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172화 (173/201)

172화. 잘 모르면 그냥 배워 (2)

* * *

누나 성격 중, 늘 어떻게 저게 가능한가― 생각하는 면모가 하나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대화하더라도 전혀 어색해하질 않는다는 것.

여태 만나 본 사람 중 넉살 총량이 제일 큰 사람이라는 얘기다. 새로 온 알바생이라는 얘길 듣자마자 눈이 동그래져서는, 활짝 웃으며 유리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알바생? 오늘부터 여기서 알바 시작하는 거예요?”

“네.”

“이야, 이제야 언니 고민하는 것 좀 안 볼 수 있겠… 아, 저 서윤하예요. 여기 물류 일은 겸직이고, 본업은 헌터.”

여기까지 말하고는 유리에게 손을 내미는데, 이 녀석이 누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붙잡아서는 흔들어댔다. 거래처 사장을 처음 상대하는 신입사원 같은 모양새다.

“?”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라서인지 누나도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 됐고. 이 상황에 그나마 꺼낼 수 있는 말이 뭔지를 생각하다, 적당한 게 떠올라 말해 봤다.

“얘 이번 일이 사회 나와서 처음 하는 일이래, 누나.”

일뿐만이 아니라 악수도 거의 처음 해 보는 거겠지만 말야. 이 말에 누나가 붙잡힌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 떠오르는 게 있는지 씨익 웃고는 말을 이었다.

“긴장 안 해도 돼요. 그냥 동네 편한 언니라 생각해 주는 게 좋은데.”

“동네 편한 언니요?”

“네. 혹시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무 살이에요.”

“부럽네, 전 이제 30줄인데. 앞으로 자주 볼 사이니까 서로 말 편하게 하는 걸로. 괜찮아요?”

누나 말에 이 녀석이 고개를 끄덕인 뒤, 또 뭐가 떠올랐는지 뚫어져라 누나 발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마디.

“서른이시면 제 1.5배밖에 안 돼요, 언니.”

“아니.”

말을 편하게 하랬답시고 떠올린 게 이건가보다. 내가 똑같은 말을 했다면 이 직후에 로우킥이 날아와 내 정강이를 두 동강 냈겠지만….

“…유리 너도 금방이야. 너는 나처럼 나이 안 먹을 줄 알아?”

이러는 게 귀엽기만 한 건지, 웃는 얼굴 그대로 맞받아칠 뿐이었다. 내가 나이 얘기할 때랑 반응이 왜 이렇게 딴판이야, 서러워서 살겠냐?

“내 나이 기준으로는 1.03배임, 누나.”

“너 맞고 싶냐?”

“나 정강이 부러지면 일은 누가 해. 누나 라면 먹고 바로 돌아갈 거야?”

“컨테이너 가져다 놓고 니 집 놀러 가려고 했었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너희 집 놀러 가 봐야 그 고양이가 또 난리 칠 게 뻔하고….”

짐짓 고민하는 척 턱을 쓰다듬다, 유리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을 맺는다.

“네가 얘 일 가르치는 거나 보다 갈련다. 이게 혼자 노는 것보단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러든가.”

지금이 8시 20분이다. 이 세상 등교 시간이 나 살던 곳과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4~50분 즈음 초등학생들이 잔뜩 몰려올 터다. 8시 50분 등교일 테니까.

그 전까지 물류부터 다 끝내야 한다. 보따리를 묶은 매듭을 풀자, 라면박스며 장난감이며 쌓여있던 것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다행히도 주류는 오늘 안 들어왔다. 전표 용지를 훑어봐도 적힌 게 없고. 카운터에서 펜을 한 자루 챙겨온 뒤, 용지를 들어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유리야. 물류 들어왔을 때 어떻게 하는지부터 알려 준다. 봐봐.”

“네, 오빠.”

편의점 물류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말로는 간단하다. 들어온 물류들의 상품 개수와 품목명을 확인한 뒤, 전표에 적힌 대로 잘 들어왔는지를 확인하면 끝.

말로는 간단하지만, 이 작업이 귀찮을뿐더러 변수가 많다. 양이 많을 경우엔 체크한답시고 물류 뒤적거리는 것부터가 고역이기도 하고….

특히 짜증 나는 변수 중 하나가 전표에 적힌 상품명과 실제 상품명이 다를 경우. 마침 딱 예시로 들 만한 상품이 들어왔다.

“대부분은 여태 말한 대로만 해주면 되는데, 지금 이거 봐봐. 이… 마그마 맛 감자칩?”

도중에 뇌정지 올 뻔했다. 감자칩으로 어떻게 마그마 맛을 낸 거며, 애초에 마그마 맛이 대체 어떤 맛이야. 불꽃 맛과 완전히 상하관계에 있는 맛인가?

