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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편돌이-152화 (153/201)

152화.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4)

* * *

내 말을 들은 점장이 잠시 생각하다, 역으로 질문을 해왔다.

“찬이, 언제부터 이사 올 생각 했었어?”

“며칠 안 됐어요. 솔직히 충동적이라는 얘기 들어도 할 말 없긴 한데….”

점장 눈에는 확실히 충동적으로 보이겠다 싶었다. 첫 월급 두둑하게 받은 놈이, ‘나 돈도 많은데 원룸이나 좀 제대로 된 곳으로 구해 볼까?’라며 호기를 부리면 딱 이 꼴이잖아.

“충동적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냥… 음….”

“네.”

“언제부터, 어쩌다 이 세상에서 살 생각을 하게 됐나― 그게 궁금해서.”

별로 오래되진 않았다. 근데, 이건 전에 한번 얘기를 하지 않았나?

아니다. 얘기 안 했네. 이것부터 말해야겠다.

“꽤 괜찮은 곳 같아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요.”

“어떤 점이?”

“그러니까, 며칠 전에….”

호텔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테이프로 둘둘 말린 잠자리채를 어깨에 멘 채, 또박또박 말대꾸하던 그 녀석.

그 녀석이랑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은 대화를 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솔직히 무섭다. 그럼에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또….

네 존재 자체가 내게는 마법이고 기적이었다, 내가 늘 실패만 해온 놈이라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걸 말했을 때, 그 녀석이 나 하기 나름이라고 말해주더라.

“그 대화를 끝으로 헤어졌습니다. 빨리 안 가면 숙제 밀린다면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예. 좋은 경험이었어요. 걔랑 얘기하고, 하수도 내려갔다 오고 나서야 그나마 확신이 생기더라고요.”

두 세상을 오가며 살아가는 이 순간. 내 평생 다신 이럴 기회 없을 거다.

여기서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지 않으면, 여길 떠나거든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할 거다. 그때 그렇게 할걸, 그때 좀 더 이것저것 해 볼걸, 이러면서 말야.

“어차피 여기서 계속 일할 거, 좀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 라는 생각입니다. 점장님께서는 좀 부정적이십니까?”

“전혀. 그것보단, 다 듣고 나서 떠오른 건데….”

“예.”

“찬이가 이런 얘기 해 준 건 오늘이 거의 처음인 것 같아.”

듣고 보니 그렇네. 점장한테 세상 돌아가는 얘기는 많이 했어도, 정작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얘기한 기억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회사에서 무슨 일 했는지나, 엿같은 세상이어도 돌아가긴 해야 한다는 것 정도. 점장이 벽걸이 시계를 힐끗 바라보고는 포근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중에 이런 얘기 또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찬이 집 구하고 나면 말야.”

“저 사는 세상 집 오고 싶어 하셨던 거 아니셨어요?”

“그냥 찬이 집에 뭐뭐 있나 궁금해서.”

“굳이?”

“집에 안 쓰는 가전제품들 있으니까, 찬이한테 없는 거 있으면 주려구 했었어.”

이건 제법 솔깃한 내용이다. 집 밥솥이 잘 돌아가기는 해도, 막상 밥 지어 놓고 보면 색이 누리끼리한 게 좀 그렇긴 했어.

“어… 밥솥은 옛날에 버려서 없는데.”

“아이고.”

“그래도 다른 건 많으니까, 나중에 한번 보여줄게.”

운 좋게도 텅텅 빈 집에 밥솥 하나만 덩그러니 놓일 일은 없을 것 같다. 여하튼, 내가 이세계에서 어떤 집에 살아야 하는가. 흠….

“무조건 싼 곳이요. 바퀴벌레 나와도 상관없고.”

“그건 싫어. 내가 못 놀러 가잖아. 다른 건?”

가격 외에 고려하는 조건은 두 가지 있다. 편의점에서 30분 이상 걸리지 않고, 덜 소란스러운 곳. 진상한테 시달리는 건 편의점 한 곳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가까운 곳까지는 힘들 거야. 이 주변 집값이 좀 비싸거든.”

“그럴 것 같습니다. 요 앞에 지하철역도 있고.”

“응. 그래도 최근 며칠은 게이트로 난리가 났었으니까, 싸게 들어가려면 들어갈 곳이 있긴 할 텐데….”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드리는 점장. 뜬금없는 질문일 텐데도 함께 고민해 주는 게 괜히 미안해진다. 슬쩍 말해 봤다.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저도 따로 알아보든지 하겠습니다. 알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단골손님분들께 여쭤보게?”

