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잘 모르면 그냥 배워 (1)
* * *
이 매장 카운터 안쪽에는 세면대가 있다. 매장이 벼락 쏘는 다람쥐한테 박살 나고 빗물에 반쯤 침수됐던 순간들에도 말없이 제자리를 지켜 준 기특한 녀석이다.
사무실에 바닥걸레 개수대가 있긴 하지만, 거긴 온수가 안 나온다. 카운터 안으로 들여 손을 씻게 해줬는데, 이 녀석이 씻으라는 손은 안 씻고 카운터를 둘러보기만 하고 있다.
“너 뭐 하냐?”
“오빠.”
“왜.”
“저 카운터 들어와 보는 거 이번이 처음이에요.”
신기해서 그렇댄다. 카운터 내부 구조가 신기해서라기보단, 자기가 정말 일을 하러 왔다는 게 실감이 안 나서 이러는 것 같다.
손에 비누칠을 하면서도 연신 주변을 둘러본다든가, 진열된 담배들을 뚫어져라 바라보거나 하고 있고. 그러다 담배 한 갑에 시선이 꽂히고는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오빠, 담배에는 왜 이런 그림들이 가득 그려져 있는 거예요?”
“연초 태우면 니 폐나 목이 그렇게 된다고 스포하는 거야.”
“효과는 있구요?”
“나한텐 없더라고. 야, 둘러보는 건 이따 둘러보고 손부터 씻어. 물 튈 거 아니냐.”
“네.”
내 말에 둘러보는 걸 그만두고는 손에 묻은 비누를 헹궈내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나 혼자 고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점장한테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네 번 울리고 전화를 받았다.
[ 엉, 항아. ]
“네, 점장님… 예?”
[ 잠한만. 가그르르르…. ]
직후엔 입 가글거리는 소리. 양치질하고 있었나 보다.
[ …푸하. 응, 찬아. 지금 근무 어때? ]
“등교 시간이라 애들 잔뜩 몰렸었는데, 지금은 좀 한가해졌어요. 그리고 나유리 이 녀석도 여기 와 있고요.”
[ 엥? 벌써 왔대? ]
“지각하기 싫어서 미리 온 것 같습니다. 제딴에는요.”
오자마자 자기 지각 안 했다는 얘기부터 했으니 이게 맞겠지. 말한 뒤 바로 점장에게 물었다. 이 녀석 근무하는 동안 미리 이것저것 알려줘도 되냐.
[ 찬이가 교육시키려구? ]
“허락하시면요. 이 녀석 모처럼 일찍 왔는데 가만 앉혀 놓기도 그렇고.”
[ 글쎄, 좀 애매하지 않을까? 아직 근무시간도 안 정해졌잖아. ]
야간이든 주간이든 주 업무가 손님 받는 거긴 하지만, 시간대별로 미묘하게 다른 게 있다. 물류를 받는다든가, 자정 즈음에 전표를 뽑는다든가, 분리수거를 한다든가.
대부분 쉽게 배울 수 있는 것들이긴 하지만, 타이밍이 다소 애매하긴 했다. 보여주는 것 없이 말로 설명만 하면 듣는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헷갈릴 테니까. 그렇다면….
“그럼 점장님 오실 때까진 손님 받는 것만 보고 있게 하겠습니다.”
[ 응. 그런데 유리 밥은 먹었대? 찬이는? ]
“저는 아직 안 먹었고, 유리는… 너 아침 먹고 나왔어?”
“배고파요.”
어느새 손을 다 씻고 왔길래 물어봤다. 대답하는 동시에 이 녀석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는데, 소리가 꽤 컸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릴 정도로 말이다.
[ …둘이 밥부터 먹어. 먹고 싶은 거 골라서 먹구, 영수증만 끊어줘. ]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따 봬요, 점장님.”
[ 응. ]
이렇게 전화는 끊어졌고, 다시 유리 녀석을 바라봤다. 방금 배로 천둥 치는 소리를 낸 녀석이 표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했다. 나도 못 들은 척하련다.
“유리 너 여기서 일할 거지. 확실히.”
“네. 확실히요.”
“그럼 점장님 오시는 동안은 특별히 뭐 하진 말고, 여기서 나 일하는 것 좀 보고 있어라. 도중에 궁금한 거 있으면 손님 없을 때 물어보고, 또….”
“네.”
“일단 밥부터 먹자.”
아까 애들 몰려올 때에 비해 기가 막힐 정도로 한가해졌다. 이 타이밍이 아니면 이 녀석이나 나나 배곯은 채 일을 해야 될 터다.
