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102화 (103/201)

102화. 순수한 미팅에 치와와가 (1)

아무리 숙련된 편돌이라 하더라도 결국엔 사람이고, 사람인 이상 잘못을 할 수 있다. 가령, 손님 온 줄 모르고 딴짓거리를 한다든가….

이걸 방지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편의점의 정문에는 벨이 달려있으며, 편돌이들의 청력은 매장에 달린 벨소리의 진동수에 맞춰 끊임없이 발달하고 진화해 왔다.

나도 마찬가지다. 근무 한 달 남짓 동안 점장과 톡을 하고 딴짓을 하면서도, 정문 열리는 벨소리만큼은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다. 진짜로. 아니 손님 받으라고 월급 받고 있는 놈이 미쳤다고 저걸―

“저거.”

“저거가 뭘 얘기하시는… 혹시 지금 정문 벨 말씀 하시는 겁니까?”

“그럼 지금 내가 저거 아니면 뭘 갖고 얘기해야 되는데?”

“정문 벨 맞네. 예.”

“내가 다시 붙여놨다.”

매장 정문 벨 고정쇠가 자석으로 되어있다. 유리문 꼭대기의 철 부분에 붙여놓는 형태.

벨이 붙어있던 자리를 바라보니, 위치가 전에 비해 훨씬 왼쪽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이 치와와가 다시 주워다 붙여놨나 보다. 전혀 믿기진 않지만….

“죄송합니다, 손님. 정말로요.”

순순히 사과했다. 어떤 이유가 됐든, 오는 손님 못 받는 건 편돌이 측 과실이 100이니까. 물어뜯겨도 할 말 없다.

고개 꾸벅 숙인 뒤, 내일 광견병 예방접종을 한번 알아봐야 하나―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날 가만히 내려다보던 치와와가 한마디 툭 내뱉더라.

“신경 좀 써, 씹새야.”

“어….”

아니, 이놈 오늘따라 왜 이리 스윗하냐? 평소처럼 으르렁대지도 않고?

매일매일 핫도그 상태였던 치와와가 지금은 스윗콘소메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다. 욕하는 거야 늘 한결같았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겠는데….

“손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겪으셨습니까?”

이놈 죽을병이라도 걸린 거 아닌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물어는 봤으나, 말하면서도 대답해 줄 거란 기대는 안 했었다. 허나 잠시 후, 치와와가 툴툴대듯 중얼거렸다.

“겪을 예정이다….”

“예?”

“겪을 예정이라고. 씨팔 사장 새끼가 내 결과물 엎어서.”

이놈이 재직 중인 회사 사장이 비글 코볼트라고 얘기를 하긴 했었던 것 같은데….

“그 비글 새끼는 지 종족값 하고는 실내 골프장으로 날랐고….”

“허어….”

“난 2주 동안 떨었던 지랄을 또 떨게 생겼고….”

“…….”

“썅.”

이 치와와가 오늘따라 얌전한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됐다.

평소 행실을 돌아보며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게 아니라, 나한테 화낼 이유 자체가 없는 것이다. 명확하게 화를 낼 대상이 하나 정해져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도 머릿속엔 비글 상사 얼굴에 두리안을 집어 던지는 상상으로 가득 차 있을 테고. 나도 야근 잡힐 때면 상사 자가용 바퀴 터트리는 상상을 자주 해봤어서 잘 안다.

사실, 꽤 많이 해봤다. 측은함에 바라만 보고 있었더니, 치와와가 내게 툭 던지듯 물었다.

“씹새야.”

“네. 뭐 드릴까요.”

“여기 야구빠따 파냐?”

“…가끔 들어오긴 하는데, 야구 용도로만 쓴다는 확증서에 서명해 주셔야 팔 수 있어요.”

“그럼 됐다.”

적당히 없는 말 지어내서 받아줬고, 치와와도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말을 더 잇지는 않았다. 대신 전혀 다른 걸 물어왔다.

“이럴 때 넌 뭐 하냐?”

너는 업무 스트레스를 어떤 방법으로 푸는 편이냐― 를 묻는 것 같다. 내 경우, 효과도 좋고 쓰기도 편한 방법이 하나 있긴 했다.

“그냥 자죠.”

“왜.”

“출근해야 되잖습니까. 잠 덜 자면 피곤한데.”

전 직장이 야근이 잦았다. 한 달에 야근 안 한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대안이 있었으면 상사 얼굴에 사직서를 집어 던졌을 거고, 돈이 있었으면 평일을 버틴 뒤 주말에 어떻게든 야외 여가활동을 즐겼겠지. 근데, 난 둘 다 없었다.

그래서 고른 돈 안 드는 대안이 그냥 자는 거였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가끔은 맥주 먹고 자고, 가끔은 TV 틀어놓고 자고….

