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부메랑처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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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가 안 풀린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터다. 성격이 맞는 줄 알고 만났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든가, 다른 건 다 좋은데 딱 한 가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라든가….
허나 전부 추측의 영역이고, 애초에 진상짓 하고 간 양반 사정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잘 모르겠다고 적당히 얼버무린 뒤, 둘에게 먼저 앉아 있으라고 권했다.
엘레나 양과 날 번갈아 보던 어르신께서, 엘레나 양을 내려다보며 먼저 대화를 시도하셨다.
“전에 매장에서 뵌 뒤로 이번이 두 번째군요. 성함이 엘레나 양이셨던가요?”
“앗. 저… 네. 안녕하세요.”
“그땐 고생 많으셨습니다. 젊은 서큐버스분께서 버티기 힘드셨을 텐데.”
“아, 아녜요. 다른 분들께서 훨씬 더 고생 많이 하셨고….”
매장이 떠내려갈 판이었던 그때, 순수 나이로만 따지면 엘레나 양이 24살로 제일 어렸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던 모습이 어르신께는 꽤나 인상에 남았던 듯하다.
엘레나 양도 그때 뵀던 게 기억에 남아서인지 낯을 덜 가리고 있고. 대화에서 착석까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동안, 난 바로 따라 앉지 않고 카운터에서 일부러 뜸을 들였다.
서로 소개할 시간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5분가량 바깥의 행인 수만 세다가 둘을 봤는데, 둘이 마침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보는 채였다.
행인 수가 적은 게 계속 카운터 지키고 있을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테이블로 갔더니, 어르신과 엘레나 양이 서로 마주 보고는 똑같은 말을 해왔다.
“확실히 좋은 분이시지요.”
“맞아요, 어르신. 같이 있으면 그냥 좋고, 막.”
누군진 몰라도 좋은 사람 얘기를 하고 있었나 보다. 못 들은 척 자리에 앉아 엘레나 양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나도 안부를 아직 못 물어봤었다.
“그날 이후로 좀 어떠셨습니까. 잘 지내셨어요?”
내 질문에, 정문 쪽을 힐끔 바라보고는 밝게 대답해오는 엘레나 양.
“네, 일이 확 바빠지긴 했지만 잘 지냈어요. 찬이 씨는요?”
“저도 몸은 쌩쌩했는데… 일이 좀 있긴 했었습니다.”
최근에 이 근처로 이사를 왔고 집 문제를 정리하기도 했다, 새 알바생이 들어온 참이라 그쪽에 정신이 팔렸다―
“그런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더라고요. 뭐… 그랬습니다.”
이 말은 내 의도와 상관없이 튀어나왔다. 그날 제일 나이가 어렸던 게 엘레나 양이다― 이 생각을 한번 하고 나니, 그동안 안부 묻는 톡 하나 안 보냈단 게 유독 마음에 걸리더라고.
내가 정말 좋은 놈이면, 정신이 팔리든 말든 안부 한 번은 물어보는 게 맞지 않나. 정작 당사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말이다.
“별 탈 없으셨다니 다행이에요. 그때 제일 고생하셨는데….”
별 탈 없었단 한마디를 들은 것만으로 더없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이 됐다. 얼굴을 보고 있자니, 내가 좋은 사람과는 한참 거리가 먼 놈이란 생각밖에 안 들게 되더라고. 무안함에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최근에 확 바빠졌다는 건 무슨 말이십니까?”
“아, 그게 게이트 열렸던 것 때문에….”
들은 직후엔 게이트랑 사랑의 묘약이 뭔 상관관계가 있나 싶었다. 다친 사람들이 많아서 상비약을 새로 만들었다, 이런 것도 아닐 테고. 제약회사 굴러가는 시스템을 내가 아는 게 아니니….
“그 일 이후로 상부에서 지침이 내려왔었거든요. 당분간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용도의 약을 개발해보자― 라면서.”
전후 사정을 좀 더 들어야 알 내용같다. 정문 쪽을 힐끔 바라보고는 길게 설명을 해줬는데, 이번에 게이트 건으로 온 도시에 일이 터졌었잖은가?
예를 들면 초대형 닭이 치킨집 간판 위를 딛고 섰다든가,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흙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든가, 등등.
“이번에 많이 위험하셨던 분들 있잖아요. 어딘가로 급하게 도망가야 하셨다거나, 어딘가에 갇히셨다거나.”
나로선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 처했던 사람들이 많고, 꽤 많은 사람들이 반강제적으로 밑천을 드러내게 됐단 것이다.
