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145화 (146/201)

145화. 단골손님 어셈블 (8)

* * *

점장을 슬쩍 바라봤다. 정면을 보고 있어 얼굴이 다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옆얼굴만 봐도 점장이 이 주제를 무척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겠더라.

이젠 알고 지낸 짬이 있으니까. 추정 시간까지 15분도 안 남은 상황에 이 주제로 대화를 하는 게 맞냐 싶기는 하지만….

“계속 걸으면서 얘기해도 될까요?”

나보다는 점장이 현재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을 거다. 지금이 아니면 못 할 대화이기도 하고. 확인차 묻자, 점장이 얕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해 줬다.

“응.”

“저한테 뭘 미안해하시는 건지 알아요.”

말하며 나아갈 길을 살펴보니, 코앞에 발을 높이 들어야 겨우 올라갈 수 있을 언덕이 만들어진 채였다. 먼저 올라간 뒤, 언덕을 오르려는 점장의 손을 붙잡아 끌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 살던 세상 동굴들은 이렇게 배배 꼬여대거나, 꾸물대거나 하진 않아요. 지금 이건 이 세상에서도 특별한 거겠지만요.”

이러면서 틈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법이 제 역할을 해주고 있다.

내벽 위쪽은 마법이 덜 걸렸는지 쉴 새 없이 배배 꼬이는 반면, 바닥은 요철이 조금 있을지언정 무리는 없다. 점장이 신경을 쓴 거겠지.

“아파트만 한 문어나 단독주택만 한 초롱아귀한테 깔리거나 물어뜯길 만한 일도 거의 없고요. 살아 움직이는 떡대 바위들 뒤로 몰래 돌아가야 할 일도 마찬가지로 없고.”

“응….”

“그리고 500m 깊이 맨 바다에 헤딩해야 할 일도 없고….”

이렇게 되새겨보고 느낀 게, 이번 생에 할 수 있는 미친 짓이란 미친 짓은 오늘 3시간 만에 다 하고 있는 것 같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가산점 주냐?

“지금처럼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걸 없앨 일도 잘 없어요. 보통은.”

이 짧은 대화 사이, 출입구 안쪽이 보일 정도까지 왔다. 내벽이 그나마 얌전히 꼬여 있어 길 걱정도 없다. 길어도 30초 이상은 안 걸릴 거다.

“그러니 저 안에 있는 게 무섭지 않다고 하면, 점장님께선 안 믿으실 겁니다. 그렇죠.”

“찬이 말이면 난 전부 믿지.”

“왜요?”

“약속했잖아. 우리끼리는 서로 거짓말 안 하기로.”

“…그랬죠. 그러긴 했네.”

이걸 듣고 나니 떠오르는 게 있다. 내 사정을 아는 건 이 세상에 점장 한 명뿐이다. 때문에, 이 일로 나한테 미안하다 말할 수 있는 것도 점장 한 명뿐.

바꿔 말하면, 내가 당장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도 점장이 유일하다.

그러니 딱 내 속내만 짧게 털어보련다. 내가 뭘 무서워하는가, 이 주제에 관해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게 무섭긴 해요. 무섭긴 한데, 당장 제가 저기서 어떻게 되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게 하나 있어요.”

“어떤 거?”

“제가 일 잘못했을 때 큰일 나는 게 저 혼자만이 아니라는 거. 전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남 실망시키는 건 익숙하다. 이것만은 각오하고 왔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골로 가거나 원룸 한복판에 웅크리고 있는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냐. 일이 커질 대로 커졌다.

여기 같이 들어온 어르신, 누나, 멍멍이. 위에서 기다리는 엘레나 양, 경관, 치와와. 어딘가에서 나 찾아올 날만 기다리고 있을 하나 녀석, 옆에 있는 점장.

내가 이 일을 제대로 못 하면 다 골로 간다. 난 이 점이 제일 무섭다.

“그렇게 안 되려면 제가 당장 잘해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제가, 지금까지 뭔가를 제대로 해내 본 적이 없습니다.”

“…….”

“그래서 무섭습니다. 이제야 이 세상이 좀 지낼 만해졌어요. 지낼 만해지고 나니, 제가 만났던 이종족분들이 꽤 괜찮은 양반들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그래서….”

“응.”

“…실패해서 전부 없던 일이 되는 거. 이 세상서 겪었던 일들이 다시 예전처럼 붙잡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버리는 거. 저는 그게 제일 두렵습니다.”

