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9)화 (10/582)

제9화. 우연보다 인연 (9)

두서없는 도현의 말에 정희성이 도현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한 말에 놀란 도현은 조금 멈칫했다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만약 덩어리가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면요. 그러면….”

도현이 잠시 침묵했다. 정희성은 천천히 도현의 말을 기다렸다.

차분히 말을 고르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형을 만난 후 보낸 날들이 아직도 꿈만 같아요.”

“…….”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걷는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몰랐어요.”

도현이 마주 잡은 손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정희성은 섣불리 대답하기보다 도현의 말을 경청하기를 택했다.

“맛있는 음식을 사 먹는 것도, 내 몫을 다 먹고 남의 것을 탐내보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어요. 연극을 본 것도, 영화관에 간 것도, 놀이공원에 가본 것도 전부요.”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한 눈이 아이답지 않게 성숙한 빛을 띠었다.

“아. 바이올린 연주 감상도 추가할게요.”

도현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생각보다 재밌더라고요, 사는 거. 이렇게 말하면 우스우려나요?”

도현의 말에 정희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전까지 잃을 게 없다고 말하던 꼬맹이였다.

조그만 게 저렇게 말하니 우스워야 하는 게 당연한데, 심장이 저릿했다.

“앞으로도 재밌을 거야.”

도현에게 하는 말이자,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정희성의 대답에 침묵하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형. 저는 충분히 즐거웠어요.”

정희성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가를 찌푸렸다.

말을 하면서도 도현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형이 화를 내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이 들었다.

도현이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러니까… 형이 제 영혼을 받을 마음이 없다면.”

한숨을 내쉬듯이 말을 쏟아냈다.

“우리 이 정도로 할까요?”

며칠간 도현은 매일매일이 새로웠다.

내일이 기다린다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날이 지날수록 시간이 줄어드는 게 무서웠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크게 웃어보기도 했다.

별거 아닌 일로 키득거렸다.

모두 도현이 포기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누렸다.

형은 자신의 영혼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그건 지난 기간 동안 차고 넘치도록 깨달았다.

하지만 도현은 형의 영혼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요. 그냥 이 정도로. 여기서 끝내면….”

잠깐 말끝을 흐렸던 도현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만족할 것 같아요.”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만족스럽다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정희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기색이었다.

‘말해버렸네.’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긴장된다.

도현이 조심스럽게 정희성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도현의 걱정과 달리, 정희성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

“네?”

“그렇게 하자고.”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은 얼굴. 그 표정의 의미를 읽지 못한 도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데 정희성이 과장되게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오래도 살았다.”

정희성이 도현의 손을 쥔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도현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

몇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간 정희성이 휙- 돌아보았다.

“8살에 충분하다고 말하는 꼬맹이도 있는데. 28살이면 차고 넘칠 만큼 산 거 아니냐?”

“화 안 내요?”

“응, 안 내.”

“왜요?”

“그때 너는 네가 잃을 게 없으니까 살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

도현의 입이 다물어졌다.

“지금의 너는 사는 게 너무 즐거워서, 만족하고 끝낼 수 있다고 한 거고.”

그러면 그걸로 됐어.

그렇게 말한 정희성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유쾌하게 웃었다.

눈물이 날 만큼 환한 미소였다.

* * *

덩어리가 오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도현과 정희성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병실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도현과 함께 놀이를 하기도 했고, 정희성이 하는 연주를 듣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과일을 깎아서 먹거나 침대에 방탕하게 늘어져 쉬었다.

그렇게, 높은 곳에 떠 있던 태양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지고 병실에 붉은빛이 내려앉았다.

꾸벅꾸벅 조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잠든 도현의 고개가 정희성의 어깨로 툭- 떨어졌다.

“꼬맹아.”

형의 목소리가 멀리서 흐릿하게 들렸다.

“꼬맹아. 일어나봐.”

“으…. 형?”

도현이 애써 잠기운을 몰아내며 눈을 떴다.

“언제 잠든 거지…. 덩어리 님은요?”

