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8)화 (9/582)

제8화. 우연보다 인연 (8)

공연이 끝이 나고, 관람석에 불이 켜졌다.

정희성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 도현을 돌아보았다.

“도현아?”

그 부름에 도현이 눈을 한번 깜빡였다. 돌아본 얼굴에 서서히 환한 미소가 차올랐다.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은 도현이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최고였어요!”

정희성은 조금 뿌듯함을 느꼈다. 이렇게 좋아하니, 연극을 보러 오길 잘한 것 같았다.

‘남은 일주일간 매일매일 데려올까….’

연극을 그리 즐기지는 않던 정희성이지만, 매번 이런 반응을 보여준다면 계속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희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도현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여운을 버리지 못하는 도현의 모습에 정희성이 물었다.

“가서 배우분들한테 인사할래?”

“네? 그래도 돼요?”

“응. 연극이 끝나고 인사 정도는 하게 해줘.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금방이라도 좋다고 말할 것 같던 도현은 조금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냥 가요.”

가까이 가면 불편해할 테니까. 도현은 어렵지 않게 뒷말을 삼켰다.

그러고선 태연한 얼굴로 정희성의 손을 잡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순간 조금 느려졌지만, 그런 적 없다는 듯 앞으로 걸어가는 움직임은 거리낌이 없었다.

정희성은 도현과 마주 잡지 않은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

이게 옳은 길이다. 정희성은 끈덕지게 달라붙는 감정을 쳐냈다.

‘일주일. 일주일만 지나면 돼.’

정희성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되뇌었다.

‘일주일 뒤엔 이런 일을 겪지 않을 거야, 도현아.’

다른 사람과 관계를 쌓고, 사랑받고, 사랑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랑받기에 너무 충분한 꼬맹이니까.

* * *

공연장을 나온 도현과 정희성은 정처 없이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끌리는 음식이 있으면 아무런 고민 없이 사서 나눠 먹었다.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온갖 음식을 먹은 도현과 정희성이었다.

“오늘 저녁은 못 먹겠어요.”

“그러게. 나도 배 터질 것 같아, 지금.”

그렇게 대화를 나누면서도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있으면 또 사서 먹기를 반복했다.

나중에는 한 입 먹고 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음식 남기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학교를 다녀본 적 없는 도현이었지만, 기본적인 교육 정도는 받아왔다.

음식을 함부로 남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꼬맹아. 사소한 것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것도 내가 여유로울 때나 하는 거야.”

그 말에 도현이 아무런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희성은 도현에게 나쁜 지식을 알려 주면서도 당당했다.

‘얘는 너무 착하고 순해서, 조금 덜 착해질 필요가 있어.’

나름대로 도현의 미래를 걱정하며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자 하늘이 금세 어두워졌다.

도현과 정희성은 아쉬워하면서도, 병원에 돌아가기 위해 발을 돌렸다.

병원 앞에 있는 공원에 다다르자, 도현이 작게 웃었다.

“저희 여기서 처음 봤잖아요.”

그 말에 정희성이 픽- 웃었다.

“내가 빌빌대는 걸 네가 도와줬지.”

몇 주 되지도 않은 일인데 꼭 오래전 일인 것만 같았다.

도현이 신기한 눈으로 공원을 둘러보았다.

그런 도현의 눈에 벤치 하나가 들어왔다. 도현과 정희성이 앉아서 쉬었던 벤치였다.

도현의 시선을 따라 벤치를 발견한 정희성이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며 도현을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하루 종일 등에 메고 있었던 가방을 풀었다.

지익-

열린 가방에서 나온 검은 케이스에 도현의 눈이 커졌다.

“어? 바이올린이네요?”

“응.”

케이스 뚜껑을 연 정희성이 씩- 웃었다.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서 이제 꼭 붙어 있으려고.”

그렇게 말한 정희성이 바이올린을 꺼내 들었다.

이미 조율이 되어 있었지만, 다시 한번 현을 신중하게 그으며 조율을 마친 정희성이 활을 쥔 손을 등 뒤로 가져가며 허리를 굽혔다.

