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6)
* * *
하나가 이틀 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왔다. 노란색 우비와 장화, 손에는 접이식 우산. 달라진 점이라면 우비 위로 빨간 책가방을 메고 왔다는 점 정도.
정문 앞에 서서는 매장 안을 기웃거리는데, 매장 안에 손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모양새였다. 바로 권했다.
“얼른 들어와. 밖에 비 와서 춥지 않냐?”
“그게여. 잠깐만여….”
우비 후드를 벗고는 자기 몸 구석구석을 둘러본 뒤, 다리를 뒤로 들어 장화 밑창을 내려다본다. 진흙이 꽤 많이 묻어있다.
정문 앞 한 칸 계단에 발뒤꿈치를 툭툭 부딪힌 뒤, 발판 매트에 올라서서 정성스럽게 밑창을 비벼 남은 진흙을 털어냈다.
그러고 나서야 매장 안으로 들어왔는데, 진흙 부스러기가 약간 남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깔끔했다. 카운터 앞으로 걸어와서는 자기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하나.
잠시 후,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뜸 사과를 해왔다.
“제송해여, 바닥 더러어지게 해갖구….”
“안 그래도 한번 치우려고 했다. 신경 안 써도 돼.”
7살 꼬맹이 발자국 여덟 개 정도야 백 번도 더 치울 수 있다. 뿔 피해 가며 머리를 북북 쓰다듬은 뒤, 카운터 의자에 하나를 앉혀놓고 물었다.
“요 며칠 엄마랑 어디 가 있는다고 하지 않았어? 도시 위험하다면서.”
실제로 위험한 게 맞기도 했고. 이 녀석이 비 잔뜩 내릴 때 매장에 있었어 봐, 빗물 위로 뿔 두 개만 튀어나와서 돌아다니고 있었을 거 아냐?
여기는 딱 비만 잔뜩 내리고 끝났지만,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고 말이다. 은행나무가 ‘우리는 가로수가 되지 않는다!’라며 거리로 나와 집단시위를 해대던 영상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엄마 따라서 외갓집에라도 날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던 참이라, 이 녀석이 찾아온 게 솔직히 의외였다. 내 물음에, 하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는 답해왔다.
“엄마야께서여, 낮에 티브이 보시고는 갠찬을 거라 하셔갖구.”
“아. 그래?”
“내. 엄마야 등에 타구 있었는대….”
유치원 숙제랑 장난감들 바리바리 싸 들고 엄마 등에 올라타 있던 도중, 뉴스 보시고는 ‘안 가도 되겠다’라며 인간 외형으로 되돌아왔다고.
핵을 없애고 온 시점과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덕분에 집으로 다시 들어가, 못 했던 숙제를 다 끝낼 수 있었다고.
“어제 일기를 못 썼거든여.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해써.”
“그렇게 얘기하니까 보람이 느껴지긴 한다, 하나야.”
“보람여?”
“어… 별 얘기는 아냐.”
이 녀석한테 하수도에서 있었던 일은 따로 말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진짜로 큰일 날 뻔했다며 울 거 아냐. 바로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께서 많이 크시냐?”
“어어―엄청 크셔여. 짝을 때는 짝으시구.”
앉은 채로 두 팔을 활짝 벌리고는 내 눈치를 본 뒤,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듯 손끝과 꼬리까지 바들바들 떨어가며 뻗을 수 있는 건 죄다 뻗어댔다.
이것만으로는 전혀 추정이 안 되긴 했지만, 아무튼 크다는 느낌만은 잘 전달됐다. 평소에는 이 녀석처럼 사람 비슷한 외형으로 변신해서 생활하는 것 같고….
“날아갈 준비를 어디서 했는데?”
“저이 집 마당애서여.”
이 녀석 집 마당도 팔 꼬리를 쭉 뻗을 만큼 큰 것 같고. 마당에 헬기 이착륙장 비스무리한 거라도 있나? 이니셜은 H 대신에 D라고 적혀있고 말야.
상상하던 도중, 하나가 날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멈췄다. 내려다보니 등에 메고 있던 책가방을 품에 안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잠깐만 기다려 보라 하고는 빨간 책가방을 주섬주섬 뒤져댄다. 잠시 후에 꺼낸 게, 반창고 곽이었다.
“웬 반창고냐?”
“아조씨께서여, 전에 반창꼬 붙여주신 거.”
“허어….”
어렴풋이 기억이 나긴 한다. 핵심 게이트 찾는 걸 도와줬던 그날, 이 녀석이 빗물을 헤쳐 오다 넘어졌는지 무릎이 까진 채였다.
거기에 반창고 붙여준 뒤, 헤어질 때는 한눈팔지 말라며 주의도 줘서 보냈었다. 반창고 곽을 내게 내밀며 말해오는 하나.
“그래갖구, 500원씩 모아서 용돈으로 샀서.”
우리 매장에 이 반창고와 똑같은 게 있다. 방수되는 반창고에 10개입이 2,500원. 이 녀석이 5일 치 용돈을 이 반창고 사는 데에 썼다는 뜻이다.
