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편돌이-185화 (186/201)

185화.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부메랑처럼 (3)

* * *

내가 어르신에게 갖고 있는 이미지가 이러하다. 원리를 짐작하기 힘든 신묘한 마력 컨트롤로 물 위를 걷는 법을 체득하신 노년의 은둔고수요, 대리기사.

더해서 매―직 어깨탈구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시는 데에 더해, 지난주에는 하수도에서 2층집만 한 돌덩어리 골렘들 상대로 넥타이 풀고 한판 붙으시는 것까지 두 눈으로 직접 봤다. 그런 분이 지금은, 씨.

“우리 아가는 잘 있나요?”

[ 아무렴요. 지금은 여보야 침대에서 잠들어 있어요. 여보야가 빨리 보고 싶다면서. ]

“이런, 제가 아가에게 몹쓸 짓을 저질렀군요. 반려.”

이러고 계신다. 중후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깨가 뚝뚝 떨어지고 있고, 폰은 두 손으로 잡고 계시는 게 처음으로 연애를 하는 사람을 보는 듯한 풋풋함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폰 너머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기 그지없는 게, 손발이 점점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게 내가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불쌍한 모쏠 놈이라서 이런 건가?

“어… 어머나. 와.”

와중에 생각에 잠겨있던 엘레나 양도 어르신 통화내용을 잠깐 듣고는, 마음속 작은 빨간 버튼이 눌리기라도 한 건지 눈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러고 있거나 말거나…

[ 저도 마찬가지여요. 오늘은 일이 언제쯤 끝날 것 같아요? ]

“일은 다 끝났고, 지금은 전에 얘기 나눴던 그 청년과 같이 있답니다. 반려.”

[ 아.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마요. 달이 밝아서인지 오늘따라 여보야가 유난히 보고 싶네요. ]

“늦지 않게 돌아가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려.”

[ 저도요. 사랑해요, 여보야. ]

이러고는 또로롱 전화가 끊어졌고, 암전된 화면을 입꼬리를 흐뭇하게 올린 채 가만히 바라보는 어르신. 족히 십수 초 가량을 이러시다, 모자를 슥 내리고는 우리 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죄송합니다. 잠깐 전화를… 두 분 다 무슨 일이십니까?”

“…….”

말씀하시다 중간에 멈추고는 의아하다는 듯 물어보셨는데, 대답할 여유가 없어서 못 했다. 헛웃음이 터지려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는 것만도 벅찼기 때문이다.

“와….”

엘레나 양도 뺨이 붉어져서는 눈만 껌벅이는 게, 트루 러브를 맞닥뜨린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는 것 같고. 그러다 고개를 붕붕 젓고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기요. 울프 어르신.”

“말씀하시지요.”

“반려분. 그러니까, 사모님이랑요. 어… 엄청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요.”

말을 꺼내는 도중에 용기가 생긴 건지 이젠 눈을 똘망똘망 빛내고 있다. 하긴, 본업이 묘약회사 연구원에 겸업이 사랑꾼인 서큐버스로서 가만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기야 할 터다.

노년의 사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지고지순이기도 하고 말이다. 엘레나 양이 원하는 진실된 사랑 어쩌고에 가장 가까운 사랑이 어쩌면 이런 형태가 아닐까. 아님 말고.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몇 가지를 좀 여쭤봐도 될까요?”

“저야 괜찮습니다만, 어떤 걸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두 분께서 어떻게 만나시게 됐고, 어떻게 연애를 하셨다― 라든가.”

이 질문에 잠깐 당황한 듯 입을 다문 어르신.

이러시는 이유는 전에 들은 게 있어 잘 알고 있다. 어르신께서 전직 호위기사단 소속 군인이시다. 반려분은 군 복무 시절 어르신의 호위 대상이라고 하셨었고.

그 이후로는 못 들었지만, 충분히 추측 가능한 영역이다. 군인으로서 임무 도중에 호위 대상과 사랑하는 건 현실적인 문제 탓에 힘들었을 테니, 전쟁이 끝난 이후였을 거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아니잖은가. 호위 임무가 끝난 후에도 사후처리에 관해 이런저런 일을 하셨을 거고, 어쩌면 지금 반려분을 몇 번 더 호위하셨을 수도 있고…

퇴역군인이 되기 이전부터 연애를 하셨을 텐데, 이 시절 얘기를 하는 게 금지되어있단 얘길 분명 하셨었단 말이다. 기도비닉 같은 거.

지금도 그 이유로 입을 다무신 것일 테고.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엘레나 양으로선 곤란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당황한 눈치였다.

“그게, 곤란하면 말씀 안 해주셔도 돼요! 저는 어디까지나, 그… 직업병이라서!”

