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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7)화 (8/582)

제7화. 우연보다 인연 (7)

침대 앞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빛이 퍼지고 모이기를 반복하며 마구 뭉친 찰흙 같은 모양이 되었다.

【네가 기다리고 있으라고 계속 중얼거렸잖아! 귀청 떨어지는 줄 알았다!】

덩어리가 어딘가 심통 난 기색으로 몸을 부풀렸다가 쪼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역시 듣고 있었군.”

【그 정도로 내 머릿속을 테러했으면서 그게 할 말이냐!】

억울한 덩어리의 말에도 정희성은 개의치 않았다. 몇 번 심호흡을 한 정희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부탁할 게 있어.”

정신없이 움직이던 덩어리가 정희성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일주일 뒤에, 도현이를 살려줘.”

그 말에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덩어리가 흐으음- 하는 긴 침음을 흘렸다.

【작은 인간도 그렇고, 작지 않은 인간도 그렇고.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그 말에 정희성이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일 년 동안 잡지 않았던 바이올린을 쥔 게 방금 전이었다.

아직도 그 순간의 열기가 생생했다.

덩어리가 살 수 있다고 했을 때, 동생과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과 다른, 오랫동안 바라고 바랐던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 저는 잃을 게 없어요.

도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온몸의 장기가 짓눌리는 끔찍한 기분이었다.

도현이 그대로 사라진다면.

‘아니야.’

정희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꼬맹이의 끝일 리가 없었다.

그 작은 아이가 손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쥐고, 삶을 아쉬워하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삶’을 주고 싶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을 리가 없잖아. 지금도 말을 철회하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정희성이 실실- 웃었다.

“근데 나는 좀 오래 살았잖아. 28살이면 말이야, 먹은 음식 종류만 해도 내가 훨씬 많을걸. 아마 꼬맹이는 치킨도 먹어본 적이 없을 거야.”

덩어리는 작지 않은 인간에게 집중했다.

해질녘 노을 같은 영혼이 빛을 발하며 일렁이고 있었다.

우주 속 은하수처럼, 바닷속 물고기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는 영혼은 덩어리조차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웠다.

겨우 인간의 영혼에 불과했지만, 온 세상을 뒤덮는 태양의 그림자를 마주한 것 같았다.

인간들은 너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던가.

덩어리는 그런 인간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될 것 같았다.

“한 번도 어디에 놀러 간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 그 애의 세상은 병원이 전부야. 찾아오는 부모님을 본 적도 없어. 나랑 같은 처지라 했으니, 뭐, 알 만하지만.”

정희성의 말이 뚝 끊겼다.

말을 하는 것조차 괴롭다는 듯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

“그렇게 죽는 건 좀 아니잖아.”

누군가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다.

【네 영혼이 합쳐진다고 해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죽음이 아니란다. 보다 광활한 의미에서 존재의 죽음이란, 영혼이 성질을 잃는 것을 뜻하는데, 너는 섞일 뿐이지 잃는 건 아니거든. 그냥 주도권의 문제인 거지.】

덩어리는 저도 모르게 위로하듯 말했다.

생명의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는 존재로서,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생명을 관장하는 이로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네 삶의 조각들은 작은 인간에게 흘러갈 거야. 죽음이 아니라, 변화라고 할 수 있지.】

그 말에 정희성이 피식- 웃었다.

“그래. 꼬맹이랑 같이 사는 거면 꽤 괜찮겠네.”

트랜스포머도 아니고. 이 나이에 합체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작게 중얼거리던 정희성이 무엇이 그렇게 웃긴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멈춘 정희성은 아까와는 달리 단단해진 얼굴로 덩어리를 직시했다.

“그래서.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어?”

【나야 그쪽이 더 편하지. 네 영혼은 너무 많이 흩어진 상태라서 솔직히 고치려면 조금 힘들거든.】

“하하, 그래? 잘됐네, 그럼. 미련을 조금 덜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한 정희성이 후련한 척 웃었다.

그런 정희성을 보던 덩어리가 충동적으로 말했다.

【작지 않은 인간아. 너의 이름이 무엇이니?】

“너라면 내 이름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름은 덧없는 동시에 아주 강력하지. 존재를 정의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함부로 이름을 알 수 없어.】

그 말에 정희성은 자신의 이름을 말해도 되나, 조금 헷갈렸다.

