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123화 (124/201)

123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1)

* * *

연산식이 꼬였다.

이 말을 시작으로 점장이 읊은 말들이 대략 이러했다.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로 인해 편의점에 세팅해둔 연산식이 꼬인 상태며, 이로 인해 나 살던 세상뿐만이 아닌 모든 곳으로의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상태다.

여기까지 숨 한번 고르지 않고 말해온 점장이 곧바로 다음 설명을 이어갔다.

“찬이 집 가는 좌표는 첫날에 따로 적어서 보관해 뒀구, 연산식이 꼬인 것 외엔 아무 이상 없으니까 찬이 집에 못 돌아갈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침착하구. 알았지.”

1분 내리 호흡 없이 말하는 게 대마법사의 소양이기라도 한 것인가. 나보단 점장이 더 침착을 못 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잠깐 생각해 보니, 위로보다는 도움 되는 말을 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더라. 바로 말했다.

“어제 누나 왔다 갔었어요, 점장님.”

“…어? 윤하가? 어제 안 쉬었대?”

“네. 다람쥐가 람쥐썬더 쓰고, 강철둘기가 날아와서 진열대 부수고. 이거 인수인계 사항으로 전달드리려 했던 건데.”

이번엔 내가 설명했다. 어제 매장에 유해조수들이 나타나 유해한 짓을 해댔고, 그걸 어르신과 누나가 도와줘서 겨우 해결했다.

“그 뒤에 누나가 얘기해 준 게, 저희 매장 주변에 핵심 게이트인지 뭔지가 나타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뭔 일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아.”

“이게 연산식이 흐트러진 거랑 연관이 있어요?”

난 이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더라. 하루 사이에 일어난 변화래 봐야 이거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내 설명 들은 점장이 ‘그거구나.’ 짧게 내뱉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에 이게 포함이 되어 있었나 보다. 잠시 후, 점장이 물었다.

“윤하가 언제 해결되는지는 얘기 안 해 줬구?”

“그건 누나도 잘 모르는 거 같습니다. 아직 추측 단계라고만 해왔어서. 이거 엠바고 걸릴 내용이라고도 하던데요?”

“…그렇겠지. 오늘 윤하는 많이 바쁘겠네….”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겨버린 점장.

이러는 게 십분 이해가 됐다. 새벽 근무 내내 현 상황을 내 세상 상식에 빗대어 정리하려 했었고, 아침 즈음 결론 내린 게 있어서다.

쉽게 말해, 지금 편의점 쪽으로 폭풍이 몰려오고 있는 거다. 그 폭풍이 단순한 폭풍이 아닌 시공의 폭풍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자기 편의점이 폭풍에 휩쓸릴 판이라는데 생각 안 많아질 업주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점장이 이걸 걱정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 걸 이젠 안다.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점장님. 저 별생각 없어요.”

“…….”

“오늘이 근무 첫날이었으면, 점장님께 지방법원에서 뵙자며 난리를 피워댔을 것 같긴 한데….”

지금은 침착하다. 스스로가 놀랍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이유가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좀 복합적이다, 이게. 밤을 새운 탓에 감각이 무뎌져서인 건지, 람쥐썬더에 멘탈이 활활 타버리고 더 남은 게 없어서인지….

아니면 현자타임이 와서인지, 뭔지. 뭐가 됐든 더 따지고픈 생각은 없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이틀 전에 창고 다녀왔을 때 얘기한 거 있잖습니까. 둘 중 하나가 정신 못 차려도, 다른 한쪽이 침착해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고.”

이 말까지 하고 나서야 점장이 날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치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눈빛이다. 별로 보고 싶진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뒤, 점장이 나지막이 말해왔다.

“이거 해결하는 거, 전혀 어려운 일 아냐. 시간이 다소 걸릴 뿐이지.”

엘프 경찰과 같이 일할 때 들었던 특유의 전문가스러운 어투다. 다시 점장을 바라보자 평소의 점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대신, 살짝 진지해졌다.

“속으로 다짐했던 게 있거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때 제시간에 찬이 퇴근시켜 주자고.”

“그거 무진장 감격스럽네요. 언제 그런 다짐까지 하셨대.”

