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167화 (168/201)

167화. 예상과는 정반대로 (5)

* * *

내 부탁에 누나가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부탁은 들어줬다.

“이 짜식이, 감히 A급 헌터 쉬는 날에 사료 심부름을 시켜?”

“그럼 다른 A급 헌터 양반들은 쉬는 날에 뭐 하는데?”

“집에서 게임하다 잔소리 듣지. 멍멍아, 너도 같이 갔다 올래?”

“그러겠소이다, 윤하 아가씨. 아무래도 털을 좀 말려야 할 것 같소.”

말하고는 둘이서 밖으로 나가버렸고, 집 안에는 나와 추정 3~4개월생 투명 새끼고양이, 멈출 기미를 안 보이는 화재감지형 스프링클러가 남았다. 저건 또 어떻게 멈춰야 되냐….

고민하다, 체질을 풀고 고양이를 들어 올려 스프링클러에 가까이 대 봤다.

“야. 니가 틀었으니까 니가 좀 꺼 봐라.”

“냐아아앙!!”

물줄기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쳐 형태를 만드는데, 생긴 게 딱 고양이 형태다.

“하아악, 우냐아옹!!”

일반적인 고양이한테는 이 짓을 하면 안 된다. 귀에 들어간 물이 염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 녀석은 매―직 캣이잖아?

그러니 귀에 물 들어가는 것도 알아서 마법으로 막겠지. 이 녀석이 물이 어지간히도 싫은 건지, 발버둥 치는 게 예사롭지가 않다.

얼마나 예사롭지 않았냐면, 내 손 주변에 물이 차단되는 반투명한 막 같은 걸 만들어 버릴 정도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스프링클러의 물줄기도 점차 잦아들다 멈춰 버렸다.

이제 이 녀석 다루는 요령이 파악된다. 반투명한 막에 대고 말을 걸어봤다.

“자기가 싫은 짓은 남한테도 하는 거 아냐, 인마. 알았냐.”

“냐앙….”

잘 알았댄다. 이후에는 싱크대, 세면대, 샤워기 수도꼭지에 똑같은 짓을 시도해 봤고, 잘 풀렸다. 마지막으로는 가스 배관.

가스가 어디서 새고 있나 확인해 봤는데, 가스밸브 호스 중 한 곳에 바늘로 찌른 듯한 크기의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이 녀석이 마법으로 장난치다 낸 건가 보다.

이것도 고양이 녀석 얼굴을 들이밀어 해결했는데, 하악질 소리와 동시에 뚫려 있던 구멍 주변의 피복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모여든 피복이 구멍을 덮고는 깔끔하게 메워졌다.

이걸 보며 생각을 좀 해 봤다. 이놈이 그간 찾아온 세입자며, 인부며 죄다 내쫓았다고 했었다. 과정은 방금 내가 겪은 것과 비슷했을 거고.

바닥이나 벽지에 물 자국이나 곰팡이가 남아 있는 게 정상일 텐데, 그런 걸 전혀 못 봤단 말이다. 집주인이 물이 차는 족족 치운 게 아니라면….

“야. 너 바닥에 물도 치울 수 있냐?”

“…….”

이젠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아니면 지친 거든가.

목덜미를 잡은 채로 바닥에 내려놔 봤는데, 발에 물이 닿아 놀란 건지 철썩 소리와 함께 작게 파문이 일었다.

이후엔 물이 썰물마냥 화장실 쪽으로 일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장판 틈새와 벽지, 싱크대 밑까지 차 있던 물도 전부.

순식간에 집 내부가 뽀송뽀송해졌다. 물기가 싹 사라진 베란다 틈새를 바라보던 도중, 다시 현관이 열리고 누나와 멍멍이가 들어왔다.

멍멍이는 들어오자마자 몸부터 털어댔고, 누나는 한 손에는 폰, 한 손에는 봉투를 들고 왔다. 들어오자마자 집 내부를 확인하고는 눈을 약간 크게 뜨는 누나.

“뭐야. 그사이에 집 청소를 다 했어?”

“얘가 뺐음. 겸사겸사 가스 배관도 틀어막았고.”

“진짜? 그 고양이는 치우랬다고 그걸 또 치워?”

고양이가 반려동물들 중에는 무척 깔끔한 편에 속한다. 화장실 쓰고 나면 자기 발도 털고 나오고, 하루의 1/4은 자기 털 그루밍하고.

이 마법이 그 성향의 연장선이 아닐까 싶긴 한데,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더니 누나가 폰을 집어넣고는 봉투를 내 코앞에 툭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한테 고양이 얘기 했는데, 사료만 갖고 되겠냐면서 이것저것 챙겨줬어.”

“점장님께서? 점장님 고양이 길러보셨대?”