그러다가 어차피 제게 남은 시간이 일주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도, 시간이 남았을 때나 하는 일이다.

정희성이 자조적으로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정희성이야, 내 이름.”

그 말을 들은 덩어리가 크게 요동쳤다.

세계가 숨을 죽였다.

몸을 낮추고, 저 작은 덩어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정희성은 그저 이상한 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없이 거대하게 몸을 부풀리는 것 같았다.

여전히 그의 주먹 두 개를 붙인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자신을 모두 뒤덮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무언가 자신 안에 가득 들어차고 알 수 없는 충만감이 몸을 지배했다.

덩어리는 스스로 신이 아니라고 했지만.

신을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까.

【정희성. 네게 마지막 선물을 주마.】

덩어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곳, 그래, 영혼을 파고들었다.

그 충격적인 감각에 정희성이 몸을 떨었다.

【네게 남은 시간 동안, 영혼의 시간을 멈춰주겠다.】

기이한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마주하면 안 되는 무언가를 마주한 감각은, 지독히도 황홀한 동시에 끔찍했다.

벅차오르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 그의 숨이 가빠오고, 온몸에 경련이 일었다.

정희성의 두 눈이 뒤집히려는 찰나, 병실을 가득 메웠던 압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럼! 남은 삶을 재밌게 즐기도록 해!】

다시 방정맞은 목소리로 돌아온 덩어리가 통통 튀더니 정희성이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세계가 원래의 흐름을 되찾았다.

정희성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침대 모서리를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했지만, 속에서 나오는 것은 없었다.

* * *

도현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 병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고 있었다.

안에 들어가지 않고 문고리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는 어린 소년을 본 간호사들이 말을 걸었지만, 도현은 혹시 소리가 안으로 새어 들어갈까, 작은 목소리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다시 한번 도현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벌컥-

갑자기 열린 문에 도현은 얼음이 되었다.

정희성이 비뚜름한 자세로 서서 그런 도현을 어이없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오나 한참을 기다렸는데, 놔두면 아주 다음 날까지 서 있을 기세더라?”

“…알고 있었어요?”

“어. 넌 발소리가 조용해서 금방 알 수 있거든.”

“네?”

발소리가 조용하면 알기 어려운 것 아닌가?

도현은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지금 그것을 따질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계속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정희성이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도현이 조금 우물쭈물한 기색으로 망설이다가 병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벌을 서는 아이처럼 눈치를 보는 도현에 정희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눈치 볼 거면 왜 눈치 볼 일을 저질러?”

“형. 아직도 많이 화났어요?”

“그럼 화가 안 났겠어?”

그 말에 도현의 기가 죽었다.

다시 나가야 할까.

도현의 눈이 문을 향하는 것을 눈치챈 정희성이 도현을 가로막았다.

“상대가 화가 났으면 기분을 풀어줘야지. 그렇게 바로 포기하고 꼬리를 말면 어떡해?”

“죄, 죄송해요.”

그런 도현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는 정희성이 한순간 착잡한 빛을 띠었다.

‘나도 꼬맹이를 속이고 마음대로 행동했다. 사실 지금 용서를 구해야 할 건 나인데.’

아무것도 모르고 제 눈치를 보고 있는 꼬맹이를 보고 있으려니, 온갖 감정이 몰려 들어왔다.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도현이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희성은 도현의 시선이 제게 닿기 전,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다행히 도현은 그런 정희성을 눈치채지 못했다.

“형, 죄송해요.”

조금 목이 막힌 정희성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러고서 아까보다 조금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그렇게 쉽게 네 삶을 포기하려고 하지 마. 알겠어?”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목숨을 가볍게 여긴 게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 꼬맹이가 삶을 포기하려고 하니 속이 뒤집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편, 도현은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포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형도 어제 들었으면서…. 결국 누군가는 죽어야 해. 그리고 그건….’

그러나 제 머릿속의 생각을 함부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의 반응에 차갑게 굳어 있던 정희성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일주일 뒤에, 다른 방법은 없는지 다시 한번 물어보자. 혹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없으면요?”

