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98화 (99/201)

98화. 장사가 안돼요, 자동차가 너무 커서 (3)

얼굴 못 본 1주일 동안 어르신께서 하신 일이 참 많더라. 바둑이나 게이트볼 외에도 영화도 보고, 등산도 하시고.

“영화는 어떤 거 보셨습니까? 저도 영화 좋아해 갖고.”

“전쟁영화였습니다. 옛날 전쟁 시절 영화였는데….”

“어떤 내용이었어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도중에 친구들이 상영기를 꺼버렸거든요. 우리 전쟁 치를 땐 이렇지 않았다면서―”

여튼 평화롭게 지내셨고, 어제 낮에는 실내낚시터에 친구분들과 같이 낚시를 하러 가셨다고 한다. 다른 친구분들은 5분 단위로 신나게 물고기를 낚아 올렸지만 어르신께서는 빈손으로 마감하셨다고.

“친구들에게 비결을 물어보니 마음을 비우고 낚싯대와 하나가 되라는 조언을 해줬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라며 말이죠.”

“그분들도 다 은퇴하신 거고요.”

“예. 아직 일을 하고 있는 건 저뿐입니다.”

예전에 어르신께서 과거 행적에 대해 언급하신 게 있다. 전쟁 때 특수부대에서 복무한 군인.

그 전쟁이 못해도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을 테니, 어르신께서 못해도 80세는 족히 넘으셨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국민연금 수령 15년 차시라는 얘기다.

군 복무에 대한 연금까지 포함하면 노후 자금이 모자란 것도 아니실 텐데, 그럼에도 일을 하고 계시는 상황이다. 그것도 동년배 친구들 중 혼자서만.

그 이유가 뭘까. 어르신께서 달리 돈이 필요한 상황이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전혀 다른 이유가 떠오르더란다.

“어르신. 바둑이나 게이트볼이나 낚시 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렇지요. 영화도 보고.”

“재미있으신가요? 그것들?”

이 네 가지 취미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몸을 움직일 일이 거의 없는 일들이란 것이다. 낚시가 살짝 애매하긴 하지만, 실내낚시터 다녀왔다 하셨으니까.

그리고 난 이 어르신께서 바둑이나 낚시를 하겠다고 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시는 광경이 전혀 상상이 안 된다. 아니, 1대 1,200을 치고 원펀치로 오크 강냉이를 추수하는 분께서 바둑? 게이트볼??

말투도 그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늘 힘을 담아 말씀하시는 분이, 지금 하는 대화를 시작한 직후부터는 말에 힘이 없다.

스스로의 상황이 탐탁지 않으신 것이다. 찾아온 황혼기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노년을 준비하는 것 말야. 아직 30도 못 찍은 응애가 하기 주제넘은 추론이긴 하지만….

그만큼 티가 나는데 어떻게 해. 어르신께서도 처음엔 부정하려 하셨다.

“아뇨. 재미있었습니다. 여태껏 전부 해온 적 없는 신기한 경험들―”

까지 말씀하시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바로 말을 멈추셨다. 잠시 뒤엔 순순히 수긍하셨다.

“아무래도, 제가 티를 냈나 보군요.”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아뇨, 전혀. 기분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말을 줄이며 생각에 잠기셨다가,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오셨다.

“…사실 대리운전 일도, 주변에서는 그만하라고 말리는 편입니다. 이제는 일을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 건강도 챙겨야 하지 않냐.”

그럴 만하지. 내 조부모님께서 나이 팔순에 대리운전 한다 하셨으면 나라도 뜯어말렸을 것 같다.

“다른 일을 구하고. 혹은 등산이나 여행을 계획해도, 그 나이에 혼자서 그러는 게 웬 말이냐며 말리기도 하고.”

“무리해서라도 해보신 적은 없으신 거고요.”

“예. 제 욕심으로 가족에게 걱정을 끼칠 순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런 식으로 어르신께서 뭘 하려고 하실 때마다 관절 걱정, 치매 걱정으로 죄다 뜯어말리는 탓에 몸을 쓰는 일은 거의 해본 적이 없으시다고.

그나마 허락받은 게 아까 열거하신 바둑 등의 취미생활들이고, 소감은 뭐. 어르신 취향엔 아니시랜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뒤, 어르신께서 농담조로 덧붙이셨다.