“정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공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제야 정희성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도현이 관객처럼 손뼉을 쳤다.

정희성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능청스럽게 멘트를 쳤다.

“뜨거운 반응 감사합니다. 신청곡 있으신가요?”

도현이 아는 바이올린 곡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는 곡이 없어요.”

“그럼 오늘 알게 될 거야. 연주가 끝나면 곡명이 궁금해질걸.”

정희성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장담했다.

도현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번에 병실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잔뜩 기대에 찬 도현을 보던 정희성이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활을 들었다.

* * *

간간이 지나다니는 사람이 보이는 한적한 공원. 조명이 꺼진 벤치 앞.

어둠처럼 내려앉은 침묵이 걷히고, 선명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은 불씨처럼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짧은 서주(Andnate).

활이 느릿하게 현 위를 유영했다.

부드러운 떨림과, 이어지는 음들이 미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유연하게 움직이는 몸짓이, 심장을 간질이는 음색이 더없이 우아하다.

활을 들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정희성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음악 같았다.

도현은 넋을 놓고 그 연주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불씨가 순식간에 모습을 불리듯이 타오르는 강렬한 론도(Rondo).

무거워지기 전에 가볍고 빠르게 미끄러지는 활의 음색이 귀를 사로잡는다.

주제부와 삽입부를 번갈아 가며 도현의 혼을 쏙 빼놓은 론도가 지나가고 카프리치오소(Capriccioso)가 등장한다.

자유롭고 환상적이게.

그 지시를 정희성은 누구보다 강렬하게 해석했다.

금방이라도 현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한 연주.

현을 긁어내리는 듯한 음색은 이상하게 귀를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

도현은 자신의 귓가에 통통 튀는 악마가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내 바이올린 연주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며 초인적인 수준에 달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듬성듬성 있는 전등의 불빛이 전부인 공원이었다.

그런 어스름한 빛 속에서 정희성은 그 누구보다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노을은 잔잔하지 않았다.

마지막을 불태우는 노을은 그 무엇보다 뜨겁고 화려했다.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llegro ma non troppo).

끊임없이 몰아치는 연주에 음표들이 쉴 새 없이 춤을 췄다. 붉은 치맛자락이 빙글빙글 돌며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선율의 춤사위 속에서 연주하는 남자는 속도를 더해갔다.

이내, 피날레를 장식하는 카덴차가 박차를 가하며 격정을 쏟아냈다.

살짝 땀에 젖어 흔들리는 머리칼, 집중하느라 버릇처럼 찌푸린 눈썹, 그러나 황홀하다는 듯이 입에 머금은 즐거운 미소.

찰나가 영원처럼 뇌리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찰나가 지나고.

마지막으로 내려앉은 음을 끝으로 고요가 찾아왔다.

활을 든 손이 천천히 내려가고, 정희성이 고개를 들었다.

‘영혼의 시간을 멈춰준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연주했는데 전혀 힘들지 않아.’

연주할수록 무너지는 몸.

공연에 서지 못하게 된 건 괜찮았다. 연주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홀로 연주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박탈당했을 땐.

더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언제부터 바이올린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스스로를 비웃으며 바이올린을 놓았다. 죽음만을 기다렸다. 아니, 죽고자 하는 열정조차 없었다. 그저 숨 쉴 수 있기에 숨을 쉬었다.

그리고.

도현에게 휘말려 다시 바이올린을 잡은 순간 깨달았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바이올린이 언제부턴가,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이루는 전부가 되어 버렸음을.

‘선물은 마음에 드네.’

남은 시간만큼은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웃는데,

짝.

짝짝짝!

“…어?”

어느새 조명조차 들지 않는 벤치 주변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처음 들린 박수 소리를 시작으로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면서, 누군가는 박수하며 그의 연주에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정희성이 난감한 낯으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사람들이 가까이 몰려들려는 순간.

탁!

“어? 형?”

도현의 팔을 잡아챈 정희성이 달리기 시작했다.