“첫날에. 찬이, 집에 많이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편돌이들이 다 똑같지 않을까? 야간 12시간 풀근무했는데 퇴근을 못 한다 하면 어느 편돌이가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겠는가. POS기 현금 다 털어서 뛰쳐나가도 합법이지.

“속으로 엄청 진지하게 했던 다짐이었는데, 한 달 만에 깨져버렸어.”

“허어….”

“그래서 화가 났던 거고. 요새는 찬이한테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거 같네….”

“저한텐 그러셔도 돼요. 여태 저 찡찡거렸던 거 받아주신 게 몇 번인데.”

떠오르는 대로 말하자, 점장이 살짝 웃고는 말을 받아줬다.

“찬이가 그렇게 편하게 대해주니까 내가 이러는 거야.”

“편하시다니 저도 좋네요. 그런데 시간이 정확히 며칠쯤 걸리는 거예요?”

“빠르면 하루, 길면 이틀.”

이후로는 평소 인수인계하듯 편하게 이야기했다. 커튼 다시 걷고, 정문 잠금쇠 다시 풀고. 내용만 살짝 추가됐을 뿐이다.

“꼬인 연산식은 새로 쓰면 돼. 연산식을 심사받아야 하는 게 문제지.”

“매장 개업하실 때 받으셨을 심사로는 안 되는 거고요?”

“응. 용도증명 과정이 필수거든.”

공간이동 연산식을 새로 짰을 때, 이 연산식을 정말로 편의점을 공간이동시키려고 구축한 게 맞는지를 반드시 확인받아야 한단다.

“그걸 안 하면, 단독주택 같은 건물을 시전자가 마음대로 옮겨버릴 수 있으니까. 원하면 집을 통째로 도둑질할 수도 있구.”

“오메.”

바로 이해가 됐다. 저쪽 집을 누가 통째로 훔쳐 갔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는데, 돌아와서 보니 우리 집도 누가 훔쳐 가서 사라져 있어 봐. 보자마자 눈물이 나지 않을까?

이 용도증명 외에도 할 게 많았는데, 매장과 지면이 맞닿은 부분 중 어디까지를 공간이동시킬 것인가, 주변 공공재나 다른 상가를 같이 이동시키지는 않는가, 등등.

“오늘 오후 중에 끝내서 보내면 내일 아침 중에 결과 나올 거구. 그래서 못해도 하루.”

“과정이 꽤 복잡한 것 같은데, 정말 가능하시겠어요?”

혹시라도 무리하는 거라면 그러지 마라. 이걸 에둘러 말해본 건데, 점장이 오히려 고개 갸웃하며 되물어왔다.

“전혀 안 복잡한데?”

그렇다니 그런 줄 알기로 했다. 내가 공간이동 마법에 기초상식이 있기를 해, 아는 마법사가 있기를 해….

이후 점장이 팔짱을 꼈고, 천장을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어왔다. 이번엔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운 어투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틀.”

“네?”

“아냐, 혼잣말. 찬이는 이제 어떻게 하고 싶어?”

서둘러 대화 주제를 바꾼다는 느낌이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이것도 당장 따져야 할 사안이 맞았기 때문이다.

난 오늘 집에 갈 수 없다. 즉,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잠을 자야 한다. 그래야 다음 날 출근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내가 헌터도 아니고.

잠깐 동안은 익숙한 편의점 테이블에 드러누워 자면 어떨지를 생각해 봤는데, 점장이 내가 그러고 있는 걸 별로 좋아할 것 같진 않더라. 나도 싫고.

비슷한 이유로 창고도 제외하고 나니 선택지가 무척 좁아졌다.

“근처에 찜질방 있어요? 거기서 12시간 버티다 오면 어떨까 싶은데.”

“그건 싫어. 내가 잘못해서 찬이 집 못 가는 건데, 잠이라도 제대로 된 곳에서 재워야지. 음….”

완강하게 거부 의사를 표현하는 점장. 곧바로 POS기를 열고 현금 칸을 들어 올리고는 밑에서 노란색 봉투 하나를 꺼냈고, 이번엔 내가 의사 표현을 할 차례였다.

“됐습니다, 점장님. 받은 게 얼마인데 또 뭘 주시려고 그래.”

