 세상 역사 얘기해 줬던 거 기억나? 근무 첫날에.”

“어… 전쟁 말씀을 하시는 거면….”

전쟁. 얘기를 한 것 자체는 기억나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난다. 아무튼 전쟁이 있었고, 엘프가 일으켰고, 인간 종족이 특히나 많이 죽었다. 딱 이 정도?

“그 정도면 됐구, 거기서 제일 활약했던 게 용이거든.”

“허어….”

“아마 그때 거기 계셨던 분들은 다들 기억하고 계실 거야. 나이 드신 분들.”

대충 이런 흐름이었을 거 같다. 전쟁터에서 용이 적대적인 다른 이종족들을 씹고 뜯고 맛보는 걸 보고, 이종족들은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광경이니?’ 하면서 벌벌 떨고.

전쟁이 끝난 뒤엔 각자 아들딸들에게 ‘용한테는 함부로 개기지 마라, 큰일 나’라며 목격했던 사례들을 들려주고, 그게 구전되고, 조금씩 와전되다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쟁 상관없이 잘못만 해도 애들 물어가는 마귀할멈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거지.

“찬이 개인적인 해석이 좀 섞인 것 같긴 하지만, 그 정도면 잘 이해했네.”

“그래도… 이 세상서 용은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잖습니까?”

마귀할멈 갖고 겁주는 건 그러려니 한다. 마귀할멈이 지가 억울했으면, 직접 TV에 출연해서 해명했을 것 아닌가? 자기 갖고 말장난 좀 그만 치라면서.

헌데, 이 세상서 용은 버젓이 유치원 다니고, 회사에서 일하는 사회인구란 말이다. 잘 지내는 특정 종족을 갖고 ‘용은 무서운 종족이야~’라며 조기교육 시키는 게 옳은 일인지를 모르겠다.

“그 점은, 음… 이걸 찬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말씀하십쇼.”

“성인 용분들은 그런 거 신경 거의 안 써. 내가 알기로는 그래.”

자기들이 무서운 종족 취급받는 걸 신경을 안 쓴다라. 흠….

“이미지 메이킹 같은 겁니까?”

“진짜 단순하게 표현하면, 맞아. 이미지 메이킹.”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세상 참, 이해할 만하다 싶으면 묘하게 비틀린 게 하나씩 튀어나온다. 일제시대 순경도 아니고, 무서운 존재 취급받는다고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이 이미지 때문에 피해를 보는 애가 생긴 이상, 개선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 말곤 안 드는데 말이다. 언제가 됐든, 성인 용과 대화를 한번 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

“알겠다는 거치곤 납득 안 된다는 표정이네.”

“납득 안 되기는 하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려고요. 슬슬 졸려갖고.”

“그렇게 해. 아, 그리구. 찬아. 내일 정문 잘 닫아둬야 돼. 밖에 공사한대서.”

“밖이라면, 이 앞 도로 말씀이십니까?”

“응. 이 앞 도로.”

말하고는, 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도로 보수공사 한다 하더라구. 드워프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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