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103화 (104/201)

103화. 순수한 미팅에 치와와가 (2)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말씀드려야 되지…?”

말꼬리를 늘이던 엘레나 양은 그대로 생각에 잠겨버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듯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난 이번 일이 서로 솔직해지는 신약의 효능 검증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TV 예능프로그램 찍는 게 아니라….

아무리 기다려도 엘레나 양이 말이 없어서, 막막함에 내가 물어봤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사랑 비슷한 거?”

“네. 아무래도요. 저희가 진짜로 연애 관계였으면, 검증도 그만큼 더 잘됐겠지만….”

아쉽다는 표정으로 마저 설명하길, 이 상황 조성이 핵심이란다.

현재 개발 중인 신약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인지하는 두 대상끼리만 효과가 발휘된다. 그렇게 쓰라고 만들어진 약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 사랑이란 게 뭔지를 몰라서 만날 때마다 60분 토론을 하는 사이지. 당연히 효과도 떨어질 수밖에 없고, 검증 정확도도 그만큼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엘레나 양이 고민한 결과가 이거란다. 사랑을 당장 하긴 힘드니까, 대신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보자.

“찬이 씨가 곤란하시면 그땐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사실 그걸 생각하고 온 거기도 하고―”

“아뇨. 그게 맞다 생각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우리가 장난으로 이러고 있는 건 아니잖은가. 계약으로 묶인 사이고, 업계 전문가가 ‘이게 맞다―’라는 걸 아는 거 하나 없는 채로 반박할 마음은 없다. 단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단지, 그…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먼저 권하려고 했어요. 엘레나 양께 부탁해서 신약 먹고, 마법적인 부작용은 제가 처리하는 식으로.”

“…와. 정말요?”

“이게 놀랄 일인진 잘 모르겠지만, 네. 제가 그렇게 말곤 일을 못 해서요. 몸으로 때우는 거요. 그래서 저는 상관이 없어요. 근데 엘레나 양은, 그….”

“네.”

“괜찮으시겠어요? 대상이 저여도?”

난 엘레나 양이 괜찮은 서큐버스라 생각하고 있다.

점장이 근무 초창기에 말을 해줬었다. 내가 내 세상에서 가지고 온 서큐버스에 대한 상식들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고.

그렇고 그런 부분들에 대해 난 내성이 없고, 그나마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는 게 이 엘레나 양이라는 거다. 자기 일에 진심이고, 다 떠나서 이 서큐버스가 순해. 사람 중에도 이것보다 순한 사람 거의 못 봤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엘레나 양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난 모른단 거다. 말 상대 해달라며 몇 번 찾아왔던 걸 떠올려보면 날 싫어하는 것 같진 않지만, 지금 경우는… 글쎄?

아무리 일이어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생각하며 속으로 질색하고 싫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가 해준 거래 봐야 말 상대 몇 번 해주고, 숙취해소제 두어 번 쥐여주고, 그게 전부였으니까.

‘솔직히 별로 안 내킨다.’ 말을 해주기만 하면, 그땐 나도 내 일 처리 방식을 고수할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거나, 감수하겠지. 다른 전문가 알아보시는 게 좋겠다고―

“전 괜찮아요.”

딱 잘라 말해온다. 내 생각들이 가위로 잘라졌다.

“제가 개발 관여한 약이니, 검증은 꼭 제가 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니까 전혀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이유지만요.”

“네.”

“찬이 씨, 늘 제 얘기 많이 들어주시잖아요.”

내가 먼저 물어봤다. 맞장구만 쳤다.

“예. 그러고 있죠.”

“자격증 따시려고 준비하신 기간도 짧고, 드러내지만 않으시지 엄청 능력 있는 분이라 생각하고 있고….”

“고맙네요. 뭔가.”

“제가 더 고맙죠. 찬이 씨께서 먼저 말하려고 하셨다는 것도 고맙고요.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찬이 씨가 어떻게든 해주실 거라 믿고 있고, 또… 어….”

떠오르는 족족 내뱉듯 말해오던 엘레나 양이, 마지막에는 말꼬리를 아주 길게 늘였다. 바로 내뱉기엔 부끄러운 말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설령, 묘약으로 부작용이 생기더라도요….”

“말씀하십쇼. 전혀 부담 갖지 말고.”

권했으나, 엘레나 양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푹 숙인 채로 한참을 이러고 있다가, 말해왔다.

“…그래도 괜찮아요. 마음의 준비, 엄청 하고 왔으니까.”

“아니, 씹새야.”

