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단골손님 어셈블 (2)
* * *
치와와가 한 말에 나도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한다. 이 빌어먹을 게이트는 왜 하필이면 첫 월급도 못 받은 내 직장 코앞에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는 것인가?
이걸 굳이 입밖으로 내지 않은 이유는, 누구한테 물어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문에서였다. 나중에 운 좋게 이 세상 신을 접신하거든, 나한테 왜 그랬냐며 하소연 몇 마디는 할 수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 그럼 어쩔 수 있는 일이라도 어떻게 해봐야지. 말 마친 뒤 아무나 말하기를 기다리길 수 초, 치와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니 도와주면 그땐 똥 쌀 수 있냐?”
“그건 확신 못 하겠는데, 안 도와주면 손님 집 변기 계속 물에 잠겨있을걸요?”
“시발.”
이러고는 침묵. 동의한 걸로 알기로 했다. 다음은 어르신.
“제 반려에게, 꽃을 가꾸는 취미가 있습니다. 사장님.”
“네? 꽃이요?”
“예. 아침부터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이 날씨가 계속되면 꽃들이 시들어버릴지도 모른다면서.”
바깥 먹구름을 지그시 바라보던 어르신께서, 내가 고개 돌리고는 눈웃음 지으며 말씀하셨다.
“비를 그치게 하시려는 듯하니, 저도 힘닿는 데까지는 노력해 보겠습니다.”
로맨티스트시구만. 어르신 말에 엘레나 양이 와닿는 게 있었는지 ‘와아…’ 감탄하면서 작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는지, 한 손만 귀 옆까지 들며 말해왔다.
“저, 찬이 씨.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도 힘닿는 데까지는….”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저도 딱 힘닿는 데까지만 할 거니까.”
“…네.”
가능한 한 부담 안 가지게 받아줬더니, 작게 대답하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인다. 낯가리는 성격에 저 정도면 용기 많이 냈지, 뭐.
엘레나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관이, 경찰모를 고쳐 쓰고는 누나에게 물었다.
“윤하 씨. 저는 아까 부탁하셨던 대로 시행하면 되겠습니까?”
“네. 그대로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어떤 거 얘기야, 누나?”
“우리 내려갔을 때 매장 부탁한다고 부탁드렸었어. 여기 손님분들이 모두 마법 쓸 줄 아시는 게 아니니까.”
지금 매장 인원을 자기보호가 가능한 인원들과 그렇지 않은 인원,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점장, 누나, 어르신, 경관.
후자가 치와와, 서큐버스, 멍멍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넷. 누나가 방금까지만 해도, 어르신과 경관에게 우리 넷을 부탁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지금 매장 빠져나가려 해봐야, 떠내려가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보이고….”
말 늘이며 조용히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누나. 따라서 귀 기울여 봤다. 빗소리가 아까보다도 좀 더 거세진 것 같다.
“…나갔다가 더 심해지면 그땐 진짜 큰일 날 테니까. 차라리 여기 뭉쳐 있는 게 나아.”
“그거 말인데, 그. 점장님께서 마법으로 어떻게 하시면 안 되나?”
당장 점장도 여기 순간이동으로 왔잖은가. 말하며 점장을 바라보자, 눈 마주친 점장이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내가 오늘 허가받은 마법 사용 횟수가 아홉 번이야, 찬아.”
“아까 앞으로 일곱 번 무적일 수 있다고 하셨었죠.”
“응. 그 횟수 다 쓰고 나면, 난 그냥 평범한 점장이 되어버려.”
무슨 마법소녀야?
“그러니까 여기는 경관님께 맡기구, 찬이랑 윤하 따라가서 도와주려구.”
“저도 마법을 쓸 줄 압니다. 어느 정도는.”
도중에 말을 받는 경관. 어느새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하나 꺼내 든 채였는데, 예전에 보았던 수첩과는 전혀 다른 디자인이다.
군청색에, 표지에 큼지막한 마법진 하나가 그려져 있다.
“제대로 시전하려면 이걸 써야 하기는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어요?”
“예. 지금이 도주하는 용의자를 추격하는 상황은 아니니까요.”
전력 질주 하고 철조망을 뛰어넘거나 하는 긴박한 상황이 아니니 가능하다, 이런 의미인 것 같다. 대화하는 도중, 엄지와 검지 사이가 점차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내려다보자 품에 안긴 멍멍이가 온 힘을 다해 내 손을 핥아대고 있었다. 멍멍이한테 말했다.
“네가 할 일이 있는지도 이따 생각 좀 해보자, 멍멍아.”
“헥, 헥, 헥.”
“저 미친놈이 빗물이 코로 들어갔나, 개한테 말은 왜 걸어?”
“뭐 그리 까칠하십니까. 우리 말 안 통하는 짐승이랑 대화할 일 생길 수도 있지….”
“걔랑 대화가 안 통하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씹새야.”
여기에 대답은 따로 안 했고, 누나에게 머리 긁적이며 물었다.
“누나. 대충 동의는 다 구한 것 같은데….”