하여 나란히 즉석식품 코너 앞에 섰다. 알아서 먹을 걸 골라보라고 했는데, 진열대를 주욱 훑어보는 시선이 점점 내려가더니 진열대 바닥의 바구니에까지 닿았다.
유통기한 지난 식품들 담아놓는 바구니 말이다. 그 안에서 도시락 하나를 집어 들고는 내게 묻는다.
“이것들은 바닥에 놓여 있네요.”
“유통기한 지난 것들 따로 모아놓은 거야. 더 이상 상품이 아니어서 돈 받고 팔지도 못하는 거고.”
“그럼 저 이거 먹을래요.”
“아니, 밥을 사준다는데 왜 굳이 이걸 먹겠다는 건데.”
“저 아직 일 안 했잖아요.”
자기가 일을 한 게 아니니 얻어먹지도 않겠다는 논리였다. 흠….
“아까 테이블 치웠잖냐. 수고비라 치고 그냥 먹어.”
“그거 밥 먹으려고 한 거 아닌데.”
“니 상사 될 사람이 먹으라는데 안 먹어, 그럼?”
이 녀석 행동 원리 태반이 이해가 안 되긴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나도 똑같은지라 이해가 잘 됐다. 들고 있던 도시락을 집어 밑에 내려놓은 뒤, 진열대에서 똑같은 도시락을 꺼내 쥐여줬다.
포장을 뜯어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동안에도 계속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이길래, 유제품 코너에서 오렌지 주스를 하나 꺼내 건네며 슬쩍 말해봤다.
“다른 사람한테 얻어먹을 때 너무 사양하는 것도 좋은 건 아냐. 너도 알겠지만.”
그래도 대학 다니는 녀석이니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지 않을까. 너무 애 취급을 한다는 생각에 덧붙인 건데, 이 녀석이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로 내게 되물어왔다.
“왜요?”
“그야, 너한테 밥 사 주는 사람이 이유 없이 사 주는 건 아닐 거 아니냐. 너랑 친해지고 싶어서일 수도 있는 거고, 너한테 빚진 걸 갚고 싶어서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지금은요.”
“점장님 경우엔 전자가 이유일 거고, 난 둘 다.”
“음….”
내 말을 들으면서는 또 궁금한 게 생긴 건지 전자레인지가 다 돌아갔음에도 바라만 볼 뿐 미동조차 없다. 이 녀석 학창 생활은 대체 어떻게 보낸 건지 모르겠다.
움직일 기미가 없어서 내가 직접 도시락을 꺼내줬는데, 이 녀석 눈이 도시락을 따라가고 있다. 젓가락 부분을 멍하니 쳐다보다 불쑥 입을 열더라.
“오빠는 그런 걸 어떻게 알게 되신 거예요?”
“어떤 거. 밥 얻어먹을 때 사양 많이 하면 안 좋다는 거?”
“네.”
“주구장창 일하고, 가끔 밥 얻어먹어 보니까 알게 되더라. 넌 몰랐냐?”
“전혀요.”
직전까지도 설마설마했던 의문이 이걸 듣고 나서야 뚜렷해졌다. 이 녀석이 대화를 적게 해본 수준이 아니라, 대화 자체를 거의 안 하고 살아온 녀석이다.
대신 다른 의문이 떠올랐는데, 이 녀석이 타인과 대화하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점. 지금도 나랑 잘만 대화하고 있잖은가. 주제가 이상하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도 먼저 말을 거는 게 이 녀석이고. 도시락 뚜껑이 뜨거워서인지 손가락으로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다시 질문을 던져온다.
“일하다 보면요. 저도 오빠처럼 그런 것들 알게 될까요?”
“계기가 뭐든, 사람들이랑 어울리다 보면 늦든 빠르든 깨닫게 된다. 모르면 손해 보니까.”
“손해를 봐요?”
“야. 만약에, 유리 네가 도시락 안 얻어먹고 계속 버티고 있었다고 쳐 보자.”
난 계속 똑같은 말을 했을 터다. 나중에 돌려받을 것도 아니니까 그냥 먹으라고. 그걸 이 녀석이 두 번 세 번 사양하며 버틴다. 내가 뭘 얻어먹겠다고 도와준 것도 아니니 안 먹겠다.
이게 계속 반복되면, 더 이상 밥을 사주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가 아니게 된다. 이 녀석이 말이 아예 안 통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하게 됐겠지. 다음엔 똑같은 주제로 말을 안 꺼낼 테고.
단순 계산 해 봐도 대화 주제, 어울릴 거리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다. 여기까지 말할 즈음, 이 녀석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똑 부러트렸다. 깔끔하게 떨어졌다.
