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우연보다 인연 (5)
정희성은 악마에게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도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
도현이 친절하게 책을 펼쳐서 주었지만, 읽을 새도 없이 시작한 도현의 연기에 한 줄도 읽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금 도현이 연기하는 인물이 누군지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우아하게 등을 곧게 편 도현이 촛불을 들고 있다. 촛불을 든 손, 턱의 각도, 곧게 세운 목 하나하나에 기품이 서려 있다.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두 눈은 이상하게도 뿌옇다.
시체 같은 눈동자가 뱀처럼 미끄러진다. 두 손은 하얗기만 하지만, 도현의 눈에는 붉게 흐르는 핏물이 비친다.
“여기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네.”
촛불을 내려놓고선 손을 씻는 동작을 했다. 도현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린다.
손을 씻는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의아함은 곧 공포로 변하고.
“흐으, 흐아아아악!”
죽음을 닮은 비명이 날카로운 송곳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심장을 긁어내리는 절망에 정희성은 순간 숨조차 멈추었다. 그러나 도현의 연기는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붉게 물드는 두 손에 도현은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워져라, 저주받을 흔적이여! 내가 말하지 않느냐!”
두 손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목소리에 담긴 숨길 수 없는 절박함에, 그 광기가 두렵기보다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 순간.
도현의 입꼬리가 부드러이 올라갔다.
부인의 귓가에 망령이 속삭인다.
그녀의 과거의 망령이다.
“아아, 그래. 이제 결행할 시간이 되었어요. 지옥은 어둡구나. 저런, 폐하, 저런! 군인이시면서 뭐가 두려우세요? 우리에겐 권력이 있어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도현이 허공을 보고 겁에 질린 아이를 달래듯이 다정하게 말한다.
그러나 기품이 서린 고운 미소에도 공기를 타고 흐르는 기묘한 긴장감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묘하게 흩어진 목소리가 섬뜩했다.
기품이 서렸던 미소가 순식간에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정희성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 늙은 왕의 몸 안에 그리도 많은 피가 들어 있을 줄은?”
도현이 우습다는 듯이 웃었다.
‘…미친.’
정희성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꼬맹이한테 악마가 씌었다는 게 현실성 있게 느껴졌다.
웃을 때보다 무표정할 때가 더 많고, 어린애 주제에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게 눈에 훤히 보이던 아이였는데.
대체 지금 도현이 발산하는 다채로운 감정들은 무어란 말인가.
정희성은 도현의 감정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그사이, 공포에 사로잡혀 손에 묻은 피를 보던 도현의 기세가 또 한 번 변하며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그만두세요, 나의 왕이시여. 그만두세요! 그리 겁을 내시다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아요!”
커억.
도현이 갑자기 목을 부여잡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두 손으로 목 주변을 더듬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정말로 목이 졸린 사람 같았다.
뒷걸음질 치던 도현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바닥에 허물어져 주변을 더듬거리며 방황하던 도현의 시선이 자신의 손끝에 닿자, 정희성은 어디선가 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두 눈이 혼탁해졌다.
“아직도 이 손에 피비린내가 나는구나. 아라비아의 온갖 향수를 덧칠해도 이 작은 손에 단 향을 나게 하지는 못하리라!”
고통에 가득 찬 목소리와 바닥을 긁어내리는 몸짓은 더 이상 왕비의 품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욕망을 탐하며 불에 뛰어들어, 까맣게 타버린 어리석은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희성이 몸을 잘게 떨었다. 저도 모르게 이불을 꽉 쥐었다.
맥베스 부인.
이 정적은 파멸을 앞둔 맥베스 부인의 마지막 평온이었다.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던 맥베스 부인은 다가온 지옥 앞에서 기묘한 평온을 유지했다.
“폐하, 어서 손을 씻고 잠옷을 입으세요. 그리 창백한 얼굴은 하지 마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뱅쿼는 땅에 묻혔어요. 그는 무덤에서 나올 수 없어요.”