도현이 비몽사몽한 상태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저기 앞에.”

도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을 부릅뜨자 그제야 그들 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언, 언제 온 거예요?”

“방금. 그래서 바로 너 깨웠어.”

그 말에 도현은 조금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다른 날도 아니라, 하필 오늘.

덩어리가 온다고 한 날인데 아무 생각 없이 잠에 들다니.

‘내가 이렇게 긴장감 없는 사람이었나?’

바보 같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도현은 잠기운을 완전히 몰아냈다.

도현이 정희성을 쳐다보았다.

“우리 묻기로 한 거 물어봤어요?”

“아니, 아직.”

도현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진정하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저, 덩어리 님. 정말로 둘 다 살 방법은 없는 건가요?”

덩어리를 바라보는 도현의 얼굴이 간절했다.

이 정도로 만족한다고 말했지만, 미련이 남지 않을 리가 없었다.

살 수 있다면,

형과 함께 살 수 있다면.

도현이 조금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안 돼. 한 명만 살거나, 둘 다 죽거나야.】

곧바로 들려온 대답이 단호했다.

길게 눈을 감았다 뜬 도현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당겼다.

‘내가 슬퍼하면, 형도 슬플 거야.’

그건 싫었다. 도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했다.

살고 싶다.

아직 못 해본 것도 많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욕심이 자꾸만 차올랐지만.

그러나 도현에게는 삶보다 더욱 중요한 게 생겼기 때문에,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냥 주어진 시간만큼만 살고 그렇게 끝낼게요.”

말을 한 도현이 정희성을 돌아보았다. 도현과 마주한 정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다시 덩어리를 보았다.

“누구 한 명만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도와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희성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지만, 덩어리를 보고 있던 도현은 발견하지 못했다. 오직 덩어리만이 그의 표정을 보았을 뿐이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나중에 울고불고 떼를 써도 그땐 되돌릴 수 없어.】

“네.”

도현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후회하지 않아요.”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된다는 건 존재의 죽음을 의미해. 네 영혼이었던 것이 기억도, 의미도, 가치도 모두 잃고 그저 떠돌아다니는 거야. 그게 무슨 의미인 줄이나 알아?】

“아뇨, 몰라요. 하지만 안다고 해서 선택이 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무모한 인간이로구나.】

덩어리가 요동쳤다. 덩어리의 말에도 도현의 결심은 굳건했다.

덩어리가 티 나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조율자’. 너희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그러니 너희 선택을 따르겠지만…. 부디 나중에 후회하지 않길 바라마.】

그렇게 말한 덩어리가 몸을 부풀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허공에서 사라졌다.

온몸을 긴장하고 있던 도현이 침대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순순히 가서 다행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도현이 그렇게 생각하며 안심했다.

고개를 돌린 도현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정희성에 조금 당황했다.

“꼬맹, 아니, 도현아.”

“네.”

“저번에 덩어리가 한 말 생각나?”

“덩어리가 한 말이요…?”

도현의 머리가 조금 기울어졌다.

“내게 남은 시간이 한 달, 혹은 삼 주 정도라고 한 거.”

도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덩어리가 그렇게 말했었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는 너보다 먼저 갈 거야.”

“그게 무슨….”

“우리는 이미 선택했잖아. 이제 오는 미래를 막을 순 없어. 너도 알잖아.”

“형! 지금이라도…!”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정희성의 얼굴에 도현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렇지?”

“…네.”

도현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냈다. 그 모습을 슬픈 낯으로 보던 정희성이 진심 한 자락을 내비쳤다.

‘용서받을 수 없겠지.’

그래도 영영 기회를 놓치기 전에 말하고 싶었다.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도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형이 사과해요?”

“네게 상실을 주는 못난 형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내가 지금 못난 형인 것 같아서.”

“형.”

“고통스러울 거야. 괴로울 거고. 죽고 싶을 만큼 외롭고 슬플 거야.”

“…….”

“그리고 날 원망하겠지.”

“아니에요!”

도현이 다급히 부정했다.