“없으면….”

정희성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그게 평소의 그와 너무 다를 바가 없어서,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그때 생각하지 뭐.”

무책임한 말이었다.

둘의 생명이 걸린 일치고는 너무 가벼운 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도현은 그런 정희성의 모습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가깝게 느껴졌던 죽음이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 봤자 아무런 결론도 안 나. 그러면 괜히 시간 낭비하며 몸 고생, 마음고생하기보다 신나게 노는 게 낫지 않아?”

도현의 얼굴이 정희성을 따라 조금씩 밝아졌다.

어차피 죽음은 늘 도현의 곁에 있었다.

오늘이 고비라는 말도, 수없이 많이 들었다.

‘물론 그때의 상황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죽음은 두렵다.

다음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건 심장까지 차가워지는 공포였다.

아무리 익숙해져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도현이 손을 뻗었다. 제 손을 향해 뻗는 도현의 손을 본 정희성이 망설임 없이 그 손을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하지만 형이 곁에 있어.’

도현은 이 순간, 참을 수 없이 무서운 공포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보다 견딜 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현이 빙그레 웃었다.

* * *

도현과 정희성이 키득키득 웃었다.

도현은 자신의 병실 침대 위에 놓고 온 메모를 떠올렸다.

[산책하고 올게요. 늦을지도 몰라요.]

지금쯤 메모를 발견했을까,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까.

돌아가면 케일리와 헬리아의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뭐 어때.’

그것으로 오늘 하루 놀 수 있다면 충분하다.

도현은 점점 정희성의 대책 없는 면을 닮아가고 있었다.

도현과 정희성은 환자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몰라도, 도현의 옷은 정희성이 구해온 옷이었다. 도현은 정말 오랜만에 입는 일상복에 기분이 좋아졌다.

검은 바지도, 부들부들한 흰 스웨터도, 종아리까지 오는 코트도, 누군가에겐 평범한 옷에 불과하겠지만 도현에게는 그 무엇보다 특별한 옷이었다.

도현은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기대돼?”

“네! 당연하죠!”

신이 난 도현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아침.

극적인 화해를 한 도현과 정희성은 남은 날을 알차게 보내기로 의견을 합쳤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계획한 일은, 병원 주변에 있는 극장에 가서 연극을 관람하는 일이었다. 도현을 위해 짠 계획이기는 하지만, 오랜만에 연극을 관람하게 된 정희성도 은근히 신이 났다.

극장에 처음 와본 도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런 도현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도현이 정희성과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형! 형! 극장이 엄청 커요!”

“그러게. 이렇게 넓은 곳일 줄 몰랐네.”

예매를 하고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볼 수 있는 것 중에서 골라야만 했다.

선택지가 없었음에도 도현은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고 있었다.

티켓을 손에 쥐고, 공연장으로 향한 도현이 손을 한 번 더 흔들었다.

“형! 형! 공연장이 엄청 작아요!”

인기가 없는 공연이기 때문일까.

관람석도 몇 없었고 공연장도 작은 크기였다.

실망할 법도 한데 도현은 그것이 마냥 신기한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기뻐하는 도현을 보며 정희성이 그 기쁨에 감염된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도현과 정희성은 앞에서 두 번째 줄에 가서 앉았다.

드문드문 들어온 사람들이 관람석을 채우고, 10분 뒤에 공연이 시작한다는 멘트가 울렸다.

벅찬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바닥에 닿지 않는 두 발을 동당거리던 도현이 어두워진 공연장에 숨을 흡- 삼켰다.

도현과 정희성이 본 연극은 도시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시골 소녀의 이야기였다.

스토리는 평범했고, 배우들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다. 정희성은 그럭저럭 볼 만한 연극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도현은, 눈앞에 펼쳐진 세계에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누군가 연기를 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이 공연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자유자재로 변하는 배우들의 얼굴과 생동감 있는 목소리, 현장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숨소리까지.

도현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이게 연극이구나.’

공연이 끝날 때까지, 모든 장면을 머릿속에 새기듯이 눈에 담았다.

단 한순간도 눈을 돌리지 않고 무대를 응시하는 도현의 모습에 옆에 있는 정희성이 저도 모르게 숨소리를 죽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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