비틀거리며 일어난 도현이 보이지 않는 형상에게 손을 뻗었다.
“폐하, 이리 오세요. 침실로 가요.”
그러나 평온을 깨트리려는 것이 있었다.
“아!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마지막까지 떨쳐내지 못한 그녀의 망령이었다.
도현은 점점 초조해진다. 다시 망령이 자신을 덮치기 전에, 아득한 공포가 몸을 지배하기 전에.
그 전에.
“자, 자, 자! 손을 이리 주세요. 이미 일어난 일을 돌이킬 수는 없어요. 자, 가요. 침실로, 침실로, 침실로!”1)
도현이 어딘가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눕기라도 하듯 쓰러져 내렸다.
그 전에 이 지옥을 벗어나리라.
정희성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현아!”
놀란 정희성이 도현에게 달려갔다.
저건 연기다.
연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다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정희성의 부름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의 얼굴을 본 정희성은 긴장이 탁-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 왜 그래요?”
당황한 소년의 얼굴은 방금까지 축축한 죽음의 냄새를 풍기던 여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어서 정희성이 도현을 꽉 껴안았다.
갑작스럽게 정희성에게 안긴 도현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놀랐잖아.”
“그렇게 놀랐어요? 미안해요.”
“연기를 한다는 게 맥베스 부인이라니. 게다가 골라도 그런….”
아까는 도현의 연기에 집중하느라 못 느꼈는데, 다시 생각하니 어이가 없었다.
“재밌지 않아요? <맥베스>. 좋아하는 책이에요.”
그 말에 정희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도현이 슬그머니 웃었다.
“장면은 의도한 게 아니에요. 그냥 펼쳤는데 그 부분이 나왔어요.”
“넌 진짜… 어휴, 됐다. 내가 이걸 때릴 수도 없고.”
그렇게 말한 정희성은 굉장히 소중한 것을 안듯이 도현을 감쌌다. 정희성은 생각했다.
정말 여러모로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꼬맹이다.
아무리 무작위로 나온 부분을 연기했다지만, 그런 연기라니.
한숨을 내쉰 정희성은 문득 든 의문에 생각을 되짚었다.
무작위로 나온 부분?
정희성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너 설마, 책을 다 외우고 있어?”
정희성이 어깨를 부여잡아서 품에서 떨어진 도현이 사라진 온기를 아쉬워하며 대답했다.
“그냥 자주 읽어서 그래요.”
도현의 얼굴은 태평해 보였다.
“그럼 다른 장면도 모두 대사를 외웠어?”
“일부러 외운 건 아닌데, 그렇긴 해요.”
이 작은 꼬맹이는 까도 까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너 혹시 천재라는 말 많이 듣냐?”
“글쎄요. 케일리는 제가 똑똑하다고 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정희성은 그 말뜻을 깨달았다.
‘아마, 남들과 자신을 비교할 기회가 없었던 거겠지.’
정희성은 금방 침착해졌다.
천재든 영재든 범재든, 도현은 도현이었다. 그런 것 따위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사실인 것이다.
“그보다, 어땠어요?”
정희성은 도현의 천재성에 대한 생각을 훌훌 털고선 대답했다.
“어떻긴 뭘. 심장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지. 너처럼 연기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정말요?”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흥분으로 볼을 발갛게 물들인 도현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거 말고요.”
정희성은 도현의 말에 멈칫했다.
참 맹랑한 꼬맹이였다.
이런 식으로 정면으로 부딪쳐 오면, 정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멋있던데?”
“형, 그게 아니라.”
“네가 이겼어.”
그 말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앞에서 그런 연기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버텨?”
정희성의 심장은 아직도 쿵쿵- 세게 뛰고 있었다. 단지, 도현이 정말로 잘못될까 봐 걱정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는 듯, 고작 8살밖에 되지 않은 게 생의 불꽃을 태우는 것처럼 연기하는데 떨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도현이 어깨를 늘어트린 순간부터 정희성은 손이 간지러웠다.