도중, 등 뒤에서 책상이 쿵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돌아보니, 치와와가 안구를 사출할 기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얜 또 왜 이래?

“왜요.”

“아까부터 늬들 대체 뭔 얘길 처하고 있는 거냐?”

손에 쥔 플라스틱 컵은 모래시계가 고개를 돌릴 정도로 처참해진 상태다. 잠깐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엘레나 양이 먼저 용기 내어 대답해 왔다.

“저… 일 얘기 하고 있었는데요. 저희.”

“내가 핑크 대가리 니한테 물어봤, 일? 지금 이게 일 얘기 하는 거였다고?”

“네….”

“이런 씨팔, 늬들 하는 얘기가 어딜 봐서―”

까지 말한 치와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침묵해 버렸고, 엘레나 양은 미지에 대한 공포로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잘은 몰라도 할 말 고를 때가 아니란 것만은 알겠다.

“일 얘기 하던 거 맞긴 합니다. 묘약 관련해서요.”

“아니….”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던 말을 도중에 멈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왜 말을 하다 마십니까?”

“…아니. 아니다. 하던 개소리 마저 해라.”

지도 일이 있단 걸 깨달아서인가, 신경 쓸 바가 아니란 걸 알아서 그런가. 고개 한 번 젓고는 다시 노트북에 코를 박았다. 등 뒤에서 엘레나 양이 감탄 반, 떨림 반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차, 찬이 씨는, 저분이랑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가 되세요…?”

“여기 단골이고, 자주 받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고요. 여튼….”

서로 동의도 구했겠다, 일이나 할란다.

“사랑하는 척을 먼저 해야 한다 하셨는데, 그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앗, 잠시만요. 저도 회사 매뉴얼을 다시 봐야 해서.”

뭔 사랑하는 척하는 데에 회사 매뉴얼까지 있냐?

“…됐다. 이 화면 같이 봐주실래요?”

몸을 슥 기울여 PC 화면을 보여왔고, 나도 몸 기울여 확인했다. 화면 상단에 큼지막이 적힌 매뉴얼 타이틀은, ‘소개팅을 서로 처음 하는 남녀처럼 행동하라.’

“음….”

벌써부터 어지러운데 말이다. 엘레나 양의 손가락에 맞춰 스크롤이 내려가고, 밑에 검증 과정에서 지양해야 할 행동들이 드러났다.

그중 하나가 ‘도중에 인터넷으로 소개팅 노하우 검색하지 말 것’. 내가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이러는 놈이 진짜 있어?

“그리고 또 적힌 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라. 컨셉을 잡고 행동하지 말라….”

“컨셉 잡고 행동하지 말라. 연애를 컨셉 잡고 하는 건 또 뭐랩니까?”

“그게, 여기 세부 사항에는 ‘컨셉을 잡고 연애하면 솔직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효능 검증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라고….”

외에도 적힌 사항들을 확인하며 서로 의견이나 생각을 나눴고, 결국엔 ‘쥐뿔도 모르겠으니 일단 시키는 대로만 하자’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 매뉴얼 쓴 양반은 연애 9단일 것 아닌가. 그러니까 회사에서 이런 매뉴얼 담당하고 있겠지. 연애 30급도 못 딴 모쏠 둘이 연애 9단 상대로 짱구 굴린다고 묘수가 둬지겠어?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담 갖지 말 것’이라 적혀 있네요.”

“제일 어려운 걸 맨 마지막에 적어놨네.”

“그러게요.”

모쏠 둘이 나란히 피식 웃고,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 매뉴얼에 적힌 것들 볼 때마다 수리 가형 4점짜리 문제를 풀고 있다는 느낌밖에 안 들어. 그래도….

“어디서부터 하는 게 맞을까요….”

엘레나 양의 두 번째 한숨. 난 따라 쉬진 않았다. 내가 소개팅이고 나발이고 해본 적은 없어도, 하거든 어떻게 하고 싶다― 하는 다짐은 몇 번 해 본 적이 있다. 가령.

“…엘레나 양. 이 묘약, 따로 희석해서 먹는 거예요? 아니면 이대로?”

“아뇨, 이대로 먹으면 약효가 엄청 오래가요. 희석해서.”

“그럼 마실 거부터 사야겠네요. 희석하는 거 커피 같은 것도 괜찮아요?”

“어… 네. 사실, 음료에 넣어 먹는 게 효과가 더 좋아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끼리는 생수보다 음료를 더 자주 많이 마시니까….”