옛날에는 자주 했었다. 사소한 일로 수다 떨고, 가끔은 진중한 얘기도 하고, 고민 털어놓거든 들어 주고, 들어 줘서 고맙다는 말 듣는 거.

그땐 그 이유를 표현 못 했지만, 이제는 가능하다.

그냥 그러는 게 좋았다. 고맙다는 말 몇 마디 듣고 나면, 내가 그래도 잘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좋은 게 좋은 거잖은가.

그러니 찰나의 인연이 될지라도, 가능한 만큼은 손에 꽉 쥐고 살아보고 싶다. 9살 때 부러진 잠자리채 들고 놀던 추억처럼, 지금 이 순간들도 언젠가는 마법처럼 사라져버릴 테니까.

“그래서 내려오겠다고 마음먹은 거기도 합니다. 이게 이 나이 먹고 하기엔 많이 유치한 말들이기는 한데….”

“찬이가 그런 게 걱정됐던 거라면….”

“예?”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얼마든지 있지.”

말하며 내 손을 잡고 이끌듯 나아가는 점장. 처음에 사과했을 때에 비해 목소리가 몇 결은 더 밝아져 있었다.

뒤를 따라 30초가량을 더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처음 들어서서 둘러봤을 때는 아까와 똑같은 해저 공동이라 생각했는데, 좀 더 지켜보니 여기도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

내벽이 수축하고 있었다. 바위가 깎여 맨들맨들한 원 모양이다. 일정 넓이를 감쌀 만큼 수축하고는 멈춘 뒤 다시 팽창하는데. 주기가 꽤 빨랐다. 마치 심장을 보는 것 같다.

점장과 내가 서 있는 곳의 오른편에, 딱 손을 뻗으면 닿을 높이로 거대한 물방울이 하나 떠 있다. 저것도 건물 수십 층 크기는 되는 것 같다.

그 물방울의 가운데에 무언가가 있었다. 정확히는, 저 무언가를 중심으로 사방이 구겨지고 있는 게 보인다. 저게 우리 매장을 난파선으로 만들어버린 그놈이겠지.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점장이 말을 이었다.

“오늘 지나온 길들 말야. 대부분의 이종족분들은 그런 것들 엄청 무서워하실 거야.”

“그렇겠죠? 아무래도.”

“찬이 경우에는 무서운 게 특히 더할 거라 생각했어. 다른 세상에서 지내거나, 미지의 개념들을 맞닥뜨리면서도 어떻게든 적응해 나가는 거, 난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니까.”

내가 살던 곳에 대해 점장은 내 입으로밖에 전해 들은 게 없다. 한국 땅에서 조심할 거래 봐야 밤길, 사기, 혹은 투자 권유 스팸전화 정도이기는 하지만….

뭐든 한번 잘못 걸렸다간 삶에 철심이 박히는 짓들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나 사는 곳도 무서운 세상이 맞긴 하네.

“그게 제일 미안했어. 찬이 이 세상에서 일하게 한 게 나인데, 내가 아는 게 없어서 제대로 설명해줄 수도 없구, 제대로 도와줄 수도 없다는 거.”

“그건 이제 안 미안해하셔도 됩니다. 제가 사인한 거잖아요.”

“안 미안해하는 게 힘들더라구. 아무래도….”

또다시 침울해지려던 점장이, 우리가 서 있는 반대편을 바라보고는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후엔 입술을 약간 삐죽 내밀고는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기는데, 파열음과 동시에 반대쪽 허공에서 검은 구름이 하나 생겨났다. 솜사탕만 했던 구름이 순식간에 수 미터까지 크기가 불어나고는 바닥으로 벼락 한 줄기를 내리꽂았다.

― 키에에에엑!!

― 끽, 키익!!

직후에는 비명 소리. 소리는 들려오는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봐도 내 눈엔 아무것도 안 보인다. 뭐 클로킹이라도 켠 거야?

“점장님, 저기에 뭐가 있어요?”

“찬이는 굳이 안 봐도 돼. 쟤네들이 귀엽게 생긴 건 아니거든.”

“허어….”

“이런 대화 하는 게 참 좋기는 한데, 아쉽다. 그치.”

벼락이 한 줄기로 끝이 아니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며 수 초 간격으로 쉴 새 없이 벼락을 쏟아내고 있고, 그 벼락 소리에 맞춰 비명 소리가 연달아 들려오고 있다.