“네. 누나한테나 엘레나 양한테나, 아니면 차라리….”

어플 깔아서 주변 집을 이 잡듯 뒤져보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하는 도중, 거리 코앞에서 자동차 배기음이 들려왔다. 배기음이 꽤 고급지다.

밖을 바라보니, 생긴 것만 봐도 집 한 채 값은 나갈 듯한 디자인의 차 한 대가 갓길에 막 주차를 하는 참이었다. 이 거리에서 볼 일이 없어야 정상인 디자인인데, 왜 낯이 익은 것 같냐?

잠시 후, 전조등이 꺼지고 내린 운전자도 마찬가지로 낯이 익은 양반이었다. 데카드, 뱀파이어 교수 양반.

늘 그렇듯 핏기 없는 얼굴로 정문을 열고 들어와, 넥타이를 고쳐 매고는 나를, 다음에는 점장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이 양반이 이 시간에 여긴 또 왜 왔대.

“안녕하세요, 교수님.”

팔짱을 푼 점장이 교수한테 꾸벅 인사한다. 인사하는 동안에도 시선을 계속 고정하던 교수가 마찬가지로 고개를 깊게 숙여 받아주더라.

“예. 안녕하셨습니까, 업주님.”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다. 고개 숙일 일이라고는 구두끈 고쳐 매는 것 말고는 없을 양반이 점장한테는 왜 저렇게 격식을 차려?

잠깐 이유를 생각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점장에게 또 말을 걸었다.

“혹시 제가 얘기하시는 도중에 끼어든 겁니까?”

“아녜요. 찬이가 살 집 구한다구 해서, 같이 머리 맞대고 있던 중.”

“집?”

“저 교수님, 이 시간에 여긴 무슨 일로….”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끼어들었다. 이사를 오니 마니 얘기했다간 그동안 어디서 살았는지에 대한 주제까지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이걸 묻자, 교수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어왔다.

“어제 말했잖습니까, 오늘 중에 찾아올 거라고. 제가 잘못 기억하는 겁니까?”

“어… 그런 얘기를 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길지는 않습니다. 잠깐 괜찮겠습니까.”

이건 내가 아니라 점장을 보고 묻더라. 대신 내가 대답했다.

“얘기 좀 하고 들어오겠습니다, 점장님.”

“응. 커피라도 한잔 타줄까?”

“괜찮아요. 잠깐이라는데 뭐.”

이후, 고갯짓하며 밖으로 교수를 따라 나왔다.

빗물이 아직 덜 빠져서 그런가, 6월 초가 됐음에도 밖이 제법 쌀쌀하다. 출근길에 걸었던 내 세상 거리는 6월 날씨 그 자체였는데.

주머니에 손 집어넣은 채로 잠시 기다리자, 교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마법청에 남겼다는 연락.”

“예.”

“연락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단순히 제 명의를 빌린 수준이 아니라, 아예 제 명의로 게이트핵의 발견 및 소멸까지를 전부 언급했더군요.”

“어…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연락이 온 시점에, 저는 이 거리의 반대편에서 다른 반마법사들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왜 하는 건지를 잠깐 생각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연락한 것 때문에 이 양반이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게 됐다는 얘기인가?

“다들 묻더군요. 대책위원회 고문으로서 사태를 수습하는 동시에, 어떻게 게이트핵을 발견하고 소멸시킨 거냐고.”

“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알아서 했다고 했습니다. 일단은요.”

어떻게 생각해 봐도 도저히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가 없어서,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으로 둘러댔다는 얘기였다. 실리 따지는 양반이 할 만한 얘기는 아니다.

그래서인가, 무미건조한 말투에 묘하게 뼈가 실린 것처럼 들린다. 이 양반이 이걸 빌미로 날 멕이려고 찾아온 거구만….

“그 얘기 하러 오신 거면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래도 그땐 별수가 없었―”

“몸은 어떻습니까.”

“…예?”

“당신 건강 말입니다.”

이건 전혀 생각 못 했던 질문이다. 게이트핵 없애기 전에 통화할 때만 해도, 밤샌 편돌이 붙들어 매고는 자기 할 말 고스란히 다 늘어놓던 양반이 말야.

“별 이상 없습니다. 근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예요?”

“어제 낮에 통화한 내용. 저는 당신이 게이트핵을 직접 건드려, 인위적으로 소멸시켰다는 얘기로 이해했습니다. 맞습니까.”

“그게, 그러니까….”