“하나야. 이건 너무 많은데….”
“아녜여. 엄마야가, 도와준 분한테는 학씰하게… 학씰? 확실?”
“방금 제대로 발음했네. 그런데, 뭐? 어머니께서?”
살짝 귀에 밟히는 말이다. 묻자, 하나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마저 말을 이었다.
“내. 엄마야가 물어보셨거든여. 반창꼬 어디서 누가 붙여 줬냐구.”
등골이 살짝 서늘해지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 엄마가, 자기 딸이 29살 먹은 인간 편돌이랑 만나 노닥거린다는 걸 눈치를 챘다는 말인가?
“그… 너희 어머니께서는 뭐라고 하시든?”
최대한 진정한 뒤 물었다. 애한테 과자 사 주고, 친구 좀 사귀게 해 주고, 반창고 붙여서 보내 준 게 잘못한 짓은 아니잖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말야.
하지만 애 엄마 주관이 어떤지를 전혀 모르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마찬가지로 짐작이 안 된다. 내 질문에, 하나가 애매모호한 대답을 해왔다.
“길에서 만난 착한 아조씨가 붙여 주셨따구 했써여. 어어어―엄청 착한 아조씨.”
“길에서 만났다고 했다고?”
“내.”
내가 따로 부탁을 한 기억은 없다. 대체 어떻게?
이게 의아했으나, 하나가 약간 시무룩한 표정이 돼서는 먼저 말해왔다.
“엄마야, 저어가 회사 밖에서 노는 거 별로 안 조아하시거든여….”
“아하….”
“그래갖구, 여기 얘기하면 다음부터는 여기 오지 말라구 하실 꺼 같아갖구. 말 안 햇서.”
하나가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조숙한 면이 있다. 지하창고 내려가서도 이것저것 갖고 놀고 싶은 걸 꾹 참는다든가, 방금처럼 발에 진흙 털고 들어오는 거라든가.
엄마가 반창고에 대해 물었을 때, 이 조숙함 주사위 눈이 6이 나와버린 모양이다. 말만 들어보면, 내 이름이나 편의점 얘기는 따로 안 한 듯하지만….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하나가 한 말을 받아 물었다.
“어머니께서 네가 밖에 나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내. 쫌 만이.”
“그건 이해가 된다. 네가 밖에서 나쁜 어른 만나면 어쩌나, 충분히 걱정하실 수도 있지.”
“그치만… 아조씨는 나쁜 어른 아닌대….”
“네 어머니는 날 만난 적이 없잖냐. 그러니까 나중에 집에 가면, 어머니한테 여기 온다는 얘기 정도는 해 봐.”
어차피 애 엄마가 날 아는 건 시간문제다. 비 잔뜩 오는 날 길에서 우연히 착한 아저씨를 마주치고, 그 아저씨가 방수 반창고 붙여주는 일이 흔하진 않으니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며 몇 번을 더 물어볼 게 뻔한데, 그때마다 혀 짧은 말로 서투르게 변명하도록 시키고 싶지도 않다. 애가 편하다니까 놀러 오라고 하는 거지, 힘든 행위가 되면 의미도 없어지는 거잖아.
“그래두 댈까여?”
“걱정 마라. 내가 말 잘해 볼게.”
얘 엄마가 어떤 드래곤인지 알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회사 다니는 커리어우먼이라 했으니, 말을 잘해 보면 그럭저럭 통하기는 하지 않을까.
“…그런데 하나야. 오늘은 어머니 어디 계시냐. 일하고 계셔?”
“내. 며칠 일이 밀리셔갖구, 밤늦게까지 일한다 하셨써.”
“오늘 유치원은 쉬는 거고?”
“내.”
책가방은 반창고 챙겨오려고 그냥 메고 온 모양이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9시 30분.
“오늘은 언제까지 있다 갈래.”
“에… 아조씨 집에 갈 때까지?”
“나 오늘은 집에 좀 늦게 들어가. 해야 할 일이 좀 있다.”
“내?”
“이사 갈 생각이거든. 원래 살던 집에서.”
말하자, 하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서는 말이 없어졌다. 얘는 또 왜, 아니. 아니지.
“…아조씨, 멀리 가시는 거애여…?”
“아냐, 멀리 안 가. 가까워. 여기서 3, 40분 정도?”
“…정말여?”
“어. 진짜야. 매일 이 시간에 똑같이 여기 있을 거고.”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다시 표정이 해맑아진다. 하긴, 어린 애들은 이사 간다 하면 다시 못 볼 것부터 생각하게 되니까….
의자 밑바닥까지 축 처졌던 꼬리를 치켜들고는, 날 올려다보며 묻는 하나.
“이사는 어디루 가시는 거애여?”
“학원지구 쪽.”
새벽 근무하는 동안, 집 찾는 어플로 매장 근처에 마땅한 집이 있는지를 찾아봤었다. 이 근처는 당장 비어있는 집이 하나도 없더라.
차선책으로 점장이 권유해줬던 학원지구 근처 집을 찾아보니, 이곳은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곳에 집이 꽤 많았었다.