이것도 알기 쉬운 예를 든다면, 사귄 지 얼마 안 된 연인이 어딘가로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치자. 헌데 둘 중 한쪽이 다리를 다쳐서 걸음걸이가 늦다면?
“그런 일이 엄청 많았던 것 같아요. SNS에도, 이번 일로 약혼자한테 실망해서 헤어졌다― 라는 내용이 실제로 올라오기도 했었고.”
헌데 이게 대놓고 물어보긴 또 애매한 주제다. 비슷한 주제로 ‘날 위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어?’가 있는데, 이 질문에 ‘난 자기보다는 내 목숨을 더 사랑해’라고 대놓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없을 것 같은데?
제약회사 상부에서는 이 질문에 대한 진솔한 대답을 요구할 고객층이 많아질 것이라 판단했고, 그 결과로 인해 바빠졌다고.
“개발 의도를 들었을 때, 솔직히 좀 찝찝하긴 했지만요.”
나도 찝찝하긴 매한가지였다. 깔린 전제 자체가 불합리하게 느껴져서였다. 당장 자기가 위험한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고.
여기까지 말한 엘레나 양이 말하고는 힐끔 정문 쪽을 바라보길래, 내가 마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새로 개발하는 건 잘되어가십니까?”
“어… 아뇨. 열심히는 했었는데, 오늘 안건 자체가 파기되어 버렸어요.”
“예? 왜요?”
“마케팅 부서에서 회사 SNS로 설문조사를 했거든요. 이런 일에까지 묘약을 쓰고 싶진 않다는 반응이 62%, 무응답이 27%, 기타가 4%.”
묘약을 써서라도 확인하고 싶다는 쪽이 7%. 이 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 상부 측에서 본전도 못 건지겠다 싶었는지 개발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어버렸다고. 졸지에 며칠 열심히 회의하던 것들이 백지화된 셈이 됐지만….
“참, 헛물만 켰지 뭐예요.”
말해오는 어조가 하도 후련하다는 듯 들려오길래 더 묻지는 않았다. 대신 화두를 살짝 틀어 물어봤다.
“정문 쪽 보시는 것도 지금 말한 이 이유 때문이신가 봅니다.”
“어… 엇. 제가 그랬어요?”
“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돌아보시더만.”
엘레나 양이 태생이 태생인지라, 사랑 관련된 주제만 나왔다 하면 진심이 된다. 그 수인 양반이 ‘맨날 이러는 것도 피곤하고 질린다~’ 어쩌고 하는 고함도 다 들었을 테고.
백지화됐다는 이 안건과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싫어도 신경이 쓰이나 보다. 내 질문에 미안하다는 듯이 어르신 쪽을 힐끗 바라보는데,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게 미안하다는 눈치다.
우리 하는 얘기를 귀담아들으셨던 건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투로 먼저 말해오셨다.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즐겁게 듣고 있으니까요.”
“아. 정말이세요…?”
“예. 사실, 제게는 무척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르신께서 전직 군인 출신이시고, 옛날에 만난 사모님과 결혼한 후로 지금까지 쭉 결혼생활을 이어오신 분이다. 금슬도 무척 좋으신 것 같고.
반려라는 호칭을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도 유지하고 계시니 말이다. 아마 실망한다거나, 헤어지고 싶다거나 하는 감정 자체를 가져보신 적이 없지 않을까.
그러니 이게 신선하게 느껴지시는 것일 테고. 어르신 말에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고는 마저 말을 잇는 엘레나 양.
“아까 나간 그 손님이 그러셨잖아요, 찬이 씨. 싸우는 것도 지겹고, 사랑한다고 고백한 게 후회될 지경이라고.”
“그랬었죠.”
“처음에는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을 못 했던 거겠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첫 소개팅 때 서로 백문백답을 한 것도 아닐 거며, MBTI를 보고 사귄 것도 아닐… 아. 모르겠다.
“알 수가 없었겠죠. 일단 연애를 시작하긴 해야 하니까.”
딴 건 몰라도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말을 삼가고 싶었다. 내가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그냥 통화하는 걸 주워들었을 뿐이니까. 전후 사정을 잘 모른단 얘기다.
그렇다고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다간, 이 일에 대해 생각한답시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게 분명하다. 그걸 냅둘 바에 차라리 아는 선에서라도 말을 해주는 게 낫겠지.
더해서 그 양반 진상이고 말이다. 진상 전후 사정 따위 내가 알 게 뭐야.