“어.”
“근데 이제 뭐 함?”
* * *
여기서부턴 전문가가 나서야 할 영역 같아서였다. 내 물음에 누나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 아주 질색을 하는 표정으로 치와와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이름이 뭐예요?”
“이런 썅, 연판장에 서명이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내 이름은 왜 물어봐?”
“됐어요, 그럼. 컴퓨터 잘 다루시는 것 같은데, 혹시 마법청 쪽에 연락 가능해요? 10분 내로?”
“아니, 전파가 안 터지는데 연락을 어떻게 하냐고 시팔. 비둘기라도 한 마리 빌려주든가….”
“저런 씨.”
이 말을 듣는 순간, 누나가 자기 신발이라도 벗어 집어 던질 기세로 몸을 숙였다. 다행히도 점장이 타이밍 좋게 끼어들었다.
“조금이라도 전파 해결해 드리면, 그땐 연락할 수 있으세요?”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혹시 몰라서 마법청 직원분들 연락할 때 쓰는 걸 가져와 봤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점장이 주머니에서 작은 마석을 하나 꺼냈다. 색은 여태 봐온 마석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던 대신, 표면이 훨씬 더 매끄럽다.
“비상연락용이라, 마법청 인원들끼리밖엔 못 쓰지만요. 도움이 될까요?”
저게 성능 좋은 매―직 포켓 와이파이 비스무리한 건가 보다. 아니면 전파 송수신만 가능한 무전기든가. 마석을 잠깐 쳐다보던 치와와가 바로 입을 열었다.
“코드.”
“A3FK9027, 이요.”
“1분만 있어봐.”
바로 노트북 펼쳐서는 무릎에 얹은 뒤, 노트북 모니터가 덜덜 떨릴 정도로 기세 좋게 자판을 입력하기 시작한다.
그러길 십수 초, 대뜸 점장에게 말을 거는 치와와.
“야, 땅꼬맹이. 지금 이 새끼들 서로 존나 전화하고 있어서 회선이 꽉 찼거든?”
“네.”
“한 번 끊는다.”
내뱉고는 일말의 주저 없이 엔터를 띡 누른 뒤, 날 올려다보며 노트북 옆면을 발톱으로 가리켰다.
“폰 연결선 꽂아봐.”
당장은 없고, 과자 코너 부근에서 빗물에 둥둥 떠다니던 걸 본 기억이 난다. 바로 달려가서 연결선 포장을 뜯어내 폰에 한쪽을 꽂고, 반대쪽 선을 노트북 옆면 소켓에 꽂았다.
“이제 마법청 안내원한테 연결될 거니까, 니 할 말 해라.”
“벌써요?”
“시발, 그럼 다 안 된 걸 됐다고 말하겠냐?”
이 양반은 이렇게 재주가 좋은데 왜 직장에서 비글 상사한테 시달리면서 사는 거야?
의문이 떠오르긴 했지만, 나중에 물어볼 기회가 있겠지. 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통화가 연결되는 동안 치와와에게 다른 걸 물었다.
“부탁한 마당에 말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이거 문제없는 건 맞습니까?”
“저 경찰이 수갑만 안 채우면.”
이게 통신보안법에 저촉될 짓이 맞긴 한가 보다. 이루엘 경관 눈치를 슬쩍 살폈는데, 경관이 잠깐 경광봉으로 머리를 두드리고는 무덤덤하게 말해왔다.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니, 나중에 서에서 뵙죠.”
“뭐?”
“설렁탕이 맛있습니다.”
치와와가 똥 씹은 표정이 됨과 동시에 통화음이 끊겼다. 자기들끼리 돌려 쓰는 비상연락망 회선을 써서인가, ARS 음성 없이 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전화 받았습니다. 어느 부서에서 연락주셨나요? ]
여성에, 정중하되 살짝 당황한 목소리다. 치와와가 방금 회선을 전부 끊어버렸다고 했으니, 그 전에 하던 통화가 끊겼던 거겠지.
비상연락용 전파를 쓰고 있다 했으니, 외부에서 연락이 온다면 수상하게 여길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제가 마법청 소속은 아닙니다만….”
[ 네? ]
“…임시대책위원회 자문역을 맡고 있는 데카드 교수라고 합니다. 동행하고 있는 마법청 직원에게 마석을 빌려 연락드리고 있습니다.”
[ 데카드 교수님. 확인했습니다. ]
떠오르는 대로 지껄인 게 통한 것 같다. 내 사수 하겠다고 자청한 양반이니, 뉴비가 이 정도 사고 치는 것쯤은 알아서 해결해 줄 터다.
교수 직함을 댄 이상, 길게 통화하는 건 가방끈 길이 측면에서 불리하다. 바로 용건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어떤 용건으로 연락주셨나요, 교수님? ]
“……그게.”
폰에서 귀 떼고 누나를 바라보자, 누나가 바로 용건을 일러줬다.
“핵심 게이트 찾았다고 위치 말해주고, 자연 소멸까지 2시간 좀 더 남았다고 얘기하고. 예산 배정해 달라고 한 다음에, 인원 여유 생기는 대로 협회 측에 지원 요청 바란다고 해.”