“언니 말고 언니 지인. 안에 밥그릇이랑 생수랑 간식 넣어 왔다. 돌아와서는 집 치우는 것 좀 도와주려고 했는데….”

“뭐야. 가려고?”

“집 가서 좀 씻게. 모처럼 쉬는 날인데 생쥐 꼴로 다니긴 좀 그래.”

말하며 멍멍이를 안아 드는 누나. 이제 막 몸을 다 턴 멍멍이가 집을 보며 눈을 끔벅이는 사이, 멍멍이 머릴 슬슬 쓰다듬으며 물었다.

“멍멍아. 내친김에 너도 가서 좀 씻자.”

“아니, 집이 어느새… 방금 무어라 하셨소, 윤하 아가씨?”

“같이 씻자고. 너 홀딱 젖어서 그런지 냄새 엄청 나, 지금.”

“…그.”

멍멍이가 씻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다. 가출하기 전에 살던 집에서 자길 씻길 때, 빨래판에 대고 비눗기를 빼듯 세탁질을 당했기 때문이다.

날 바라보는 게 누나를 좀 말려달라는 눈빛이길래, 적당히 받아 줬다.

“매장에서 애견 샴푸 하나 사 가, 누나. 비누로 씻기면 걔 피부병 걸려.”

“아니 되오, 사장님…!”

“그것도 몰랐네. 너 전에 애완동물 키워 본 적 있어?”

“그건 아닌데, 펫샵에서 알바해 봤었어. 나중에 톡 줘, 누나.”

“오냐. 가자, 멍멍아.”

이 대화 후에 누나가 바닥에 바싹 엎드린 멍멍이를 들어서는 나가버렸고, 이젠 정말 우리 둘만 남았다. 십 분 넘게 목덜미를 잡고 있으려니 손이 저려 온다.

반대 손으로 바꿔 쥔 뒤, 고양이 밥그릇과 사료 포장지를 뜯어 사료를 담았다. 가득 찬 밥그릇 앞에 고양이를 내려놓고는 가만히 지켜봤다.

사료 몇 알이 부스럭거린다. 그중 한 알이 들렸다 말았다를 반복하다 고양이 입에 해당할 곳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입에 넣기 전에 혀로 몇 번 할짝거린 모양새다.

이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웅냥냥냥….”

멍멍이가 이놈 몸에서 쓰레기통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텅 빈 집에 먹을 게 있을 리 없으니, 배고플 때마다 밖에 나가서 쓰레기통을 뒤졌던 거겠지.

슬쩍 손을 놔 봤는데 이 녀석이 야단법석 떠는 일 없이 밥 먹는 데에만 열중이다. 사료 봉투에 적힌 걸 읽으며 고양이에게 말을 걸어봤다.

“야. 그거 고단백이랜다, 고양아.”

“…….”

“또 난리 치면 그땐 배급량 줄여버린다.”

밖에 내보냈다간 뭔 일이 날질 모르니 당분간은 이러고 지내야 될 성싶다. 최소한 밥 먹을 때만큼은 얌전한 녀석이니까….

* * *

밥 줄어드는 게 멈춘 걸 확인한 뒤, 사각팬티 빼고 다 건조기에 돌리고 잤다. 집에 수건 한 장 없는 탓에 티셔츠 짜서 몸 닦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더라.

잠에서 깨고 나니 밖이 어둡다. 불 켜고 밥그릇부터 확인했는데, 마지막에 확인했던 것보다 사료량이 훨씬 줄어있었다. 내용물을 다 꺼낸 비닐봉지는 손톱자국이 가득했으며―

“그르릉… 그르릉….”

거실로 이어진 방 안쪽에서 골골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고양이 성향을 생각해 보면, 날 피해 숨어서 잠을 자고 있는 거겠지.

바라보다가 떠오른 게, 저 녀석 물을 안 줬다. 다른 밥그릇 하나를 마저 뜯어 생수와 사료를 가득 채운 뒤 옷을 꺼내 챙겨입었다.

시간이 9시 반. 지금부터 준비 안 하면 늦는다. 방 안에 대고 마저 말했다.

“거실에 밥이랑 물 뒀으니까, 앞으로는 쓰레기통 뒤지지 말고 밥 챙겨 먹어라. 알았냐.”

“…그르릉….”

“화장실은 내일 사 줄 테니까, 오늘은 니 마음대로 하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줬다.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와 투룸 건물이 있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큰 사거리로 진입하자마자 꽤 볼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리가 휘황찬란했던 것이다. 가로등, 네온사인, 백화점과 인도를 끼고 주욱 늘어선 식당, 술집, 생활용품점, 기타 수많은 건물들.

학교가 잔뜩 몰려 있으니 상권도 그만큼 발달한 곳일 거다, 머리로 짐작만 하고 있던 사실이 이제야 확연하게 체감이 됐다.

