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화 (2/582)

제1화. 우연보다 인연 (1)

병실 문 앞에 선 케일리는 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했다.

‘돈을 생각하자, 케일리. 이 아이 보호자만큼 돈을 많이 주는 사람도 없어.’

매달 통장에 찍히는 액수를 떠올린 케일리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아무런 소음 없이 문이 열렸는데도, 침대 벽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소년이 문가로 고개를 틀었다.

활짝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소년의 검은 머리와 왼쪽 뺨, 하얀 종이책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지극히 평온한 광경 속에서 케일리는 축축한 손끝을 말아 쥐다가, 이내 풀고선 평소보다 높은 톤의 목소리를 내었다.

“안녕, 도현! 오늘도 책 읽고 있었어?”

어딘가 어색한 밝은 인사.

도현이 보일 듯 말 듯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만 기다려. 우리 같이 읽자.”

케일리는 재킷을 벗어 행거에 걸고 병실 안에 있는 화장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묘하게 느린 움직임으로 도현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로 걸어가며 수없이 했던 생각을 또다시 떠올렸다.

‘왜 이 아이가 이렇게나 싫은 걸까?’

도현을 만난 지 일 년.

매일같이 묻는 질문이었으나, 케일리는 아직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아이를 좋아한다. 더군다나 도현과 비슷한 나이의 자식이 있었다.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동정심이 많았다.

아픈 사람을 안타까워할 줄 몰랐다면 간병인이라는 직업을 여태껏 하고 있지 못했을 테니까.

‘그런데 왜?’

케일리는 도현을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미 간병인들 사이에서 도현에 대한 소문이 조금씩 퍼지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맡기 싫다는 꺼림칙한 아이.

그게 케일리가 들은 도현의 이야기였다.

케일리는 그 소문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이가 동양인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멍청한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낸 소문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 무례하고 못된 사람들에게 상처받았을 아이를 잘 보살펴야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 다짐은 도현을 만난 순간 완전히 무너져 내렸지만.

‘이렇게 얌전하고 착한 아인데….’

케일리는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고 머릿속을 털어내며 자리에 앉았다.

“이번 책은 제목이 뭐야?”

“<데미안>이에요.”

고작 8살짜리 아이가 읽기에는 어려운 책.

그러나 케일리는 익숙하게 대답했다.

“계속 읽을 거야? 아니면 놀이하고 싶어?”

케일리의 물음에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도현의 검은 눈동자가 희미한 빛을 품었다.

도현이 전보다 조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이할래요.”

여전히 아이치고는 차분한 음색이었지만, 그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설렘을 발견한 케일리가 자신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무표정했던 아이의 얼굴에 살그머니 떠오른 감정은 거부감도 순간적으로 잊을 정도로 굉장히 사랑스러웠다.

단순히 어린아이라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예쁜 아이는 정말 처음 봤어. 동양의 아이라 그런가?’

병실 밖으로 자주 나가지 않아 창백할 정도로 흰 뺨은 조금 아파 보였지만, 그렇기에 더욱 신비로워 가끔은 요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와 상반되게 먹물처럼 검은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은 시선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끔 별을 품은 것처럼 빛나는 눈동자는 케일리가 살면서 처음 보는 아름다움이었다.

케일리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평범하게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부터 보면 돼?”

“여기요. 저는 싱클레어를 맡을 거예요. 케일리는 크로머를 해주세요.”

도현이 편 부분은 아직 초반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케일리가 도현의 옆으로 좀 더 가까이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럼….”

큼큼. 케일리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크로머의 대사를 읽었다.

“그 얘기, 진짜야?”

연기라고 하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그저 문장을 읽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도현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 변화에 케일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싱클레어가 된 도현이 대답했다.

“당연하지!”

짧은 대답에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마음과 동시에 불안함이 담겨 있었다.

목소리는 조금도 떨리지 않았지만,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동자와 굳은 어깨가 도현이 지금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몇 번을 봐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까까지 자신의 옆에 있었던 도현이 완전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넋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을 참아낸 케일리가 간신히 다음 대사를 읽었다.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고?”

“그럼. 진짜로 있었던 일이야.”

큰소리로 대답한 도현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눈가에서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 순간 도현은 싱클레어였다.

대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이들 사이에 끼고 싶어서 거짓말을 해버린 싱클레어와 그런 싱클레어를 쥐고 흔드는 크로머의 대사가 이어지자 케일리는 자신이 정말 어린 소년을 붙들고 협박하는 치졸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정말 돈은 조금도 없어. 대신 다른 물건이라면 얼마든지 줄게. 내 인디언 책과 병정들과 나침판을 가져.”1)

거짓으로 몸을 부풀리는 것마저 실패한 어린아이가 이윽고 나약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소년이 느끼는 불안과 걱정, 자책, 공포가 섞여 들어 케일리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도현의 얼굴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그렇게 케일리는 크로머가 되고,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고, 데미안이 되면서 싱클레어를 상대했다.

팔락팔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와 도현과 케일리의 대사 소리가 쉼 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목이 아파진 케일리가 마른기침을 내뱉자 다음 대사를 하려던 도현이 멈칫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완벽한 싱클레어였던 도현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케일리. 같이 해줘서 고마워요.”