“…아까 제약회사에서 일하신다고 말씀해 주셨었지요. 엘레나 양.”

“네! 제가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찬이 씨랑 하는 협업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그래서요….”

말하는 도중에 고개가 서서히 바닥을 향했고, 설득력도 똑같이 바닥을 쳐버렸다. 나랑 협업한단 얘기는 아까 못 들으셨던 건지 날 바라보며 묻는 어르신.

“두 분께서 협업을 하고 계셨습니까?”

“네. 처음부터는 아니었고, 손님으로 오신 후로 몇 번 더 오시다가 기회가 닿아서 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편돌이와 손님이었고, 오실 때마다 말이 좀 많으시길래 말을 받아줬다. 그러다 보니까 서로 편해지고, 지금은 이렇게 잡담도 하는 관계다.

간략하게 설명하자, 짐짓 생각하는 듯하던 어르신께서 운을 떼셨다.

“저도 시작은 두 분과 비슷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임, 아니. 업무로 만난 사이였지요.”

질문에 대답은 하되, 말을 골라서 대답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으신 것 같다. 어르신께서 운을 떼시자마자 고개를 홱 들어서는, 자세를 경건하게 바로잡는 엘레나 양.

나도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늑대인간 종족 군인과 정령 종족 마법사의 수십 년에 걸친 연애, 이런 썰 어디서 쉽게 못 듣는다.

“첫 만남에서는 제가, 좀… 무례하게 굴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어르신께서 말씀이십니까?”

“그 업무를 좋아서 시작했던 건 아니었거든요. 그땐 좀 더… 내게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때 하셨던 업무가 어떤 거셨나요, 어르신?”

“…창고를 관리하는 업무였습니다. 엘레나 양.”

호위 대상이 재고, 호위하는 공간을 창고라 지칭하시는 거라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비유가 꽤나 무미건조한 게 확실히 첫 시작이 내키진 않으셨었나 보다.

“제 반려는 그 업무의 동료였고 말이지요. 하여 그 창고에 둘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았었고, 제가 일이 싫다는 티를 자주 냈었습니다.”

“에고. 그럼 반려분께서는….”

“전부 다 웃으면서 받아주었지요. 철이 없던 그때는, 반려를 그저 실없이 웃기만 하는 여자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여하튼, 창고의 재고가 꽤나 중요한 물건이었고….”

관리하는 도중에 위험한 일들도 많았었고, 그러다 몇 번은 다칠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어르신께서, 때로는 반려분께서 서로 도와가며 어떻게든 해결해냈다는데.

“반려분께서 어르신을 도와주셨다고요?”

“예. 제 힘에 부쳤던 일이 두어 번 있었는데, 반려가 옆에서 절 도와줬었습니다.”

재차 대답해 주시는 게 확실히 도움을 받긴 받으셨던 게 맞는 듯한데, 아무래도 상상이 잘 안 된다. 어르신께서 호위를 하고 반려분께서 호위를 받는 역할이잖은가. 호위대상이 자길 지켜야 될 사람을 역으로 왜 도와줘?

도와줬다고 쳐도, 맨손으로 바위도 때려 부수는 지존고수인 어르신께서 힘에 부칠 일이 대체 뭐가 있었나 싶다. 심지어 그땐 나이도 젊으셨을 텐데…

“같이 일을 하면서 친해지셨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엘레나 양은 그저 낭만스럽기만 했는지, 손바닥마저 마주치며 중얼거리고 있다. 모르는 게 낫다는 말이 이래서 있는 거다.

“그 업무를 통해 서로에 대해 알게 됐고, 업무가 끝난 뒤에는… 음….

이 대목에서는 살짝 머쓱하셨는지 말을 아끼는 어르신. 촉이 오기라도 한 건지, 엘레나 양이 입은 옷의 날개뼈 부근의 쉴 새 없이 들썩거렸다. 날개를 파닥대는 건가 보다.

“고백하신 거예요? 어, 어느 분께서?”

“…서로 동시에 고백했었습니다. 놀라는 것도 동시였고, 기뻐하는 것도 동시였고, 평생 사랑하겠다 말했던 것도 동시였었지요.”

“어머,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그러면 그런 거지…

라는 대답이 목에 막히고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게, 나도 마음속에 낭만이란 게 아직 남아있긴 한 모양이다. 엘레나 양은 몸을 배배 꼬며 좋아 죽으려고 하고 있다.

머쓱함이 두 배가 되었는지 모자를 눌러쓴 어르신께서, 흠흠 목을 가다듬고는 마저 말을 이으셨다.

“여하튼. 그 후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연애를 하게 됐고, 연애하면서는 여러 일들을 겪었었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거라면….