고작 2달 전에만 해도, 이런 홍대 같은 곳에서 지낼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말야. 좀 더 걸어 스크램블 교차로.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사방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에 귀를 기울여봤다.

“넌 적성검사 어떻게 나왔냐. 나 재수 없으면 비마법과로 전과하게 생겼다.”

“난 전력 마법 쪽 적성이라는데, 나도 아슬아슬하다더라.”

“야 새끼들아, 나 지금 횡단보도 앞인데 식당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나 먹을 고기가 남아 있기는 하냐?”

“예, 교수님… 네. 급한 일, 네. 마법약 시약이 모자라다고요. 돌아오라고요. 네…….”

“대리님. 그 건은 저희 협업하는 드워프들 공방 쪽에 연락을―”

다양한 이종족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적성검사가 망했다며 우울해하는 코볼트 고등학생 둘, 친구 만나러 고깃집에 가는 듯한 오크, 밤 10시 넘어서도 고통받고 있는 대학원생, 금속 관련 물산에서 일하는 듯한 회사원.

그중 식당을 찾던 오크 얘기에 집중해 봤는데, 이 오크가 먹는다는 고기가 개구리 뒷다리인 듯했다. 뭔 2m 넘는 떡대 놈들이 모여서 개구리 뒷다리를 먹어?

“1시간 동안 아직 반도 못 먹었어? 오케이, 딱 기다려라. 내가 가서 나머지 다 먹는다.”

그 개구리가 꽤 큰 놈인가보다. 도중에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고, 인파에 반쯤 휩쓸리듯 횡단보도를 건넜다.

걷는 도중에 드워프 어깨에 허벅지를 부딪쳤는데, 어깨가 돌덩이 같은 게 내가 튕겨 나가 자빠질 뻔했다. 주춤거리는 사이, 드워프가 돌아보고는 슥 고개를 숙여왔다.

“어. 미안하다.”

“아뇨. 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나도 똑같이 고개만 숙이고 말았다. 지나치면서는 잡생각. 내 종족이 무엇인가, 출신은 어디인가, 정체가 무엇인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하기사, 지금까지 근무하며 어느 손님도 신경 안 썼던 문제를 이제 와서 어떻게 신경 쓰겠냐만….

이런 느낌이라면, 앞으로도 이 동네에서 사는 것 자체는 별문제 없을 것 같다. 주민신고나 계약서, 보험 같은 문제만 해결하고 나면 말야.

마저 걸어 학원지구의 성이 보이는 위치까지 도착했다. 편의점 앞 지하철역 출입구도 가시권에 들어왔는데, 오가는 인파 중에 매장으로 들어가는 이종족들도 여럿 보이더라.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손님 서넛이 매장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고르고 있는 게 보였다. 벨 소리에 내 쪽을 바라보는 점장도.

“아, 찬이 왔네. 오늘 잘 잤어?”

“그럭저럭요. 점장님, 오늘 낮 근무 어땠습니까?”

“장난 아니었지. 한번 봐봐.”

POS기를 가리키는 점장. 매출을 확인해 봤는데, 사거리에서 이맘때쯤 찍혀있던 것보다 매출이 1.5배는 더 나왔다.

“고등학생 애들 엄청 몰려왔거든. 오늘 큰일 끝나서 그런가 봐.”

“출근하면서 애들 얘기하는 거 듣긴 했습니다. 두 놈 다 우울증 도지기 직전이더라고요.”

“엄청 몰려왔던 애들도 다 비슷했어. 시험 잘 봤다구 하는 애 있으면 막 가방으로 몰매 때리구.”

“그건 이 동네도 똑같네요.”

“그런데 찬이, 문제는 잘 해결됐어?”

“어… 예.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밥 먹이고 지켜봤는데 잠 잘 자더라, 앞으로도 밥 잘 먹이면 문제는 안 일으킬 것 같다. 설명한 뒤에 곧바로 물었다.

“저희 집에 그 고양이, 영물인 거죠?”

“찬이나 윤하 얘기대로라면 99% 정도. 나머지는 내가 직접 봐야 알겠지만… 그런데 찬아.”

“예.”

“그 애 얘기는 가능하면 다른 분들 안 계실 때 하자. 들으시면 어떤 식으로든 문제 생길 거거든.”

이제 겨우 얌전하게 온 참인데, 이번엔 또 무슨 문제?

이걸 물으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 정문 벨이 울리고 손님이 한 명 더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우리 쪽을 힐끗 바라본 뒤, 테이블 쪽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카운터 앞에 섰다.

그러고는 우리 둘을 뚫어져라 바라만 본다. 우리 둘이 말이 없자, 이 녀석이 은색 눈동자를 두어 번 끔벅이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빠.”

“말씀대로 문제가 생기긴 생겼네요, 점장님.”

“그게, 이 문제를 얘기한 건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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