“그럴 줄 알고 꺼냈지. 이거 내 돈 아니야, 찬아. 전에 기프트카드 잔뜩 사 가셨던 그분이 주신 그거.”

“…아, 50만 원. 기억납니다.”

기프트카드 200만 원어치 사 가고는 수고했다며 50만 원 두고 갔던 토지신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었다. 액수가 액수인 만큼, 언제가 됐든 알아서 돈 찾아가실 줄 알았는데 말야….

“1주일 넘었는데도 안 오셨으니까, 찬이 쓰라고 일부러 두고 가신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야.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저도 그 생각이긴 한데, 이거 저희 같이 쓰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내가 돈 주고.”

“…잘 쓰겠슴다.”

이거 안 받았다간 점장이 자기 지갑을 꺼내버릴 것 같다. 받은 뒤, 점장에게 간단하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매장 근처에 혹시 숙소 몰린 곳 있습니까, 점장님? 그런 쪽이 보고 들어가기 편한데.”

“이 주변에는 없구, 지하철 타고 좀 나가면 될 거야. 아니면 내가 알아봐 줄까?”

“괜찮아요. 이런 거 여러 번 해봐서.”

회사에서 출장 다닐 때면 매주 했던 짓 중 하나가, 같이 출장 나온 직장 상사랑 묵을 숙소를 찾는 거였다. 가격이 얼마 이상이면 안 된다, 내부 인테리어가 괜찮아야 한다, 뭐….

이 세상이라고 크게 다를 거 없겠지. 폰 배터리를 슬쩍 확인한 뒤, 점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적당한 곳 알아서 찾아 들어가겠습니다, 점장님.”

“응. 아무 걱정하지 말구, 낮에 푹 자는 걸로. 알았지?”

“옙. 밤에 봬요.”

* * *

매장 밖으로 나온 뒤 버스정류장에 걸터앉았다. 새벽 시간대면 늘 이 버스정류장만 쳐다보며 근무했었는데, 막상 앉아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앉아서는 잠깐 거리를 둘러봤다. 이 시간이 돼서도 이 세상에 있다는 게 어째 어색하다.

이 시간이면 늘 내 세상의 길을 걷고 있었으니까. 편의점을 나와 집 방향으로 난 길을 거닐 때면, 중간에 서 있는 작은 시계탑으로 늘 시간을 확인해 왔었다.

그 시계탑이 늘 가리키던 시간이 10시 15분 즈음, 지금은 10시 반. 지금부터 흐르는 1분 1초가 전부 미지의 시간이었고, 상상만 잠깐씩 하고 말았던 시간이었다.

길게 해 봐야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장째로 공간이동을 하려면 내부에 손님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간, 그 손님이 내 세상으로 같이 딸려올 거잖은가?

그 손님이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물어보면, 손님한테 뭐라고 하냐고. 100만 번째 손님 방문 기념 깜짝파티 중이라고 해? 기념선물은 딴 세상 관람이고?

웃기긴 하겠다. 이런 이유로 매장의 공간이동은 손님이 뜨문뜨문한 10시 직후가 아니면 불가능했고, 난 귀가와 이세계 불법체류 중 늘 전자의 선택지를 택해 왔다. 잠을 자야 다음 날 출근을 할 거 아냐.

그 반대의 경우가 언젠가 올 거라고 상상은 했었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이뤄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거리가 이렇게까지 죽어 있을 거라고는 아예 상상 자체를 못 했었고. 내가 상상 속에서 거닐던 거리는 이것보다는 좀 더 활기차고, 일상적이었….

“…에라이.”

당장 잘 곳도 없는 놈이 별생각을 다 한다. 바로 폰을 꺼내 화면을 켰는데, 아침까지만 해도 못 봤던 톡이 여러 개 떠올라 있었다. 두 명한테서.

그중 첫 번째 톡의 발신자가….

“뭐야.”

데카드. 내 자격증 시험 감독관이었던 그 양반이다. 현직 학원지구 반마법학 교수 겸임에, 지금은 내 사수 해먹고 있는 뱀파이어.

더해서, 나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삶을 마이웨이로 사는 양반이기도 했다. 불길함에 톡을 확인해 봤더니, 딱 두 줄 적혀 있더라.

[ 지금쯤 퇴근했을 걸로 압니다 ]

[ 확인 즉시 전화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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