“니 친구는 있냐?”

“있었는데요, 점점 없어졌죠.”

계단 타는 것조차 힘든 때였다. 만나서 술 한잔은 무슨.

아무튼 사회적 건강을 포기하고 정신 건강, 몸 건강 챙기다 보니, 냅다 이불에 드러눕고 보는 게 의외로 괜찮은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되어주더라.

발의를 마치자 치와와가 바로 대답했다.

“지금 안 졸린데.”

“저도 실천하시라고 말씀드린 건 아녜요. 손님 자유지, 뭐.”

물어봐서 대답한 것일 뿐이다. 샌드백에 비글 사진 인쇄해서 붙여놓고 두들겨 패든, 물건 부수는 카페에 가든 자기 맘이다.

카운터 앞에 서서 고민하기를 1분 정도, 치와와가 물었다.

“블랙 파냐? 아이스로.”

“저쪽 팩커피 진열대에서 꺼내오시면 됩니다. 아이스는 그 밑에 얼음컵 있―”

“셀프야?”

“아이스는 다 셀프예요. 핫은 기계 다루는 거 도와드리는 정도.”

냉커피로 머리 식히려나 보다 생각하며 가져온 것들 결제해줬고, 치와와가 기계 다루는 법을 따로 묻지는 않았다. 얼음컵 뚜껑 뜯고, 팩 뜯어서 쏟아붓고.

빨대 꽂아서 한 모금 빨고는, 등에 멘 가방을 벗기 시작하며 말해왔다.

“여기서 일 좀 하다 간다.”

“예?”

“두 시간 정도.”

이…럴 거면 스트레스 어떻게 푸냐고는 왜 물어본, 아니. 당장 이게 문제가 아니다.

“손님 내일부터 또 야근각이라며요. 잠 안 자요?”

“내가 자든 말든 니가 신경을 왜 쓰는데?”

나도 신경 쓰기 싫은데, 오늘만은 그럴 이유가 있어서 이런다.

40분 뒤에 엘레나 양이랑 이 매장에서 만나자고 미팅을 잡아놨다. 생각해둔 자리는 이놈이 지금 앉으려고 바라보고 있는 위치 바로 옆이고. 순수한 미팅에 치와와가 난입하게 생겼다니까?

“니 장사 방해도 안 할 테니까 냅두라고.”

“아뇨, 제 장사 방해한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나 볼일 봐야 하니 여기서 뭐 하지 마라, 이딴 말을 하겠단 게 아니다. 손님이 테이블 앉아서 일 좀 보겠다는 걸 편돌이가 뭔 수로 막겠는가. 그러고 싶지도 않고.

문제는, 그 일이 매장 영업에 방해가 될 경우다. 이 치와와가 어느 직종 종사자인지 난 모르니까. 만약에 이놈이 영업직이고, 영업 상대와 통화하다 분노조절장애가 재발해 버리면?

고래고래 악바리 지르는 건 내가 용납 못 한다. 편의점은 내게도, 손님들한테도 에브리데이 해피한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니 장사 방해할까 봐 이러는 게 맞지 않냐? 씹새야?”

듣고 보니 그렇네. 다시 할 말을 고르던 중, 치와와가 마지못하다는 느낌으로 대답해 왔다.

“코딩. 보안.”

“뭐라고요? 코딩?”

“툴 만들 거다.”

툴 만든다는 게 뭔 소린지는 내가 못 알아듣겠고, 뭐? 코딩? 보안? 이놈이 IT 직종 종사자였단 말인가?

“무소음 자판이라 소리 안 날 거고. 됐냐? 씹새야?”

“코딩??”

“됐으면, 이제 집중해야 되니까 말 걸지 마라.”

이러고는 커피 한 번 더 홀짝이고, 테이블로 가서는 작업으로 보이는 걸 시작했다. 펼친 노트북 화면에 그래프, 문자열, 프로그램 같은 게 주룩주룩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어이가 없다. 보안 마법으로 마귀를 막는 세상에 코딩은 왜 존재하는지는 둘째 치고, 저 개대가리가 코딩? 코디잉??

아니, 개발바닥으로 커피 잡아 마시는 놈이 자판은 대체 어떻게 치는 거냐. 그렇게 생각하며 쳐다보니 자판은 진짜 발톱으로 치고 있었다. 근데 나보다 타자가 빨라. 여튼….

“사장님, 혹시 C형 건전지 있나요?”

“…예. C형 있습니다. 저쪽 세 번째 코너 끝자락에―”

어이가 없는 건 없는 거고, 일은 해야지.

뜨문뜨문 들어오는 손님들을 받으며, 5분 간격으로 치와와 쪽을 곁눈질했다. 저놈이 코딩 도중에 회까닥 돌아서, 찾아온 손님 붙잡고 욕사발을 하진 않을까 싶어서였다.