“그렇게 말해 주시니까 알 것 같아요. 단순 계산.”
“다행이네.”
“그러면요. 누가 뭘 사 준다고 할 때 바로 받는 건요?”
“바로 받는 것도 좀 그래. 속물처럼 보이잖냐.”
“이젠 또 모르겠네.”
나도 단번에 이해할 거라곤 생각 안 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인간관계도 반복 숙달이 필요한 법이다.
손님도 아직 없겠다. 마저 생각하라고 내버려 뒀는데, 이 녀석이 자기 도시락을 가져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젓가락에 뭘 꽂아왔다. 미트볼.
젓가락을 쥔 손을 내 손에 가까이하고는, 평탄한 어조로 말해온다.
“궁금한 거 알려 주셨으니까, 제가 드리는 거예요.”
“아니….”
“한 번은 사양하셔도 괜찮아요.”
일 가르치는 건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것 같다. 사양 없이 젓가락을 받아 입에 직접 집어넣은 뒤 건네주자, 젓가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속물.”
“야. 인간관계 쌓을 때 전제가 하나 있다. 생각대로만은 절대 안 풀린다는 거.”
“그런 것 같아요.”
“나 이제 전화 받아야 되니까, 도시락 먹다가 손님 오면 내 쪽 보든지 해라.”
아까부터 희미하게 뭔 소리가 들린다 싶었는데, 귀 기울여 보니 전화벨 소리였다. 내 말에 또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이블로 뚜벅뚜벅 걸어가 앉는다.
바로 카운터로 가서 발신자를 확인해 봤다. 누나였다. 전화를 받자, 바람 가르는 소리와 누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 야… 야! 매장 밖에 사람들 많냐?! ]
“어… 꽤 많이.”
[ 젠장, 오늘은 좀 걸어야겠네. 잠깐 끊는다. ]
“그러셔.”
아침에 점장이 물류가 온다고 했었다. 헌데, 이 앞 거리가 기존에 영업하던 사거리와는 달리 2차선이다. 갓길도 없고.
컨테이너를 어디에 두는 건가 싶어 지켜봤는데, 3분가량 기다리고 나니 누나가 매장 왼편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SUV 차량만 한 크기의 보따리를 질질 끌며 말이다. 정문 앞까지 와서는 폐문 쪽을 쿵쿵 두드리길래 잠금쇠를 풀어줬다. 들어와서는 짐을 내려놓은 뒤 해맑게 외치는 누나.
“난 오늘 일 끝났다, 짜샤! 세상에, 이런 날이 다 오네.”
보따리를 손으로 툭 밀어 봤는데, 내 몸집의 4배는 될 보따리가 손에 닿는 족족 이리저리 밀리거나 했다. 누나가 가볍게 만들어 온 건가 보다.
“누나, 출근은… 아 맞다, 누나 오늘까지 휴가였지.”
“그래. 이제 사무소 가서 구르고 있을 놈들 실컷 놀려주고, 집에서 TV나 좀 보고―”
이후엔 어깨가 뻐근한지 기지개를 켜다, 자기 지갑을 꺼내며 내게 물었다.
“그 전에 라면이나 좀 먹고 갈란다. 나 이번에 라면 신상 나온 거 먹고 가도 되냐?”
“뭐야. 라면도 신상 들어왔어?”
“언니가 애들 좋아하는 맛으로 잔뜩 넣었더라고. 그중에 땡기는 것도 있고.”
“기다려 봐, 재고 파악만 좀 하고.”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이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다. 사 갈 걸 진열대가 아니라 매장에 쌓여 있는 물류에서 고르는 경우.
이 경우, 바로 계산해서 건네줘도 아무 문제 없다. 상품 등록을 미리 끝마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류가 제대로 들어왔는지 파악만 한다면 말이다.
꽁꽁 싸매진 보따리를 풀어 하나씩 헤집던 도중, 등 뒤에 인기척이 느껴져 잠깐 돌아봤다. 도시락을 까먹던 유리 녀석이 어느새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이거 다 파는 거예요?”
“그럼 파는 거니까 들여놨지, 이유가 뭐겠냐. 너도 언제 할 일 생길지 모르니까 하는 거 한번 봐봐.”
“네, 오빠.”
“오빠?”
처음 보는 얼굴과 태연하게 얘기하는 게 의아했는지, 누나가 나와 유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점장이 얘 얘기를 아직 안 했나 보다.
“이찬, 이 애 누구야?”
“얘 여기서 새로 일할 알바생이야. 이름 나유리고.”
“안녕하세요.”
인사하며 푹 고개를 숙이는 이 녀석을 바라보던 누나가, 근무 첫날 나와 만났을 때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