어이가 없어서 감자칩 봉지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매운맛이 불꽃 맛의 5배라고 적혀있었다. 전표에는 ‘불꽃맛5배감자칩’ 이라고 띄어쓰기 하나 없이 적혀있고.

“오빠?”

“…어, 이렇게 상품명을 지들 마음대로 적는 경우가 있어. 이런 건 상품 이름만 봐서는 헷갈리기 쉬우니까 다른 데를 보고 파악해야 된다.”

이 경우엔 바코드 넘버. 상품명을 보고 ‘대충 이거 아닐까?’ 싶은 상품의 바코드 넘버를 확인한 뒤, 전표에 적힌 것과 똑같으면 같은 상품인 거다.

“네. 88006….”

“앞자리는 안 봐도 된다. 같은 카테고리 상품들은 앞자리 죄다 똑같거든. 뒷자리 몇 개만 보면 돼.”

“같은 카테고리?”

“과자는 과자들끼리 똑같고, 장난감은 장난감들끼리 똑같다는 얘기야.”

이 방법에 익숙해지면, 나중엔 상품명은 아예 안 보고 바코드 넘버만 보게 된다. 상품명이 길답시고 짧게 요약해서 적어 넣는 게 한둘이어야지.

“그리고 이건 팁이라면 팁인데, 생긴 건 똑같은데 무게가 애매하게 다른 것들 있잖냐. 전복죽은 288g, 쇠고기죽은 289g.”

“네.”

“이런 것들 있으면 무게 보고 찾는 것도 편해. 바코드 넘버보단 글자 크기가 크기도 하고, 상품들 대부분은 무게가 좌하단에 적혀있으니까.”

여기까지 설명한 뒤에 유리 얼굴을 곁눈질해 봤는데, 눈을 한두 번 끔벅거리는 게 눈이 꽤나 아픈 듯했다. 하긴, 글씨가 좁쌀만 하니 눈이 아플 만도 하다.

입을 굳게 다문 게 또 궁금한 점이 생겨서 이러는 것도 같고. 가만히 기다렸더니, 유리가 조심스럽게 전표 끝자락을 쥐고는 중얼거렸다.

“과자 다음엔 죽, 죽 다음엔 사탕, 사탕 다음엔 라면이네요.”

“그건 나도 불만이긴 하다. 과자나 라면 같은 것들은 특히 징검다리 건너듯 적어놓더라고. 왜 그러는 건지.”

“오빠도 모르는 게 있어요?”

“모르는 게 태반이지. 그래도 추측은 해 봤었다.”

예를 들면, 가벼운 것들은 나르기 쉬우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등록하고, 음료수는 무거우니까 나중에 등록하는 거라든가.

물론 속사정이야 물류 등록하는 양반들이 알겠지만, 편돌이로서 솔직히 답답하긴 하다. 전표 페이지별로 과자, 라면, 사탕, 딱딱 정리해 주면 좀 좋아?

“그래도 담배나 음료수는 잘 적혀 있는데.”

“그러게 말이다. 여튼, 상품 보고 맞게 들어왔으면 적당한 곳에 체크하면 돼. 이렇게.”

말하며 아까 봐둔 마그마 맛 감자칩 이름 항목에 동그라미를 쳐봤다. 이것도 이유가 궁금한지 오른쪽 부근을 힐끔 보고는 내게 물어온다.

“오른쪽 끝에 비고란이 있어요, 오빠.”

“거기 체크하면 나중에 확인하려고 눈동자 좌우로 계속 굴려야 되잖냐. 상품명 쪽에 동그라미 쳐놓으면 ‘이건 아까 내가 봐뒀구나―’ 하면서 바로 알 수 있고.”

“아하.”

“솔직히 너 편한 대로 하면 될 일이긴 하다. 따로 정해진 게 없는 일이니까.”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 슬쩍 펜을 건네줬더니, 상품 쌓인 것과 전표를 번갈아 가며 확인하고는 라면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이후 전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 똑같은 이름이 적힌 부분에 작게 동그라미를 치고는 펜을 달칵였다. 내가 알려 주는 대로 하려는 모양이다.

“됐어요, 오빠.”

“그렇게 47번만 하면 돼.”

“47번을요?”

“오늘은 물류 적게 들어온 편이야. 나중에 컨테이너 보면 기겁할 거다, 너.”

물류가 짜증 나는 작업인 가장 큰 이유는, 이 짓을 하면서도 손님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 있다. 여긴 매장이 큰 만큼 한 번에 들어오는 물류도 양이 많고.

놀릴 생각으로 말해 본 건데, 말해 놓고 보니 갓 일 시작하는 녀석한테 지레 겁부터 먹인 게 아닌가 싶었다. 허나 잠시 후, 이 녀석이 아주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해 오더라.

“재밌을 것 같아요.”