“다행이네. 혹시 단 거 좋아하세요? 마끼아또? 카푸치노?”

민트초코라떼 같은 기형종을 제외하면 어지간한 건 다 판다. ‘편의’점이니까. 그중에 엘레나 양이 뭘 좋아하는지를 모르니, 단 것 중에서 골라보라는 식으로 말해본 거고….

파는 걸 죄다 열거하지는 않았다. 이 중에 알아서 골라보라는 식으로 들릴 것 같았거든. 다행히도 첫 두 가지 중에 답이 나왔다.

“저는… 마끼아또, 시원한 거 부탁드릴게요. 찬이 씨.”

“옙.”

자리에서 일어나 팩 커피 두 개 사고, 얼음컵에 쪼르르 커피를 담으며 머릿속을 정리해 봤다.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놈이, 연애하는 척을 해야 한다.

잘은 못할 것 같다. 내가 편돌이지, 연애조작단 단원은 아니잖아. 입단 지원서 쓸 생각도 해본 적 없고. 나 같은 놈이 연애는 무슨….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해야 한다. 겨우 시간 내서 나 만나주는데, 지루하게 만들 수는 없잖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내가 또 뭘 하기가 싫나…?

기억난다. 기다리게 만들고 싶지도 않다는 거였다. 얼른 얼음컵 양손에 쥐고, 뚜껑은 손가락에 끼워 테이블로 가져왔다.

“드시다 입맛 안 맞으면 따로 말씀 주세요. 과일 티 종류도 여러 개 있어서.”

“괜찮아요, 마끼아또 좋아해서. 바로 계산―”

“계산 끝냈으니까 그냥 드세요. 나중에 딴 거 사주시면 되지.”

“그래도….”

“어허.”

미안해 죽겠다는 눈치였으나, 어거지로 들이밀었다. 연애하거든 남자가 첫 계산 하는 게 보통이라 들었는데, 막상 미안해하는 얼굴 보니 내가 맞게 한 건지 확신이 안 선다.

“일이나 합시다, 일. 이 안에 약을 넣고 마시면, 서로가 좀 더 솔직해진다는 말이시죠.”

“네. 약효는 커피를 전부 비웠다는 가정하에 1시간 반 정도 갈 거고, 저희는 평범하게… 어….”

“늘 하던 대로 대화하는 거?”

“아, 네. 늘 하던 대로. 그러다 이상증세가 느껴지시거든 가능한 세세히 말씀해 주시면 돼요. 저도 그렇게 할 거고요.”

그 이상증세를 토대로 첨가된 약품의 양이나 마법의 강도를 조절할 예정이란다. 듣고 나서는 어려운 작업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추측하는 이상증세는 가벼운 취기, 어지러움, 발열 정도? 애정 관계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증상이라 착각할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은 찬이 씨께서 체질을 써주시면 될 테니까―”

말해오는 어조가 무덤덤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자기는 당연히 할 수 있다는 어조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서큐버스도 일 시작할 때면 진지해지는 타입이란 말이지.

“취기, 어지러움, 발열. 신경 써 보겠습니다.”

“네. 이제 시작하면 될 것 같아요. 약은 제가 넣을까요?”

“저 주세요. 어차피 마법도 풀어야 되는데.”

약병을 집어 내용물을 들여다봤다. 어떤 마법들이 걸려있는 건지는 몰라도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드라이아이스마냥 감돌고 있는 연기, 이게 보존 마법일 터다.

살짝 흔들어봤다. 단 두 번 흔드는 것만으로 안에 감돌던 연기가 홀연히 사라졌다. 그대로 뚜껑을 열어 눈대중으로 용량을 잰 뒤 절반을 엘레나 양의 커피 컵에 부었다.

나머지는 내 컵에 탈탈 털어 붓고, 먼저 잔을 들어 빨대로 빨아 마셨다. 엘레나 양도 고개를 꾸벅인 뒤 두 손 모아 두어 모금.

마신 뒤 서로 동시에 컵을 내려놓았다. 이제 시작인데, 무슨 대화로 스타트를 끊어야 하나….

“저… 찬이 씨. 이건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진짜 사소한 거긴 하지만.”

“사소한 거 말고 진지한 거 물어보시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래야 검증도 잘될 텐데.”

“그래도, 찬이 씨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서….”

“말씀하세요. 뭘 여쭤보시려고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시나.”

별생각 없었다. 엘레나 양이 지금 내게는 덜 그래도,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지금 질문도 무겁지는 않을―

“그게… 찬이 씨, 사시는 곳이 어디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