“혀, 형! 왜 뛰는 거예요?”

“나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귀찮아져!”

“!”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도현이 정희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 뛰었다.

“후우.”

병원에 들어선 정희성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 허억.”

도현은 숨넘어갈 기세였다.

정희성이 그런 도현을 보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체력 관리 좀 해야겠다. 나이도 어린 게 체력이 그 모양이야.”

도현이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서로이기에 할 수 있는 장난이었다.

숨을 고르느라 조금 굽혔던 허리를 편 정희성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도망쳐 온다는 게 병원이라니….”

그는 기가 차 보였다.

“그럼 더 놀면 안 돼요?”

도현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정희성은 장난스럽게 도현의 이마를 톡- 쳤다.

“안 돼요.”

“왜요?”

“늦었잖아.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위험해.”

도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서 같이 책 읽을까요?”

“그럴 시간이 있을까?”

정희성이 의뭉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조금 불퉁한 표정을 짓던 도현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곡명이 뭐예요?”

“아.”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환호에 곡명을 말해주는 것도 깜빡 잊었다.

“생상스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A단조야.”

도현이 눈을 조금 찌푸렸다.

“이름이 너무 어려운데요.”

“그렇긴 하지. 좀 더 재밌는 이름을 붙여도 좋았을 텐데.”

“으음.”

살짝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정희성을 보고 말했다.

“그래도 안 까먹을 것 같아요, 이 곡.”

그 말에 정희성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거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도현은 정희성이 한 말의 뜻을 깨달았다.

도현을 기다리느라 퇴근도 하지 못한 케일리에게 한 번, 어디서 쓰러진 것은 아닐까 내내 걱정했던 헬리아에게 한 번, 의사의 지시를 무시한 환자에게 화가 난 벤자민에게 한 번 혼이 난 도현은 결국 더 놀겠다는 다짐을 이루지 못하고 침대에 녹아내렸다.

피곤하지만 행복한 하루였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도현의 올라간 입꼬리가 언뜻 보였다.

* * *

정신없이 놀았던 다음 날.

일주일을 미친 듯이 놀자고 다짐했던 것과 다르게 도현과 정희성은 병실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오늘 하루는 절대 안정이라고 못을 박은 벤자민의 탓도 있었고, 약해진 둘의 체력이 방전된 탓도 있었다.

대신 오늘 하루 종일 뒹굴거리며 평화를 즐기기로 했다.

정희성은 도현이 말했던 케일리와 한다는 ‘놀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도현을 상대해 주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정희성이 널린 옷가지처럼 침대에 흐물흐물 늘어졌다.

“어째 어제보다 더 힘든 것 같지?”

도현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간 얼굴로 쳐다보자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눈치 빠른 도현이 몸을 휙 돌려 정희성의 손에 바이올린을 쥐어 주었다.

그러자 언제 푹 퍼져 있었냐는 듯 정희성의 몸에 활기가 돌았다.

급격한 변화에 도현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1인 병동이 방음이 잘 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정희성의 연주를 감상했다.

괜히 기침이 날 것같이 평화롭고 따뜻한 날이었다.

그 후로도 도현과 정희성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보냈다.

둘이 보고 싶은 연극을 찾아 예매해서 보고, 충동적으로 야외에서 연주하다가 사람들이 몰려 꽁지 빠지게 도망치기도 했다.

영화관에도 가보았고, 어떤 날은 놀이공원에 갔다.

둘 다 몸이 좋지 않아 격렬한 놀이기구는 탈 수 없었지만, 활기찬 분위기 속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솜사탕을 먹고 동물 귀를 쓴 채로 여기저기 쏘다녔다.

그러다가 또 벤자민에게 혼나고, 다음 날은 병실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보냈다가 또 다음 날은 몰래 나가 놀기를 반복했다.

화려한 조명이 켜진 도시를 거닐던 도현이 무심코 말을 툭 내뱉었다.

“우리 이대로 끝낼까요?”

덩어리가 말한 일주일이 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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