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우연보다 인연 (2)
밖에 나오니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도현이 혼자 밖으로 나왔다는 걸 간호사가 안다면 한 소리 듣겠지만, 들키기 전에 조용히 나왔다가 조용히 들어갈 예정이니 상관없었다.
도현은 자주 가는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병원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은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자주 산책하는 공간이었다.
하얀 병원복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좋았다.
작게 나 있는 오솔길을 걷다가 가빠져 오는 숨에 벤치에 앉은 도현은 멍하니 제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정답게 웃으며 가는 가족의 얼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찌푸린 얼굴.
잔뜩 지쳐서 피로한 얼굴.
서로에게 장난치며 웃는 연인의 얼굴.
도현의 표정이 마주치는 이들의 얼굴을 따라 다양하게 변했다.
가면을 마음대로 바꿔 쓰듯이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소년의 표정이 계속 바뀌는 것은 기이한 광경이었지만, 벤치 옆 가로등 조명이 고장 난 상태라 아무도 그런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변화하던 도현의 표정이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에 멈췄다.
[엄마]
한 달 만에 핸드폰 화면에 뜬 발신자의 이름에 도현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파란 전화기 모양을 누른 도현이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 …아. 도현아, 받았구나.
자신이 전화했음에도 어딘가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도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 그래. 몸은 좀 어때?
얼마 전에 침대에서 나오지조차 못했던 도현이었지만, 엄마가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현은 별다른 감흥 없이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괜찮아요.”
- 케일리랑은 잘 지내고?
“네.”
- 그래. 잘 지낸다니 안심이 된다. 좋은 사람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멀리 있어서 엄마랑 아빠가 같이 있어주지 못하잖니.
그 말에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도현의 반응에 수화기 건너편에서 변명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 엄마랑 아빠도 도현이가 많이 걱정돼서 같이 있어주고 싶은데, 일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 알지?
“…네. 알고 있어요.”
- 그래.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하고….
말끝을 조금 흐린 목소리가 잠시 멎더니 조금 후에 뒷말을 이었다.
- 그럼 엄마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다, 도현아.
“네.”
- 그…럼 이만 끊을게. 잘 지내렴.
도현은 그 말을 끝으로 끊긴 전화에, 귀에 가져다 댄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욱여넣고 벤치에서 일어나 산책을 계속했다.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같아 보였지만, 다섯 걸음 정도 옮긴 도현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산책하고 싶은 기분이 사라졌다.
‘그냥 돌아가야겠다.’
병실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데, 시야에 비틀거리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취객인가?’
저녁 시간이었기 때문에, 술을 먹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지는 않았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인데 이상하게도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기이한 무언가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겪는 감각에 도현은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도현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단순히 취객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어느새 발걸음이 빨라졌다.
“저기요! 괜찮아요?”
남자가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도현의 눈이 커졌다.
남자는 도현과 같은 동양인이었다. 게다가, 얼굴과 목이 땀으로 완전히 젖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현이 다급하게 말했다.
“내 목소리 들려요? 바로 앞이 병원이에요. 사람을 부를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부르지 마.”
“네?”
“사람이든 뭐든, 부르지 말라고.”
도현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저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하고 아무도 부르지 말라는 말을 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새 타인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으으.
남자의 신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제가 부축할 테니까 병원으로 가요.”
“됐…어.”
남자의 말에 속이 답답해졌다.
심각한 표정의 도현을 본 남자가 픽- 웃었다. 그 웃음에 도현은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아니, 네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윽. 쪼…그만 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웃기잖아.”
그 말에 도현이 눈살을 구겼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한다는 게 쓸데없는 말이었다.
‘이상한 사람.’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도현의 표정에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 번 더 웃은 남자가 도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갑작스러운 접촉에 도현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뭐 해? 부축해 준다며?”
“…아, 네. 그럼 병원으로….”
도현이 어색하게 남자의 팔을 붙잡고 발을 옮기려 했지만, 남자의 말이 막아섰다.
“아니 병원 말고. 아. 저기 벤치가 좋겠네. 저기로 데려다줘.”