허나 그러지는 않더라. 사실, 여태 봐 온 모습 중 오늘이 제일 얌전했다.

30분가량의 시간 동안 커피 용량 줄어드는 게 전부일 뿐, 일체의 미동도 소음도 없다. 저놈이 진상 부리는 걸 미리 봐두지 않았다면 ‘뉘 집 개인지는 몰라도 참 의젓하네요―’ 하고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코딩을 하는 순간만큼은 얌전해지니, 저놈한테 24시간 코딩만 시키면 세상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마저 근무하는 도중, 엘레나 양이 왔다.

“사ㅈ, 앗. 찬이 씨! 안녕하세요!”

정문 벨 소리가 울리고, 카운터 앞으로 총총 걸어와서는 날 보자마자 베실 눈웃음을 지었다. 요새 일이 잘 풀리기라도 하나 봐?

“예, 안녕하십니까. 주말 잘 보내셨어요?”

“저야 잘 지냈죠! 집에서 뒹굴거리고, 영화 보고. 찬이 씨는요?”

“저는… 음….”

돈 가방 때문에 경찰도 왔다 가고, 오크들한테 뚜들겨 맞을 뻔하기도 했다, 겪은 대로 대답하려다 말았다. 듣는 쪽도, 말하는 나도 불쌍해질 거 같아서였다.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일하고 잠잔 게 전부긴 하지만.”

“아, 주말도 일하시는구나. 피곤하시겠다….”

“피곤하긴 한데, 일이니까 뭐. 회사서 약 가져오신 거예요?”

“네, 잠시만요. 가방에 든 게 많아서….”

옆으로 멘 가방을 벗어서는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내보이는데, 각각 태블릿 PC와 각진 수정 모양 시약병이었다. 안에 담긴 액체는 투명한데, 액체 안쪽에 웬 서리 같은 게 끼어있다.

“이거 이렇게 갖고 오셔도 괜찮은 거예요?”

“전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나오면서 보존처리 해왔거든요.”

“보존처리요? 뭘로?”

“회사에 상주하시는 마법사분이 계시거든요. 4조 3교대로.”

엘레나 양 회사에 마법약 관리하는 마법사가 넷이 있고, 그 넷이 4교대로 상주하며 신약 상태를 점검, 관리하고 있다고. 어째 흰색 실험실 로브를 입고, 양피지 파일철을 들고 있는 광경 같은 게 상상된다.

“이 시약병도 안에는 엄청 차가워요. 한번 만져보실래요?”

“아뇨, 잠깐 뭐 좀 하고. 자리 잡고 계셔요.”

“네.”

고개를 끄덕인 엘레나 양이 다시 짐을 챙기는 동안, 난 나대로 밑준비를 했다. 슬쩍 블랙커피 팩과 아이스 컵을 계산하고, 빨대 꽂고….

치와와 노트북 옆에 슬쩍 내려놨다. 비워진 커피잔이 아까부터 자꾸 신경 쓰여서였다.

근 한 달 동안 나한테 이것저것 쥐여줬으니, 나도 뭐 하나쯤은 주는 게 맞지 않냐는 생각에서였다. 더해서, 얘기하는 동안 제발 난입만은 하지 말아 달라는 생각도 있었고….

“찬이 씨, 옆에 치와와분은 손님이세요?”

엘레나 양도 신경이 쓰였는지 자리에 앉아서는 내게 물었다. 대답하려 했는데 치와와가 대뜸 입을 열었다.

“손님이다, 분홍 대가리야.”

“엇….”

“귀에 밟히니까 내 종족명 말하지 마. 그리고, 씹새야.”

“왜요.”

“카드 가져가.”

주머니에서 제 지갑 꺼내서는 내게 툭 던지더라. 졸지에 분홍 대가리라 명명당한 엘레나 양이 벙쪄 버렸길래, 얼른 설명해 줬다.

“종족명만 말 안 하면 옆에서 뭐 해도 신경 안 쓰겠답니다.”

“어… 네. 그런데, 이분이 찬이 씨한테 방금―”

“부르기만 저렇게 부르지 물지는 않아요. 후딱 저희 일이나 하죠.”

얼른 말 돌린 뒤에 오늘은 뭘 해야 하냐 물었다. 눈을 두어 번 끔벅인 엘레나 양이 태블릿 PC를 꺼낸 뒤,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해줬다.

“그러니까, 오늘 밤에는요….”

“네. 오늘은.”

“저랑, 사랑 비슷한 걸 해주시면 돼요.”

잠깐 곱씹은 뒤, 확인차 다시 물었다.

“뭘 해달라고요?”

“사랑 비슷한 거요. 사랑은 아니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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