“다른 건?”
“나머지는 걔네들이 알아서 할 거야.”
누나가 열거한 대로 전부 말한 뒤 대답을 기다렸다. 잠깐 타이핑 소리가 끝난 뒤,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핵심 게이트를… 발견하셨다. 이대로 전달해드리면 될까요? ]
“예. 일각을 다투는 상황이니, 신속하게 처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못 믿겠다는 뉘앙스였으나, 믿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 심정으로 끊었다. 아무튼 보고했으니 막무가내로 일 처리 했다는 얘기는 안 듣겠지.
“이 새끼, 바로 딴 놈 이름 팔아먹는 게 예술이네.”
“뭘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감사할 시간에 변기나 빨리 뚫어. 그리고, 땅꼬맹아.”
“네. 말씀하셔요, 손님.”
“마석 좀 더 쓴다.”
말하고는 자기 노트북과 마석을 양손에 들고 구석으로 가버리는 치와와.
어디다 쓴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대충 회선을 끊은 흔적을 지운다는 것쯤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영화에선 다들 그러더라.
“누나. 또 어디 연락할 데 있어?”
“없어. 아무튼 보고했으니 이걸로 됐고… 엘레나 씨?”
“네? …아. 네!”
누나가 외견만 보면 모델에 가까워서 그런가, 이름을 불린 엘레나 양이 바싹 긴장한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누나 넉살 좋은 게 탈인간급이기는 해.
“상황이 많이 아쉽네요. 평소라면 통성명도 하고, 잡다한 얘기들도 나누고 할 텐데….”
“네. 네….”
“필요한 마법약들이 좀 있어서. 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 * *
엘레나 양이 수영복 가방을 열어서는 쇼윈도 앞 테이블 위에 내용물을 전부 쏟아냈다. 모양이 다양한 플라스크들과 거치대, 시약병 십수 개가 크레파스처럼 담긴 가방, 삼발이, 약초 꾸러미 등등.
편의점에서 보기엔 워낙 위화감 넘치는 상황이어서인지, 치와와를 제외한 손님들이 전부 모여들었다. 그 탓에 엘레나 양이 어깨 움츠리며 쭈구리가 되어버렸다.
“…….”
이걸 긴장을 어떻게 풀어줘야 되냐. 방법을 떠올려 보려 했는데, 점장이 살짝 감탄 섞인 어조로 먼저 말을 걸더라.
“와아, 취미인 것치고는 엄청 본격적이시다. 저울은 따로 안 쓰시는 거예요?”
“아… 네! 용량 조절하는 건 도구 없이 하는 게 익숙해져서, 따로 휴대 안 하고 있어요.”
“맞아 맞아, 익숙해지면 가방 공간만 차지하구. 많이 만들어 보셨구나.”
“그, 그렇게 보이세요?”
“조금은요. 저도 옛날에 잠깐 공부했던 적이 있거든요.”
엘레나 양이 쑥스럽다는 듯 두 손을 모으는데, 점장이 왕년의 대마법사란 걸 알고도 쑥스러워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거 점장이 나름 인정해준 거 아닌가?
잠깐 대화를 나눈 뒤에는 긴장이 좀 풀린 건지, 나와 누나 쪽을 올려다보며 묻는 엘레나 양.
“저… 그런데, 어떤 게 필요하신 건가요?”
“그러게요. 누나, 하수도 들어가는 거니까 물속에서 쓸 만한 거 필요하지 않나?”
“있으면 좋지. 하수도 물에 잠겼을 때, 1시간 정도 있으면 넉넉하게 빠져나올 수 있을 거고.”
“그런 게 있다고? 막 아가미 생기고?”
“아. 아가미는 불법이라서 못 만들어요. 벌금 물게 되거든요.”
옛날에 어패류 코볼트와 관련된 종족차별 이슈가 터져서 세상에 난리가 날 뻔한 적이 있었댄다. 이 세상은 이해가 될 만하면 꼭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하나씩 튀어나와.
“그래도… 대체품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아가미 말고 다르게 호흡을 한다?”
“네, 찬이 씨. 비강으로 분무하듯 복용하는 포션에, 복용하시고 나면… 음….”
폐 내부에 산소통 역할을 하는 매―직 공기 방울을 생성해, 호흡 활동을 하지 않아도 체내에 산소 공급을 하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게 해준단다. 효과는 1회 복용에 30분.
라는 식의 설명을 다소 두서없이 해왔는데, 난 들어도 잘 모르겠어서 조용히 있었다. 잠시 후, 점장이 아까보다 좀 더 감탄 섞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건 나도 살짝 만들기 힘든 건데….”
“점장님도요?”
“응. 엘레나 씨, 혹시 다른 것도 만들 줄 아시나요?”
점장의 물음에 엘레나 양이 의욕 가득한 목소리로 답해왔다.
“말씀만 해주세요! 저, 웬만한 자격증은 다 따놨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