“제가 어떻게 형을 원망해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도현의 말에 정희성이 웃음 지었다.

그 얼굴이 이상하게도 쓸쓸해 보여 도현은 불안해졌다.

“도현아,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정희성의 분위기에 도현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무너져 내릴 것 같다는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네게 남은 삶은 끝까지 채우고 와.”

“형! 형 없이 저는….”

“씁!”

정희성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다 채우고 오지 않으면 너 쳐다도 안 볼 거야.”

“형!”

“형이라고도 못 부르게 할 거야.”

처음 만난 날, 병실 앞에서처럼 장난스러운 말투에 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네게 주어진 삶은 다 살고 와. 알겠지? 그냥 사는 것도 안 돼.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게 살아.”

그럴 수 없다고.

나는 그럴 힘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형의 얼굴, 목소리, 말투가 너무 다정하고 따뜻해서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형이랑 약속하는 거야. 알겠지?”

“…네. 약속할게요.”

도현의 작은 새끼손가락과 고리 걸고 약속까지 모두 마친 정희성이, 그제야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후로 평소와 같이 웃고 떠들고, 정희성의 연주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무언가 자꾸 도현의 신경을 거슬렀다.

오늘따라 정희성의 병실을 떠나고 싶지 않아 미적거리는 도현의 등을 팡팡 쳐서 쫓아낸 정희성이 문고리를 돌리는 도현을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문 앞에 선 도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형, 우리 내일도 보는 거죠?”

“그럼 나 안 보려고 했어?”

자연스럽게 받아치는 정희성의 모습에 도현은 불안한 마음을 조금 내리눌렀다.

병실을 나가려는데, 도현아. 하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뒤를 돌아봤다.

정희성이 도현을 보고 웃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웃음이 흐릿했다.

“잘 자. 좋은 꿈 꾸고. 내일도 모레도, 앞으로도 행복한 날이 될 거야.”

도현은 그 말을 아까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으로 이해했다.

간질거리는 말에 조금 쑥스러운 듯 귓불을 붉힌 도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도요. 형도 앞으로 행복한 날만 있을 거예요.”

“…그래.”

부끄러워진 도현이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채 황급히 병실을 빠져나갔다.

정희성의 시선이 닫힌 문을 향했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또 거짓말을 해버렸네.”

도현이 잠들었던 순간, 정희성의 눈앞에는 덩어리가 나타났었으니까.

* * *

조금 전.

갑자기 잠들어 버린 도현을 추스르던 정희성은 눈앞에서 일그러지는 허공을 응시했다.

정희성은 놀란 기색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재운 거야?”

【뭐, 그렇지. 깨어 있으면 조금 곤란할 테니 말이야.】

정희성이 곤히 잠든 도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주 귀한 것을 다루듯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고?】

정희성이 가라앉은 눈으로 덩어리를 보았다.

“마음을 돌려서, 꼬맹이의 목숨으로 삶을 연명이라도 하라고?”

【작은 인간도 마찬가지 아니야? 깨어나면 널 원망할 수도 있어.】

“꼬맹이한테 미움받기는 싫은데.”

잠든 얼굴이 어리다.

괜히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다가 감은 눈을 찌푸리는 도현에 손가락을 내렸다.

“싫은 일도 참고 하는 게 어른 아니겠어?”

【내가 보았을 땐 작은 인간이나 너나 한참 어린 건 마찬가진데.】

“너는 인간이 아니잖아.”

【인간이 덩어리를 차별하는구나!】

덩어리가 엄살을 부렸다. 정희성이 그런 덩어리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근데 조금만 늦춰줄 수 있어? 영혼을 가져가는 거.”

【흐음. 내가 지금 네 영혼의 시간을 멈춰 놓았지만,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릴 거야. 최대한 온전한 상태에서 하는 게 작은 인간에게 좋아.】

“아니. 그렇게 늦출 생각은 없어. 그냥 지금 말고 몇 시간 뒤에 와서 가져가 달란 소리야.”

【왜?】

정희성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덩어리를 보았다.