물론 바로 연락하지는 않았다. 가격만 보고 냅다 들어갈 게 아니라, 구할 집 주변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조금이나마 확인해두고 싶어서였다.
거길 가 본 게 딱 두 번, 자격증 시험 치를 때 아주 잠깐뿐이었으니까. 앞으로 몇 달 살아야 할 곳인 만큼, 최대한 학생들 몰려 떠도는 곳이라도 피해 보자는 생각이다.
“오늘은 거기 잠깐 둘러보다 들어갈 거야. 급한 것도 아니니까, 너 있고 싶은 만큼 있다 가. 언제까지 있다 갈래?”
“에….”
묻자, 또다시 자기 책가방 안을 주섬주섬 뒤지고는 무언가를 꺼내는 하나. 이번에는 곽에 담긴 초콜릿이었고, 겉 포장지가 꽤나 고급져 보였다.
“이거여. 엄마야가 저 먹으라구 집에 두신 건대여….”
“어.”
“아조씨랑 언니야랑 같이 먹구 시퍼여. 언니야, 저랑 만이 놀아 주셨으니깐.”
지하창고를 같이 내려갔다 온 덕인지, 점장도 이젠 만나면 반가운 대상으로 기억이 된 것 같다. 그렇다 하니 그렇게 해주지, 뭐.
“그럼 점장님 오시는 동안, 우리끼리 과자라도 먹고 있자. 어떠냐.”
“내!”
하여 진열대에서 과자를 하나씩 골라왔고, 봉지 과자 뜯는 건 내가 했다. 어린 애들은 과자봉지 뜯는다 하면 늘 끄트머리부터 뜯잖는가.
이러면 바닥에 놓고 먹기가 힘들어진다. 과자봉지 가운데를 잡아 벌려 뜯자, 하나가 신기하다는 듯이 봉지와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우아. 어떻게 하신 거애여?”
나도 어렸을 적에 또래 애가 이걸 했을 때, 이 녀석과 똑같은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있긴 하다. 뜯은 봉지를 내려놓은 뒤, 다른 봉지를 하나 눈앞에 내밀어 보였다.
“이게 힘보다는 요령이야. 여기, 봉투 가운데 부분 있잖냐.”
“내.”
“여기가 핵심이야. 이 부분 양쪽을 손가락으로 최대한 바싹 움켜잡고, 당기면―”
* * *
30분가량이 지나 점장이 출근했고, 우리 둘을 보고는 바로 손바닥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찬아, 하이. 하나도 오랜―”
까지를 말하다가 말과 손을 동시에 멈추고는, 코를 킁킁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웬 과자 냄새?”
하나 녀석한테 과자 뜯는 법 알려주겠다고 과자봉지를 여덟 개쯤 뜯었다.
첫 두 개는 하나가 직접 뜯어보겠다고 잡았는데, 용 발톱에 봉투가 닿는 족족 다 찢어지더란다. 하도 시무룩해하길래, 눈에 익을 만큼 보여 주겠답시고 뜯다 보니 이렇게 됐다.
30분 동안 꾸역꾸역 먹어도 도저히 줄지를 않아서 밖에서는 안 보이도록 계산대 밑에 죄다 짱박아 뒀고. 카운터 안으로 들어온 점장이, 계산대 밑을 들여다보고는 이제야 무슨 일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더라.
“둘이 많이 배고팠나 보네.”
“아녀? 배는 안 고팠는대!”
“그게, 오랜만에 과자가 땡기더라고요. 좀 드실래요?”
묻자, 점장이 픽 웃고는 계산대 밑의 과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난 이 바나나 맛 과자가 좋더라구.”
“그거 맛있죠. 부스러기가 좀 많기는 해도.”
하여 점장과 하나는 계산대 안에 앉아 과자 집어 먹고, 난 서서 간간이 다 먹은 과자봉지들을 정리했다. 동시에 인수인계.
“특별히 별일은 없었고… 손님이 많지는 않았었습니다. 점장님.”
“별로 안 오셨다구?”
“네. 저희 어제 근무 교대한 직후부터 아침까지도 없었고, 출근 시간대 돼서야 잠깐 몰리고 말았습니다.”
점장은 매장 매출이 곧 정상화될 거라고 예상했었다. 생각과는 달리 흘러가는 게 찜찜한지, 팔짱 끼고는 POS기에 적힌 매출을 뚫어져라 바라만 보더라고.
야간 근무 동안 매출이 22만 원이 좀 안 됐고, 이중 2만 원은 내가 방금 과자 사서 올렸다. 한참 뒤에 팔짱을 뗀 점장이, 날 바라보며 말해왔다.
“찬아. 오늘 매출을 다 보고 나서 결정할 부분이기는 하지만….”
스스로도 긴가민가한 부분인지 말을 아끼는 느낌이다. 재촉하면 안 될 내용 같아 가만히 기다렸더니, 점장이 느닷없이 이런 말을 해왔다.
“우리, 아예 이사를 갈까?”
“네?”
“매장 말야. 아예 한 몇 주쯤, 학원지구 쪽에 공간이동해서 영업할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