“저는 아직인데 말입니다.”

목소리로는 웃고 계셨지만, 눈빛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투에 다시금 힘이 담긴다. 이게 어르신께서 진정 하고 싶었던 말인 듯하다. 비록 피부는 가라앉고 머리 색은 바랬어도, 내 가슴엔 아직도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물론, 세상이 이런 저를 어떻게 생각해 줄지는 별개의 문제겠지만요.”

너털웃음을 더해 말을 마친 어르신께서 잠시 조용하셨다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중얼거리듯 덧붙이셨다.

“이거, 밤이 돼서인지 늙은이가 자꾸 이상한 말을 하게 되는군요.”

잊어달라는 의도로 하시는 말 같다. 개인적으로는 무심코 입 밖으로 낼 정도의 고민이라면 아예 시원하게 털어내는 게 좋지 않냐는 생각이지만….

본인이 싫다는데 내가 뭘 어째. 바로 주제를 돌렸다.

“그럼 자제분들이랑은 관계가, 어… 소원하신 겁니까?”

“아뇨. 잘 지내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손녀딸을 유치원에 바래다주기도 했었고.”

“유치원엘요.”

“예. 그러고 보니, 제가 손녀 사진을 보여드렸던가요?”

안 보여주셨다 말하려 했는데,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품에서 지갑을 반쯤 꺼내신 채였다. 전직 특수부대원도 손녀딸 자랑은 못 참나 보다.

“제 손녀딸이 글쎄, 유치원에서 벌써부터 구구단을―”

몇 단까지 외웠는지는 들을 수 없었다. 손님이 와서였다.

“사장님, 아몬드… 아몬드 어디 있나요.”

정문 쪽을 보니, 고양잇과 코볼트 하나가 손잡이를 꽉 부여잡은 채로 휘청대고 있는 참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물었다.

“아몬드 어떤 거 찾으세요? 종류가 여러 개여 가지고.”

“민트초코 맛 나는 아몬드….”

“여기 그런 거 없어요.”

대답해주자, 코볼트가 ‘그렇죠? 이놈들이 나 놀리려고 한 게 맞다니까’라며 중얼거리고는 다시 밖으로 나가버렸다. 친구들이랑 내기해서 지기라도 했나.

코볼트가 나간 바깥 거리는 행인들로 바글바글해졌고. 그놈의 축구 경기가 마침내 끝난 듯했다. 나도 이제 일이나 해야겠다.

“어르신, 저 카운터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슬슬 손님 몰릴 타이밍이라.”

“그러시죠. 저는… 혹시 근처에 흡연 장소가 따로 있습니까?”

“따로 없긴 한데, 저쪽 골목길 쪽에서 많이들 피우시는 것 같더라구요.”

바닥에 담배꽁초 널린 거 보면 아실 거다. 그렇게 대답드리자 모자를 벗어 꾸벅 고개 숙이시고는 나가시더라.

나도 카운터로 돌아왔다. 돌아온 직후에 이때를 노렸다는 듯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는데, 하는 잡담들이 죄다 똑같았다.

“하 씨, 그 의족 새끼는 많고 많은 상황 중에 하필이면 그 상황에서 똥볼을 차?”

“키가 작으니까 그렇지. 주발도 다른 쪽이고.”

“주발은 염병, 돈을 그렇게 받아 처먹으면 발로 젓가락질도 할 줄 알아야 되는 거 아니냐? 감독은 걜 대체 왜 쓰는 거야?”

“등딱 잘하잖아. 드워프니까.”

축구 토론회 말이다. 등딱이나 주발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도, 마저 들어보니 그 드워프 축구선수가 이타적인 성향의 공격수라는 점 정도는 알겠더라.

이번에 진 팀이 인기가 훨씬 많은 팀이란 점도 알겠고. 분위기가 대체로 냉탕이라, 축구 얘기 잘못 꺼냈다간 싸커킥 맞을 것 같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기에, 손님을 받아 내보내는 족족 바깥을 살폈다.

밖의 봉고차 때문이다. 편의점 앞 갓길에 차를 대놨으니, 이 봉고차 차주 놈도 한 번은 편의점에 얼굴 비추지 않을까. 담배를 사든, 2차에서 먹을 안줏거리를 사가든….