이곳에 한두 놈만 있는 게 아닌 거겠지. 바로 점장에게 말했다.

“마법 쓰는 거 이제 한 번 남으셨죠, 점장님.”

“응. 저 물방울 안에 들어가는 데에 써줄까?”

“아뇨. 제가 못 했을 때, 누나한테 연락하는 용도로 써주세요. 저긴 저 혼자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물방울 안으로 헤엄쳐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라면 써먹을 수 있는 약이 하나 있다. 급속 빙결제.

빙산이 물에 뜨잖은가. 바로 주머니에서 병을 꺼내, 물방울 속에 두 손을 담근 채로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나무의 성장을 빨리감기 하듯 줄기가 하나 피어올랐다. 큰 줄기로부터 얼음으로 된 가지가 뻗어 나가고, 가지 구석구석에서 또 다른 가지들이, 얼어붙은 잎사귀들이 피어올랐다.

병을 쥔 손이 뿌리로 감기듯 얼음에 뒤덮여 보이지도 않게 됐다. 차갑지는 않다. 손에 동상 걸리지만 않게 해달라고 체질에 대고 빌었다.

날 바라보던 점장이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감탄한 듯이 말해왔다.

“찬이, 머리 엄청 잘 돌아간다.”

“제가 남극 배경 다큐를 자주 챙겨봤거든요.”

“다큐를?”

“제 방 TV 망가지기 전에요. 다른 채널 다 지지직거리는데 왠지는 몰라도 거기만 멀쩡하더라고. 여튼….”

몸이 얼음에 이끌려 점차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중 호흡약 약효가 아직 남아있을지를 모르겠다.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점장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잘해 보고 오겠습니다.”

“잘할 거야. 찬이는 나 실망시킨 적 여태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이 말에 대답은 못 했다. 팔부터 시작해 머리, 몸통, 다리.

발끝까지가 마저 잠기고, 이후로는 얼음에 끌려가듯 물방울 속을 헤쳐 나갔다. 심해에 잠수했을 때처럼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다.

온 사방이 일그러져 보였던 탓이다. 날밤 지새워 술 마신 다음 날 아침, 눈 뜨면 내 방이 딱 이렇게 핑핑 돌아가고 있는데 말이다….

멀미가 밀려오는 것도 똑같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픈 것도. 관자놀이에 바늘이 하나씩 박혀가는 기분이다.

이를 악물어봐도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아예 아랫입술을 이빨로 짓이겨 가며, 눈에 있는 대로 힘을 줘 봤다. 내가 잘 가고 있는지만은 알아야 했으니까.

눈에 정신을 집중하자, 어렴풋이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흰 구체 안에 좀 더 작은 검은 구체가 존재하는 무언가가―

“…눈동자?”

눈을 크게 뜬 듯한, 눈동자라고밖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저편에 보였다. 흰자위와 검은자위뿐이지만, 눈의 형태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마력이 한 점에 있는 대로 응축되면 저런 식으로 보이게 되는 듯하다. 아른거리는 수준으로 끝나는 걸 넘어 마력 자체가 아예 형태를 띠는 거지.

크기가 점점 커지는 걸 보면 내가 제대로 끌어당겨지고 있는 게 맞나 보다. 헌데 저 눈동자가 이유는 몰라도 날 노려보고 있다.

한창 즐기고 있는데 니가 무슨 훼방이냐는 의미인지, 단순히 내 피해망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알 게 뭐야. 저렇게 노려보는 시선도 자주 받아봤다.

기술도 뭣도 없는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냐는, 경멸하는 시선들 얘기다. 매번 눈을 내리깔아 피해 온 시선이었으나 이젠 그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난 다시는 이렇게 못 살 줄 알았다.

친구도, 가족도, 지인도 모두 멀어졌고, 사라졌다. 내 세상에서 내가 가진 거라곤 내 몸뚱어리 하나뿐이다.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걸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있으리란 맹신 하나만으로 덮고서 20년을 버텼다.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이 세상에서의 한 달, 제법 좋은 날들이었다.

사소한 일로 수다 떨고, 가끔은 진중한 얘기도 하고, 고민 털어놓거든 들어주고,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늘 이런 삶을 살고 싶었다. 잘 먹고 잘산다는 게 뭔지 이제야 좀 알겠다. 비싼 차를 몰고 다닐 수개월보다, 친한 사람들과 술 한잔하는 1시간이 내겐 더욱 가치 있다.