“병원은 어쩌고요?”
“그냥 조금 쉬면 돼.”
도현은 남자의 말이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남자가 쉽게 고집을 꺾을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남자를 부축해서 벤치로 데려갔다.
남자와 도현의 키 차이가 컸기 때문에 거의 제 발로 걷는 수준이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열심히 발을 움직이는 도현을 본 남자가 슬그머니 웃음을 삼켰다.
풀썩-
남자가 벤치에 쓰러지듯 앉았다.
도현은 그 앞에서 머뭇거렸다.
‘지금이라도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만큼 남자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도현이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남자가 제 옆자리를 두들겼다.
“너도 이리 와서 앉아.”
조금 고민하던 도현이 남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벤치에 앉아 뒤늦게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도현은 남자가 생각보다 젊다는 것을 깨달았다.
20대 초중반 정도 되었을까.
낯선 사람이 자신과 가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조금 시간이 흐르자 고통에 일그러졌던 눈썹이 가지런한 모양을 되찾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여기서 같은 동양인을 볼 줄은 몰랐네. 난 정희성이야. 너는?”
도현은 정희성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도현은 영어를 그만두고 한국어로 대답했다.
“전 이도현이에요.”
갑작스럽게 들린 한국어에 정희성이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어? 너도 한국인이야?”
“네.”
엄밀히 말하면 이중 국적이었지만, 한국인이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우연이네. 공원에서 만난 꼬맹이가 같은 국적이라니. 한국어 듣고 반가운 기분이 든 건 처음이야.”
도현도 이곳에서 한국어로 대화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너는 여기 왜… 아.”
정희성은 뒤늦게 도현의 옷을 발견하고 말을 흐렸다.
도현은 그 반응을 익숙하게 넘겼다.
“신기한 우연이네.”
“왜요?”
“나도 그 병원 환자거든.”
정희성의 말에 도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정희성은 그 표정이 놀란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도현의 시선이 정희성의 바지 밑단에 닿았다.
긴 코트를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슬쩍 보이는 옷 끝이 도현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무슨 일로 입원했는데요?”
“병 때문에. 조금 희귀한 병을 갖고 있어서. 아, 옮는 건 아니야.”
그 말에 도현은 깨달았다.
병원에서 오랫동안 있었던 도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희귀병을 앓는다는 사람.
‘벤자민이 말했던 사람이 이 남자구나.’
그렇다면 도현이 정희성을 본 적이 없던 것도 납득이 갔다. 이 남자는 여기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니까.
생각을 이어 나가던 도현은 자신이 이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파 보여서?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라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신의 행동을 추론해 보려던 도현은 제 옆에 편히 앉아 있는 정희성을 보고 몸을 굳혔다.
나를 피하지 않아서.
정희성은 도현을 전혀 꺼리지 않고 있었다.
그래, 너무 자연스럽게 자신을 대해주었기 때문에 이렇게나 신경이 쓰였던 거였다.
도현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제가 불편하지 않아요?”
말을 하고서 도현은 조금 아차 싶었다.
‘갑작스럽게 이런 질문을 뱉으면 당황스럽겠지. 대답하기도 어렵고.’
도현이 말을 덧붙여 수습했다.
“그냥 제가 옆자리에 있는 게 불편하면 자리를 비켜 주겠다는 소리였어요.”
이제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겠지.
도현은 정희성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답은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왜? 그냥 거기 앉아 있어.”
심드렁한 말투, 심드렁한 표정.
도현이 진심을 가늠하기 위해 정희성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제가 불쾌하게 느껴지잖아요. 솔직하게 말해도 상관없어요.”
“허어?”
정희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내가 날 도와준 어린애를 싫어할 만큼 쓰레긴 아니거든?”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무슨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나는 네가 싫지 않고, 계속 거기 앉아 있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오히려 내가 더 신기한데….
정희성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도현이 되물었지만, 정희성은 대답하지 않고 묘한 미소로 대신했다.
도현이 이상한 기분을 억누르며 눈을 깜빡였다.
부모님조차 꺼리는 아이.