어떻게 만나게 됐는가― 에 대한 게 끝났으니, 이젠 어떻게 연애를 하게 됐는지가 나올 차례다. 헌데 필터링에 걸리는 부분들이 좀 많았다.

“이전 업무에 관해 반려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업무로 힘들게?”

“예. 반려가 많이 힘들어해서, 저도 그 사람들에게 주의를 좀 주었었지요.”

“어휴, 퇴직하면 좀 곱게 보내주지. 아주 나쁜 사람들이네!”

이게 그 얘기가 아니라, 호위 업무가 끝나고도 찾아오는 암살자들 어깨를 어르신께서 손수 뽑아버리셨단 얘기 같은데 말이다.

“반려가 옛날부터 꽃을 좋아했었는데, 그때는 꽃을 구하기가 힘든 시기였었습니다. 그래서 반려가 좋아하는 꽃을 찾아 뽑아주기도 했었고….

이건 암살자들이 찾아오는 게 질려서 어르신이 직접 찾아가 어깨를 뽑아버리셨다는, 아니. 아닌가? 이건 진짜 꽃 얘기인가?

“…그러고 보니, 반려가 처음으로 제 어깨를 어루만지고 풀어줬던 것도 기억나는군요. 반려가 손이 무척 가녀린 편이어서, 어깨를―”

“어깨를요?”

“?”

“아, 아뇨. 말씀 끊어서 죄송합니다.”

이 마구니 씐 필터링만 아니었으면, 반려분이 처음 어깨를 풀어주셨다는 상황도 꽤 로맨틱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말야…

“어깨를 풀어주셨다는 거죠? 울프 어르신?”

“예, 엘레나 양.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길래 어깨가 이렇게 딱딱하냐며 반려가 투정을 부렸었는데, 그게 어찌나 상냥하게 느껴지던지.”

“와아….

“아무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지금까지, 반려와 지내며 뭔가를 참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요.”

이 말은 맥락이 좀 안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이었는데, 어르신 이야기에 마냥 좋아라 하던 엘레나 양이 우뚝 멈춘 걸 보고 깨달았다. 이건 일부러 이러신 거다.

아까 사랑과 인내에 관해 우리가 얘기하는 걸 들으셨으니, 자기 경험에 빗대어 조언을 해주려는 의도이신 거지. 말씀하시고는 인자한 어조로 마저 말을 잇는 어르신.

“반대로 반려는 미숙한 제 많은 점을 참아주었을 테고요. 저희 사랑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불합리한 사랑이었습니다.”

추측으로 때워야 할 정보들이 많아 보인다. 어르신께서 젊었을 때는 호위 임무를 하는 게 썩 내키질 않았다 하셨었고, 반려분께서는 그때부터 줄곧 온화하셨던 분인 듯하니…

둘 관계가 어르신께서 화를 내시거든, 반려분이 그 화를 온화함으로 감싸는 형태이지 않았을까 싶다. 솔직히 이 어르신께서 철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진 않지만, 직접 말씀하셨으니 있기야 했겠지.

한쪽이 일방적으로 자기주장을 하고 한쪽이 인내하는 것. 이 초창기의 사랑은 엘레나 양이 추구하는 진실된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반려를 위해서라도 제가 변해야만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변하려고 노력해왔고, 지금은 반려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까지는 됐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 한참 멀었기는 합니다만….

“처음엔 참기만 하던 사랑이, 나중엔 그렇지 않게 됐다는 말씀이신가요?”

“예, 엘레나 양. 처음에 잘된다 싶었던 사랑이 나중에 안 풀리듯,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노력한다면요.”

왜, 그런 말이 있잖은가. 결혼하면 철든다.

연애 관계에서 서로를 참는 게 선택이라면, 결혼한 뒤에는 그게 의무가 된다― 어쩌고저쩌고. 이걸 지금까지는 믿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선택적인 단계조차 못 버틴 관계가 어떻게 결혼까지 이어져?

헌데, 그 실사례를 직접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 생각에 잠긴 엘레나 양과 날 번갈아 보던 어르신께서, 한마디를 더 덧붙이셨다.

“두 분이시라면, 저보다는 훨씬 괜찮게 시작하신 편이기도 하고요.”

이건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신가 싶어 눈만 끔벅였는데, 생각하다 보니 아까 하셨던 말 중 하나가 떠오른다. 어르신께서 연애를 시작하셨을 때, 시작은 두 분과 비슷했다고…

“저희 시작이고 뭐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어르신??”

“…예? 그게 사실입니까?”

“그런 건 좀 조심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어르신. 그런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안 그래요?”

“…….”

“아니, 상처가 됐다고 대답을 하셔야지 왜 말이 없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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