그래. 뭐든 처음 시작하면 재미있는 법이긴 하다. 여튼 물류 하는 법은 이쯤이면 될 것 같고, 물류를 마친 편돌이가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가.

진열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이것도 알려 주긴 해야 하는데, 이것만은 전표를 보니 지금 알려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번에 들어온 상품들이 죄다 신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들어찬 진열대를 어찌어찌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아니. 아니다.”

불가능할 것 같다. 전표를 다시 확인해 보니, 이번 신상들이 뭉텅이가 아니라 낱개로 왔다. 점장은 발주를 왜 이런 식으로 넣었대?

이걸 물었더니, 누나가 어깨 으쓱하고는 대답해 줬다.

“언니가 발주 넣을 때 그러더라고. 어떤 상품이 잘 팔릴지, 정문 근처에 진열대 하나를 아예 만들어 놓고 좀 지켜보고 싶다고.”

“어… 우리 간이 진열대 있어?”

“지하창고 쪽에 있을걸? 잘 모르겠으면 언니 올 때까지 기다리든가.”

그래야 될 것 같다. 진열대 조립하는 거야 내가 한다 쳐도, 신상 진열하는 건 상업적 감각에 달린 문제니까. 난 내 가게 차려 본 적 없다.

하여 보따리는 다시 꽁꽁 싸맨 뒤, 누나한테 부탁해서 라면창고 쪽에 쟁여놓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도중에도 유리 녀석이 전표와 펜을 쥔 채로 중얼거려 댔다.

“바코드 넘버, 무게, 그리고….”

“지금 막 열심히 기억하려고 할 필요 없어. 몇 번 하다 보면 알아서 잘하게 된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럴 테니까 믿어도 된다. 이번엔 물류가 마침 왔으니 알려 준 거고… 사실 네가 잘해야 될 건 따로 있긴 해.”

“어떤 거요?”

바로 손님을 받는 것이다. 사실 이게 제일 걱정이다.

이것도 과정은 간단하다. 손님이 오면 바코드를 찍고, 카드나 현금 같은 결제 수단을 받아 계산하고 돌려보내면 된다. 헌데 여기가 보통 매장이 아니잖은가?

지하에 진상들을 끌어당기는 수맥이 있는 곳이고, 한 달간 고통받아왔던 경험으로 짐작건대 이 수맥이 공간이동한 이 위치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진상들을 일 한번 안 해본 이 녀석이 버틸 수 있을까, 없을까. 이걸 버티는 것만은 가르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사람 성격에 달린 문제지.

잠깐 생각하다, 관뒀다. 이것도 겪어 봐야 알 일이니까.

그래도 손님을 받는 방법만큼은 지금 알려 줄 수 있겠지. 돌아오기 전에 누나가 얘기했던 신상 라면을 하나 집어왔다.

“누나가 말한 신상 라면 이거지?”

“뭐든 신상이면 상관없는데. 근데 이건 언제 꺼내 왔어?”

“누나 사 보라고 꺼내 왔지. 유리야, 결제하는 거 보여줄 테니까 들어와서 한번 봐봐.”

“네.”

내 말에 쪼르르 다가와서는 옆에 서서 라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이러는 유리를 바라보던 누나가, 다시 피식 웃고는 자기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어왔다.

“이찬. 얘가 니 말을 엄청 잘 듣는다, 야.”

“배우는 입장이니 잘 들어야지. 1,800원임, 누나.”

“어.”

라면 바코드를 찍고, POS기 화면의 결제 수단 항목 중 카드를 누르고, 카드를 리더기에 꽂고 잠시 기다리고, 결제 끝. 누나에게 카드를 다시 돌려준 뒤 유리에게 말했다.

“이걸 하루 종일 하면 된다. 결제 수단 종류도 여러 개가 있는데….”

“난 그것보다 다른 게 더 걱정이다, 이찬. 얘 엄청 순해 보이는데, 진상들 상대 잘할 수 있겠어?”

누나가 이 매장에서 잠깐 일을 해 본 사람이다. 잠깐 점장 일을 돕다가 때려치웠고, 때려치운 이유가 진상들 상대하는 데에 질려서라고 했었다.

그래서인지 누나도 나랑 똑같은 걱정을 하는 듯한데, 이게 당장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상들이 오란다고 올 정도로 말을 잘 들어주면 애초에 진상이 아니지 않나―

― 짤랑.

도중에 정문 벨이 울려 바라봤는데… 세상에.

“야, 씹새야.”

오전 8시 20분, 학원지구. 찰리 The 치와와가 찾아왔다. 흰자위가 빨갛다 못해 실핏줄이 터질 듯한 몰골을 한 채로.

그대로 다가와, 다짜고짜 이런 걸 물었다.

“여기 독약 파냐? 흔적 안 남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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