그게 자신이었다.
도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는 벤자민도 도현과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케일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케일리 이전의 간병인은 더했으니 케일리를 탓할 것도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차츰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걸 포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에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계속해서 뻗어져 나가던 도현의 생각이 강제로 멈춰졌다.
도현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정희성이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린애는 심각한 고민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도현이 무어라 대답하려던 순간 도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든 도현은 화면에 뜬 이름에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
“전화 안 받아?”
그 말에 도현이 느릿하게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도현! 어딜 간 거야!
“공원에 왔어요, 헬리아.”
- 혼자 산책은 안 된다고 했잖아.
“죄송해요.”
들키지 않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완전히 망해버렸다.
- 하아, 정말…. 공원이라고 했지? 가만히 있어! 내가 그쪽으로 갈게.
“아니에요. 지금 바로 들어갈게요.”
빨리 가겠다는 말로 간신히 설득한 도현은 돌아갔을 때 헬리아에게 붙잡혀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조금 기운이 빠졌다.
“너 몰래 빠져나온 거야?”
“…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에 담담한 음색이었지만 정희성은 왠지 축 처진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정희성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더 혼나기 전에 얼른 들어가 봐.”
“그쪽은요?”
지금은 안색이 좋아졌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쓰러질 뻔했던 사람이었다.
같은 병을 앓고 있었기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때로는 순식간에 고통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다시 찾아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도현의 물음에 정희성이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나도 같이 들어갈까, 그럼?”
“네.”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나온 대답에 정희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으쌰- 하는 소리와 함께 정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식은땀을 흘릴 만큼 아팠던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멀쩡해 보였다.
‘괜찮은 건가.’
도현이 조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정희성을 보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누군가와 부정적인 감정 없이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 처음인 도현은 어느 순간 정희성의 상태에 대해 잊고 그 대화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눈 깜짝할 새에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공원에서 병원까지 이렇게 가까웠었나.
도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금 더 있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은 도현뿐인 것 같았다.
어느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정희성이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몇 층이야?”
조금 서운해진 도현이 살짝 처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7층이요.”
“7층? 나도 7층인데.”
“…그래요?”
도현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몇 호인데요?”
“714호. 너는?”
“703호요.”
“같은 병원인 것도 모자라 같은 층을 쓸 줄이야. 신기하네.”
“그러네요.”
도현이 조금 신이 나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추고 자신의 병실 앞에 멈춰 선 도현이 정희성을 돌아보았다.
도현이 조금 머뭇거리며 자신을 쳐다보자 정희성은 천천히 도현을 기다려 주었다.
“그….”
“응. 왜?”
잠시 심호흡을 한 도현이 떨리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일 병실 찾아가도 될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정희성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 반응에 도현은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괜히 말했어. 그냥 평소처럼 지나치면 될 걸 혼자 신나서….’
도현이 마음속으로 자신을 탓하고 있는데 얼음처럼 굳어 있던 정희성이 갑자기 유쾌하게 웃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웃음 짓는 것이 처음이라 도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응, 놀러 와.”
도현은 왠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눈앞에 있는 남자도 울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오늘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서 너무 감성적이게 된 것 같았다.
도현은 애써 생각을 털어냈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정희성의 말에 도현이 조금 긴장했다.
조건이라니?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지 조금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도현을 보고 정희성이 빙그레 웃었다.
“형이라고 불러. 정 없이 그쪽이라고 하지 말고.”
“…형이 아니라 삼촌 아니에요?”
말간 도현의 눈빛에 정희성은 조금 양심이 찔린 기분이 들었지만 꿋꿋하게 의견을 내세웠다.
“그러면 놀러 오지 말든가.”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유치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한 도현이 살짝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어요, 형. 내일 봐요.”
“어어. 그래.”
인사를 마친 도현이 방에 들어가고 손을 흔들며 도현을 배웅했던 정희성이 손을 내렸다.
굳게 닫힌 문을 보던 정희성이 생각했다.
그거 혹시 한심해하는 기색이었나…?
정희성이 얼빠진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