“어… 그, 그래.”

병실 안에 적막이 찾아들고 케일리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까지 데미안이 되어 싱클레어와 걷고 있었던 케일리는 눈앞에 보이는 병실의 풍경에 현실을 인식했다.

그런 케일리의 눈에 홀로 책을 읽기 시작한 도현이 들어왔다.

‘아, 또다.’

무언가에 홀렸다가, 현실 세계로 내팽개쳐진 느낌.

아까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던 꺼끌한 불쾌감이 케일리의 목 뒤를 갉작였다.

“물 좀 마시고 올게.”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케일리가 물을 핑계로 냉장고로 걸어갔다.

시원한 물잔을 든 케일리가 흘끗- 소년을 훔쳐보았다.

놀이를 할 때면 완전히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그걸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그만두고 싶었는데,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

그건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눈앞에 도현이 아닌 싱클레어가 있는 것 같은 감각.

꼭 책 속의 세계에 빠진 앨리스가 된 것 같았다.

‘무슨 동화 같은 생각을…. 내가 에릭도 아니고.’

동화 속 세상이 실존한다고 믿고 있는 여섯 살배기 아들을 떠올린 케일리가 고개를 저었다.

할 일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케일리가 책을 읽는 도현을 슬쩍 보고 과일을 깎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입이 짧은 아이가 유독 잘 먹는 과일.

죄책감에 뭐라도 해주고 싶어 연습한 과일 깎기가 날이 갈수록 실력이 늘어 이제는 온갖 모양으로 깎을 수 있게 되었다.

섬세하게 사과를 깎아내던 사이, 병실 문이 열렸다.

케일리의 눈이 문을 향하고 책을 읽던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하얀 가운을 걸치고 안경을 쓴 지적인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도현은 갑자기 등장한 자신의 담당 의사에 조금 의아한 눈빛을 했다.

“안녕하세요, 도현.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요새 산책은 좀 해요?”

“네. 하루에 한 번 앞에 있는 공원을 돌고 와요.”

벤자민이 도현의 말에 미소를 띠었다.

2주 전, 갑작스러운 발작이 찾아온 도현은 일주일 가까이 침대를 벗어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리고 갑자기 찾아왔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진 고통에 도현은 금세 회복하고 있었다.

도현의 차트에 적을 내용을 떠올리며 벤자민은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온 건 도현에게 알려줄 소식이 있어서예요.”

“소식이요?”

“네. 혹시 지난번에 도현과 비슷한 증상을 겪는 환자가 한국에 있다고 한 얘기 기억나요?”

도현은 현대 의학이 발견해내지 못한 희귀병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도현과 같은 병을 가진 환자는 전 세계에서도 도현밖에 없는 터라 희귀병과 관련해서 연구에 앞장서는 위더스 희귀질환센터로 옮긴 지 벌써 6년이었다.

그리고 2년 전, 도현과 같은 병으로 추정되는 환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놀랐던 도현은 그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기억나요.”

“그 환자가 도현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병원으로 옮긴다는군요. 일주일 후에 도착할 거라고 들었어요.”

그 말에 도현은 금방 상황을 짐작했다.

“병세가 심해졌나 보네요.”

아이 같지 않은 상황 판단력에 조금 놀란 벤자민은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음, 그래요. 한국에 있는 병원에서 케어하기 어려워서 도현을 오랫동안 케어한 우리 병원으로 옮기는 거죠.”

이 아이가 영특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아이답지 않은 모습을 볼 때마다 놀라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벤자민은 지금까지 수많은 환자를 맡아왔고, 그중 도현의 또래도 상당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도현이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하고, 똑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환경 때문일 수도 있고,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느 것 때문이든 이렇게 뛰어난 아이가 병원에 갇혀 나가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벤자민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고 말했다.

“지금까지는 도현밖에 없었지만, 사례가 한 명 더 느는 거니까 연구에 좀 더 성과가 생길 겁니다.”

한 명이나 두 명이나.

병을 앓는 사람이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해결책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다.

벤자민은 도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장 노력하는 사람이니까.

‘그게 날 위해서라기보다는 미지의 것을 정복하고자 하는 연구자로서의 욕망 때문이지만.’

무감히 벤자민을 바라본 도현이 대충 수긍했다.

아무런 기대 없는 도현의 기색에도 벤자민은 기뻐 보였다.

“아, 다음 주에 도착하면 혹시 만나보지 않을래요? 도현이랑 같은 한국인이기도 하고요.”

어쩐지 벤자민은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그의 제안이 끌리지 않았다.

짧게 고민한 도현은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병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무얼 하나 싶었다.

도현의 거절에 벤자민은 아쉬워하면서도 도현의 의견을 존중했다.

벤자민이 나간 자리를 보던 도현은 생각에 잠겼다.

‘나랑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라….’

정말 병이 나을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든 생각에 도현이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도현은 머릿속에서 벤자민의 말을 지웠다.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 바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 『Demian』, Hermann Hesse, 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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