“아까 통화하던 내용 들어보니 싸운 이유가 친구들 때문이더라고요. 밤에 자기 친구들이랑 술 먹고 들어오겠다고 여자친구한테 허락을 맡으려는데, 여자친구가 허락을 안 해주더라고.”
“어….”
내 말에 엘레나 양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조심스레 자기 의견을 말해왔다.
“그…건 허락을 안 해주는 게 맞지 않나요? 밤에 술 마시면 넘어지기도 쉽고, 위험하기도 하고.”
허락 안 해주는 이유가 조신하기 그지없다. 나랑은 입장이 다르긴 하지만, 덕분에 대화는 더 쉽게 풀릴 것 같다.
“저는 반대로 허락을 해 주자는 입장이에요.”
“찬이 씨께서는요?”
“성인이잖습니까. 민증 나왔는데 밖에서 술 먹는 것까지 일일이 다 허락 맡는 것도 웃기고. 밖에서 실수할 게 걱정된다는 게 말이 그렇지, 자기 연인을 못 믿는다는 거잖아요?”
“저는 못 믿어서가 아니고, 진짜로 걱정돼서….”
“당장 저희도 이렇게 의견 차가 있잖아요. 그 둘이라고 달랐겠습니까.”
헌데, 이건 서로의 사랑이 얼마나 찐한지의 문제가 아니다. 서로 참아야 할 상황이 발생한다는 걸 간과해서 생긴 문제지.
“참는다구요?”
“어느 한쪽은 참아야죠. 저희가 이 주제로 안 참고 대화를 하면, 엘레나 양께서는 ‘내가 진짜 걱정돼서 그러는데 그냥 안 가면 안 되냐’ 할 거고, 저는 ‘날 그렇게 못 믿냐’라고 되물을 거고. 이러는 거 반복이잖아요.”
“저는, 저… 꼭 가야 되는 거라면 어쩔 수 없다, 고 할 것 같아요. 믿으니까.”
“저도 이렇게 걱정할 정도면 그냥 내가 안 가는 게 맞겠다 생각할 것 같긴 합니다. 진짜로 걱정해서 그러신다는 거 아니까요. 여튼….”
비단 이 문제뿐만이 아니더라도 참아야 할 순간이야 얼마든지 있고, 처음에는 이게 잘 된다. 서로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되고, 친해지고 나면 편해지고. 편해지고 나면 줄곧 참아왔던 것들에 대해 간을 보게 되고, 그때면 머릿속으로 ‘어?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하고 의문을 품게 되겠지.
“그게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는 아니란 생각입니다. 그냥 편해졌고, 편해졌으니까 좀 더 많은 말을 하게 되고, 말 많이 하다 보니까 서로 안 맞는 일면이 있단 것도 알게 되고….”
“음….”
“아까 나간 양반 연애 관계는 그게 좀 심했던 거고.”
그 양반이 아까 통화는 조곤조곤히 했었지만, 그게 내 귀에는 이런 식으로 들렸었다. ‘내가 지금까지 꽤 많이 참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참아야 되냐?’
그걸 스스로 판단 안 하고 친구한테 전화를 한 걸 보면, 의견을 묻기보다는 헤어지기 위한 추진력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를 들은 엘레나 양이, 자기 나름대로의 소감을 중얼거려 왔다.
“서로 사랑할 때 참기만 하면, 그…런 것도 사랑일까요…?”
“참기만 하지는 않겠죠. 다른 점이 싫어서 참더라도 더 좋은 점으로 덮을 수도 있는 거고, 금방 잊는 금붕어 어인처럼 살 수도 있는 거고.”
별 사소한 걸 못 참아서 헤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옛날에 알던 친구 놈 중 하나는 지 여자친구가 페트병에 입을 대고 마시는 게 싫다고 헤어졌었으니까.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뿐이겠지만….
이후, 서로 잠깐 정적.
내 대답이 자기가 상상하던 것과 멀었는지 엘레나 양은 침묵해 버렸고, 난 목이 타서 조용히 있었다. 오랜만에 말을 좀 많이 했다.
조용히 있는 와중, 어르신 주머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바로 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고는 폰을 두 손으로 잡는 어르신.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사장님.”
어차피 대화도 끝났는데 실례할 것까지야. 전화를 받은 어르신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시는데, 아니….
“예, 반려. 어쩐 일이어요?”
[ 여보야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일하느라 많이 힘들죠? ]
“힘든 거야, 반려가 기다리고 있을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와, 씨. 반려에 여보야에, 내가 뭘 듣고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