그러니 못 물러난다. 고작 한 달 만으로는 난 만족 못 해. 보험처리고 나발이고, 여기서 내가 못 빠져나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일만은 무조건 끝내고 만다.

지금. 눈앞의, 이놈을 말이다.

“야.”

끌려오길 수 분. 마침내, 이 빌어 처먹을 것 앞에 왔다. 크기가 내 몸통보다도 크다.

그 눈이 날 노려보고 있다. 바라보며 물었다.

“남의 직장 개판 만들어 보니까 좋냐?”

대답은 없다. 가장자리가 쉴 새 없이 일렁이는 불완전한 눈동자로 날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손을 붙들어 매던 얼음을 털어 낸 뒤, 해류에 몸을 맡겼다.

아까부터 이놈이 날 끌어당기려는 것 같더라고. 허우적댈 일은 없으니 차라리 이게 낫다.

끌려가는 찰나의 순간 동안, 이걸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지를 짧게 고민해봤다. 내 체질은 내가 바라는 대로 따라와 준다고 점장이 말해줬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뿐이다. 눈동자를 발로 디딘 뒤, 손을 뻗었다.

“나 퇴근 좀 하자. 진상 새끼야.”

손바닥이 닿는 순간, 눈동자로부터 온갖 색의 마력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코앞에서 댐이 터진 것만 같다. 내 몸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해야 할 마력이 내게 영향을 주고 있다. 압력.

보이지도 않는 것에 깔려 몸이 뭉개지게 생겼다. 숨을 쉬어보려고 했는데, 폐와 입으로 물이 순식간에 밀려 들어왔다. 이놈이 호흡약 약효마저 전부 지워버린 것 같다.

어떻게 되면 어떻게 해야지― 해뒀던 생각들이 순식간에 증발해갔다. 딱 한 가지 생각만 겨우 붙들어 맸다. 좀 더 확실하게 해야 한다.

티끌 하나도 남겨선 안 된다. 그 생각으로 눈만 질끈 감은 채 되는대로 팔을 뻗었다. 격류 속에서 목이 젖혀지고 허리가 꺾일지언정 뭐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을까. 손에 뭔가가 닿았다. 작고 부드러웠다.

무릎과 발끝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지고, 얼굴 살갗에 서늘한 바람이 닿았다. 잠깐 망설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숨을 쉴 수 있다.

“커헉! 큽, 컥… 커억!”

“수고했어, 찬아.”

곧바로 눈을 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올려다봤는데, 눈앞이 흐릿해서 뭐가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다.

차마 닦을 힘이 없어서, 다시 눈을 질끈 감은 뒤 닥치는 대로 말했다.

“점장님. 제가, 그. 우읍, 잘. 잘한.”

“엄청 잘했어. 지금 온 사방에 물 튀고 있구, 공간 늘어났던 거 다시 쪼그라들려구 하는 중이야.”

“뭐가… 뭐가. 쿨럭, 쪼그라든다고요?”

“공간. 게이트핵 없어졌으니까, 늘어났던 공간도 다시 원래 크기로 수축하는 거지.”

“그게 없어진 거면, 지금 제가 붙잡고 있는 건 뭡니까?”

“내 오른손.”

점장이 날 받아주겠다고 내가 낙하할 곳에 미리 와서 기다려준 것 같다. 내가 운 좋게 원하는 곳에 떨어질 만큼 재수 좋은 놈이 아니니까.

한창 동안 먹은 물 토해내고 눈물 질질 흘리다 보니 겨우 진정이 됐다. 무릎 꿇은 채로 겨우 실눈만 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관이었다.

해저 공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바위 내벽과 바닥은 어느새 흙으로 바뀌어 버렸으며, 물방울은 바닥으로 스며들고 있는 건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이 흙벽이,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우릴 향해 조여오고 있다. 지금 이거 괜찮은 거 맞냐? 맞아?

“찬아. 위에서 조여드는 만큼 밑에서도 똑같이 조여오고 있을 테니까, 여기가 하수도 아주 깊은 지하는 아닐 거야. 그렇지?”

“그렇긴 할 텐데요, 지금은 저희 대화하고 있으면 진짜 큰일 날 상황 아니에요?”

“고민 중이거든. 반경 몇 미터까지 치우는 게 나을지.”

“뭘 치워요?”