고민하다, 전에 했던 얘기를 좀 더 상세히 풀어 말해줬다. 장비 없이 하수도 심해탐사 좀 하고, 문어밥이 될 뻔하기도 했고, 눈에 주먹질도 좀 하고 왔다.

“눈?”

“제가 보기엔 그게 눈동자처럼 보이더라고요. 이것도 확인차 물으시는 건가?”

“사수로서 당신이 작업 도중 신체에 변화가 있었거나, 후유증이 남았는지를 파악하고 보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렇지. 나는 전화기 너머로 느닷없이 박수를 치고 그러길래, 이 양반이 그사이에 심경의 변화라도 겪은 줄 알았다.

“당장 몸에 이상이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병원에서 따로 검진받으십시오. 당신이 받을 수 있는 혜택 중 하나니까.”

“…예.”

대답은 했지만, 이 세상에서 건강검진을 받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 몸뚱어리에 마력이 한 방울도 없잖은가.

이 몸뚱어리를 갖고 병원에서 X―ray를 찍으면 어떻게 되겠냐고. ‘이놈 몸에 뼈도 장기도 아무것도 없는데?’ 하며 리빙 깡통 취급받지 않을까?

이걸 생각하고 나니, 이 세상에 집 구하고 살아갈 내 미래가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길 가다 오토바이에 치이기라도 하면 난 어딜 찾아가야 하는 거냐. 접골원?

“제가 할 말은 다 했고, 이제 당신 의견만 들으면 됩니다.”

“어떤 거요.”

“이 건을 수정사항 없이 그대로 보고할지를 묻고 있는 겁니다. 이대로 보고가 올라간다면, 당신 공이 지극히 줄어들 테니….”

“그냥 그렇게 해 주십쇼.”

바로 대답하자, 잠시 말이 없던 교수가 확인차 물었다.

“확실합니까?”

“예. 그게 편해요.”

이건 마음 바꿀 생각 없다. 난 내가 어떻게 했는지도 모를 일들로 다른 양반들 입에 오르내려지는 것도 싫고, 대답하지도 못할 질문을 받는 것도 싫다.

이걸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면 난 할 말이 없으니까. 이게 나 혼자 한 일도 아니고, 기껏해야 막타 친 게 전부일 뿐이기도 하고….

그래도 바라는 건 있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조작한 뒤, 교수에게 불 켜진 화면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좀 어떻게 해 주십쇼.”

“뭡니까?”

“들어간 예산이요. 전문가분들한테 자문이나 도움받은 게 좀 있는데, 그분들 요구사항 적어 놓은 겁니다.”

말하자, 교수가 폰을 받아 들고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어이없다는 어조로 내게 물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과자, 햄버거, 건강검진….”

“그분들 요구사항이 실제로 그랬습니다. 전 받아 적기만 했어요.”

“그럼 이 요강이라 적힌 것도 그대로 예산에 포함하라는 말입니까?”

“그건 무시하셔도 돼요. 지우는 걸 까먹었네.”

교수가 이놈은 대체 뭔 짓거릴 한 거냐는 표정이 되긴 했으나, 다행히도 더 묻지는 않았다. 내게 다시 폰을 돌려주고는 자기 폰을 꺼내 뭔가를 입력하는 교수.

몇 문장가량을 입력한 뒤,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슥슥 스크롤하며 다시 말을 시작했다.

“조만간 이 편의점에 택배로 전달될 거고, 햄버거는… 계좌에 비용을 따로 입금할 테니, 알아서 주문해 드십시오.”

“그게 차라리 낫네요. 식으면 맛없잖어.”

“당장 용건은 이걸로 끝이고, 차후에 알아야 할 내용이 있거든 따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예?”

“살 만한 곳을 찾고 있다면, 마침 당신에게 딱 좋은 곳이 있습니다.”

이러고는 자기 폰 화면을 내게 보이는데, 어느 숙소의 내부를 촬영한 듯한 사진들이 주륵 늘어서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원목 재질의 가구, 모니터.

외에 베란다가 찍힌 사진은 뒤편의 전망이 인상적이었으며, 양옆으로는 건조기와 세탁기까지 쌍으로 구비되어 있다. 심지어 투룸이야.

“여기 도심지 안쪽에 있는 거예요? 겁나 비싸 보이는데.”

“당신 자격증을 보증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월세는 나라에서 따로 부담되고요.”

자격증 내밀기만 하면 무월세로 들어갈 수 있다고? 무슨 도원경 같은 곳인가?

“와 씨, 여기 어디예요?”

“아카데미 내의 조교 기숙사입니다.”

“…….”

“최소 계약기간은 3개월. 생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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