안 오면 어쩔 수 없고.

초연한 마음으로 근무하길 20분, 오크 한 무리가 매장에 들어왔다. 죄다 탱크탑에 런닝, 혹은 티셔츠만 한 장씩 걸친 떡대들이었고, 다들 표정이 밝았다.

“내가 말했지, 새끼들아! 오늘은 역배라고! 그래도 이놈들이 할 땐 하는 놈들이라니까?”

“알았으니까 작작 좀 해, 어금니 부러지고 싶냐?”

“조까. 내가 제일 많이 땄으니까 오늘은 내가 산다, 그러니까 닥치고 들어. 알았어?”

정황상 이 오크들, 이번 경기에 돈을 걸어서 꽤나 재미를 본 듯하다. 그 재미 본 걸 왜 매장에서 자랑질해대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야 물건 팔아 보내면 그만이다. 가져온 맥주캔을 계산해 쥐여주려 했는데, 몇몇 오크들 입에서 유독 귀에 밟히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근데 맥주는 누구 집에서 먹냐. 제일 집 가까운 놈 누구야?”

“이놈. 여기서 3분 걸리나?”

“아, 우리 집에 돼지 새끼 열둘 안 들어가. 그냥 공원 가서 마시지?”

“차를 못 끌고 가잖아, 새끼야. 죄다 술 처먹어 갖고.”

“근데 밖에 저대로 주차해둬도 되냐? 저기 주차단속 CCTV 붙어있던 것 같은―”

“야, 야. 주말 밤에 경찰 새끼들이 단속을 하겠냐. 게을러터진 놈들인데.”

이런 씨, 설마 이 양반들이야? 밖에 봉고차 대놓은 게?

봉고차 단어가 나올 때마다 힐끔힐끔 밖을 바라보는 게, 이 양반들이 범인이 맞는 것 같다. 범인은 사건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니라니까?

나타난 건 좋다. 좋은데, 막상 맞닥뜨리고 나니 입을 열기가 힘들다. 서로 기분 좋게 이야기하고 와중에 끼어들기도 뭣하고, 떡대 차이도 있고….

가장 꺼림칙한 게, 이 오크들 외형이 영락없는 불량배들이었기 때문이다.

보낼 생각만 하고 있을 땐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생긴 게 하나같이 괴랄하기 그지없다. 튀어나온 어금니에 금도금이 되어있질 않나, 코에 쇠고랑이 채워져 있질 않나―

“사장님, 얼마예요.”

“…아. 다 합쳐서 6만 원이고―”

“봉투엔 안 담아주시나? 이걸 어떻게 다 들고 가.”

친환경 봉툿값 100원이다, 말하려다 말았다. 이거면 말은 슬쩍 꺼내 볼 수 있겠다.

“담아드릴게요. 많이 사셨으니까, 봉투 서비스로.”

“당연히 그러셔야지, 하마터면 눈치 없냐고 물어볼 뻔?”

우린 뭐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그래도 대답 비스무리한 걸 해오는 게, 말이 아예 안 통할 분위기까진 아니다. 살짝 숨 고른 뒤에 말을 이었다.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손님.”

“뭐 할 말 있으세요?”

“아뇨. 별건 아니고, 혹시 바깥 봉고차 차주분 되시나요?”

“그건 왜요?”

“밖에 차가 편의점을 가리고 있어서요. 밖에서 안 보여 갖고.”

“그래서요?”

이놈 왜 말이 점점 짧아져. 이거 설마….

“…차를 옆으로 좀 옮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는 어떻게 하시게?”

설마가 아니라 역시네.

내가 분위기를 잘못 읽었다. 이놈들, 매사에 유쾌한 성격인 게 아니다. 지들끼리, 친한 사이끼리만 유쾌한 놈들인 거다.

지금 2m짜리 떡대가 날 내려다보는 눈빛도 대화를 하겠다는 눈빛이 아니다. 술 먹으러 가야 하는 자신을 왜 붙잡고 그런 말을 하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시선이다.

머릿속으로 할 말을 고르고 있자니, 오크 놈이 피식 웃으며 대답해 왔다.

“차 못 옮겨요. 술 먹어 가지고.”

“…….”

“음주운전 하면 안 되잖아요.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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