“흙 말야. 윤하나 어르신께서 흙더미에 파묻힐 거라는 생각은 안 들지만, 이왕 마법 쓸 거 효율적으로 쓰는 게 낫지.”

뭐가 낫고 안 나은지야 내가 아는 게 없어서 모르겠다만, 하나는 알고 있다. 점장이 쓸 수 있는 마법 횟수가 딱 한 번 남았다는 것. 그것도 센 마법은 아니다.

그걸로 날려 봐야 몇 미터가 날아가겠는가. 반쯤 회의적이었으나, 좀 더 생각해보니 아귀가 안 맞는 점도 똑같이 떠올랐다. 진짜 남은 횟수가 몇 번이지?

“점장님. 아까 내려오기 전에 횟수를 허락받은 게 10번이라 하셨었죠.”

“응. 맞아.”

“그리고 지금까지 쓰신 건 8번이고요. 맞죠.”

“내려오기 전에 두 번, 잠수하기 전에 세 번, 내려오면서 한 번, 해저 공동에서 두 번… 응. 여덟 번. 맞아, 찬아.”

“그럼 두 번 남은 거잖습니까. 한 번이 아니고.”

더해서 점장이 마법을 쓸 때의 준비동작이 오른손 손가락을 튕기는 건데, 지금 그 오른손을 내가 꽉 쥐고 있다.

일단 이 손부터 놓고 보자. 힘을 풀려고 했으나 점장이 역으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며 내 물음에 대답하는 점장.

“그 한 번은 아예 없는 셈 치려구 했어.”

“굳이요?”

“엄청 위급한 상황에서 비상용으로 쓰려고 했던 거거든. 꽤 센 마법이라, 쓰는 방식도 살짝 다르구.”

“많이 복잡해요? 오래 걸린다거나?”

흙벽이 코앞까지 다가와서 하는 말이다. 이러다 진짜 깔려 죽게 생겼다. 지금 장례식 스킵하고 땅에 파묻히게 생겼다니까?

묻자, 점장이 느릿느릿 고개를 젓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전혀. 소리만 약간 더 크게 내면 돼.”

“예?”

“나 사실 왼손잡이거든. 찬아.”

말하며 왼손을 치켜든 뒤, 엄지와 중지를 두어 번 맞대고는 마저 말해왔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딱 튕기는 점장.

여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맑고 청아한 소리에 뒤이어, 사방에 가득했던 흙들이 말 그대로 ‘사라졌다.’

구시대의 표현을 쓰자면, 뿅― 하고 사라져버렸단 얘기다. 효과음은 점장이 손가락 튕기며 낸 게 전부였고, 공간이 수축하며 간간이 떨어져 내리던 흙먼지들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남은 흙들은 칼로 도려낸 듯 깔끔하다. 그나마 남은 천장도, 바닥도, 좌우 2m 너비로 남은 벽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흙이 사라진 곳들 중 한 군데. 여기서 십수 미터가량 떨어진 위치에 누나와 멍멍이, 어르신이 계신 게 보였다.

멍멍이와 누나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반면, 어르신께서는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막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형세였다. 그러다 이쪽을 보시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오셨다.

“일이 잘 풀렸나 보군요. 두 분 다.”

“그럭저럭요.”

“예, 그럭저럭. 그나저나 어르신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누나랑 멍멍이는요?”

“윤하 양은 잠깐 쉬는 중입니다. 멍멍이 소년은 계속 잠들어 있는 중이고요.”

저 녀석이 소년이라신다. 누나한테 저 녀석이 두 살배기라는 걸 들으셨나 보다.

누나는 이 판국에 쉴 마음이 드냐는 생각이었는데, 계속 귀 기울이고 있자니 누나가 간간이 앓는 소리를 내는 게 들려왔다.

“죽겠다….”

“윤하야. 우리 다 끝났으니까, 이제 돌아가면 될 것 같아.”

“응. 고생했어, 언니. 이찬 너도 특히.”

“매장 돌아가야 고생 다 한 거지, 누나. 이제 우리 어떻게 돌아감?”

다들 파묻히는 일 없이 안전해 뵈니 나도 긴장이 풀린다.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묻자, 누나가 손만 들어 휘휘적거렸다.

“내가 천장 뚫어줄 테니까 조금만 있어 봐. 이찬 니는 안 힘들어?”

“힘들어 죽겠어.”

“그럼 5분만 쉬고 나가자고. 이게 얼마 만에 등 붙이고 누워보는 건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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