“전에는 내 생각을 전부 읽더니 왜 아까부터 계속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구는 거야?”

덩어리가 있지도 않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이름을 들었잖아. 이름을 들은 대상의 생각은 흘러 들어오지 않아.】

“뭐? 무슨 원리로?”

【궁금한 것도 많구나. 설명해 봤자 인간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야.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이유나 말해.】

정희성이 조금 탐탁지 않은 눈으로 덩어리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눈을 떴는데, 옆에 시체가 있으면 꼬맹이가 얼마나 무섭겠냐. 아마 평생 못 잊을걸. 그런 끔찍한 기억은 만들어주고 싶지 않아서 그래. 그냥 평소처럼 방에 돌아가서 자다가 그렇게 일어났으면 좋겠어.”

잠시 침묵하던 덩어리가 말했다.

【영혼의 합이 잘 맞아서 그런가, 끝까지 작은 인간의 생각만 하는구나.】

“영혼의 합?”

【너랑 작은 인간의 영혼 말이야, 놀라울 정도로 상성이 잘 맞거든. 너는 격렬할 정도로 화려하게 타오르는 노을을 닮았어. 반면 작은 인간은 차갑고 역동적인 바다나, 고요하고 광활한 하늘 같지.】

그 말에 정희성이 잠든 도현을 쳐다보았다.

‘어째 잘 맞는 표현 같네.’

정희성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덩어리가 말을 이었다.

【사실 어울린다고 말했지만, 어울리기 힘든 속성이기도 해. 그런데 작은 인간이 거대한 영혼을 타고나서 격렬한 노을을 담아낼 그릇이 충분히 마련된 거야. 영혼의 크기가 거대하다 보니, 육체 붕괴도 너무 이른 시기에 일어났지만 말이야. 아무튼, 애초에 영혼을 섞을 수 있는 것도 너희들의 영혼의 합이 맞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 정도로 잘 맞는 영혼은 정말 드문데, 엄청난 우연이야!】

어쩐지 덩어리의 마지막 말이 귀에 콱 박히는 것 같았다.

“뭐,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희성이 평소와 달리 한없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꼬맹이, 아니, 도현이랑 나는 우연보다 인연인 것 같아.”

【퍽 감상적인 말을 하네.】

“죽을 때가 돼서 그런가?”

정희성이 가벼운 농담을 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덩어리는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느꼈다.

왜 이렇게 이 인간에게 관대해지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세상엔 너희처럼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거든. 반복될 수 없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 것. 순리에 어긋나면서도 순리를 따르는 흐름.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니까.】

정희성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저번에도 조금 느꼈는데, 너 의외로 착하네.”

잠시 멈칫한 덩어리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이상한 소리! 보통 생명이 겪어선 안 될 상황에 처한 불쌍한 영혼에게 심술 맞게 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거야!】

“그래, 뭐. 그렇다고 하자.”

【말투가 건방져!】

부들부들 떠는 제스처를 취하는 덩어리를 무시한 정희성이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에 해는 점점 더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정희성이 덩어리에게 말했다.

“일단 도현이를 깨워줘. 그리고 도현이가 하는 말에 모른 척 수긍하고 넘어가 줘라.”

【허어, 하다 하다 연기까지 시키는구나.】

“도현이랑 놀이 안 해봤으면 조용히 해.”

장난스럽게 일갈한 정희성이 말했다.

“그리고, 도현이가 방에 가서 잠들면, 그때 내 영혼을 가져가.”

【내 평생 너처럼 귀찮은 영혼은 처음이다.】

정희성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안 들어줄 거냐?”

【해주면 되지 않느냐, 해주면!】

괜히 성질을 한번 부린 덩어리가 도현의 이마를 쑥 지나쳤다.

도현과 부딪히지 않고 그대로 통과한 덩어리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도현의 눈꺼풀이 부르르- 떨렸다.

입을 열어 잠든 아이를 불렀다.

“꼬맹아.”

* * *

정희성이 굳게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홀로 남은 병실에 죽음 같은 침묵이 가라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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