도현이 연기하는 내내 그에게 눈조차 뗄 수 없었으면서 손가락은 요동쳤다. 꼭, 연주라도 하듯이.
이 꼬맹이한테 완전히 말려들었다.
정희성은 패배를 인정했다.
“내가 졌어.”
그 말에 도현이 환하게 웃었다. 그늘 한 점 없이, 오로지 기쁨만이 담긴 웃음이었다.
처음 보는 찬란한 웃음에 잠시 멍하니 있던 정희성이 이내 도현을 마주 보고 웃었다.
도현을 감싸 안았던 팔을 풀고 일어난 정희성이 도현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넣어 들어 올렸다.
붕 뜬 몸에 경직되어 버린 도현을 그대로 자신의 침대 위에 올려놓고, 옷장으로 걸어가서 옷장 문을 열었다.
옷걸이에 걸린 옷 사이로 하얀 케이스가 보였다.
놓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 여기까지 가져온 그의 바이올린이었다.
잠시 복잡한 눈빛으로 케이스를 보던 정희성이 손을 뻗어 그것을 꺼내었다.
정희성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챈 도현이 기쁨과 설렘으로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케이스를 열자, 그와 아주 오랜 시간 함께했던 친구가 보였다.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집자 손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몸체에 그리움과 안정감이 몰려 들어왔다.
‘내가 이걸… 어떻게 놓고 살았던 걸까.’
정희성의 손이 능숙하게 4개의 줄을 줄걸이 틀의 윗부분에 걸리도록 놓았다.
줄이 브리지와 지판, 흑단으로 만든 너트 위를 지나 줄감개로 팽팽하게 감겼다. 활 털도 줄걸이 틀에 걸고 송진을 꺼내 활 털에 슥슥 문질렀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A현을 그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맞지 않는 음정에 긋고 조율하고 긋고 조율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네 개의 현이 모두 조율되었을 때.
거침없는 손길을 따라 활이 현을 가로질렀다.
튜너를 사용하지 않고 조율했음에도 음정은 안정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단 한순간도 현의 음색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일 년 동안 쉰 손은 생각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처럼 어딘가 어색하고 뻣뻣했다.
그럼에도 정희성은 멈출 수가 없었다.
바다를 막아놓은 댐은 한번 부서지는 순간 쏟아지는 물줄기를 감당할 수 없다. 정희성은 부서진 댐이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연주가 시작되었다.
제목은 없었다.
단지 지금 그의 심정을 연주할 뿐이었다.
불안정했던 음정은 그의 거침없는 활의 움직임을 따라 점점 힘을 되찾아 갔다.
‘그래, 이 소리였어.’
정희성이 눈을 감았다. 지금 그의 심정을 쏟아내지 않는다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는 절박하게, 연주를 이어갔다.
도현은 날카롭게 내리꽂는 음색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현은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어린 소년의 세계는 무척이나 좁고 한정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도현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정희성의 연주에서 분명한 심상이 전해져 왔다.
연주하고 싶다는 열망.
이 순간 모든 것을 쏟아 내겠다는 의지.
정희성은 도현을 이해했고, 도현도 정희성을 이해했다.
단순한 차원의 교감을 넘어선 무언가가 둘 사이에서 일어났다.
연주를 이어 나가는 정희성의 왼쪽 눈가가 일그러졌다.
처음 겪는 감각에 도현이 자신의 심장을 부여잡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했다.
연주가 절정으로 치닫고,
도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잔잔한 호수처럼 흐르는 맑은 하늘빛의 무언가가 자신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강렬하게 몰아치는 불꽃 같은 노을색의 무언가가 정희성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 기운이 요동치며 섞이려는 순간.
【찾았다! 이상한 영혼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