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1)화 (12/582)

제11화. 알 속의 새 (1)

소년은 눈을 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깨달았다.

소년의 얼굴에 깨진 유리잔처럼 차츰 균열이 생겨났다.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이야.

고장 난 기계 같은 중얼거림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뇌던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에 닿은 대리석 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항상 그를 괴롭히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미적지근하고 불안한 목소리가 작게 흩어졌다.

소년이 천천히 병실 문을 열자, 다급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쿵. 쿵.

무언가 내리치는 중인 걸까?

너무 시끄러웠다.

하얀 발이 복도를 디뎠다.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데, 꿈속을 거닐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살을 따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사람들의 뒤를 따라갔다.

발걸음이 멈춘 곳에서, 소년은 우두커니 병실의 문패를 바라보았다.

714호.

그다음. 소년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환히 열린 병실 안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간절히 응시하고 있었다.

“3, 2, 1!”

쿵.

“다시! 3, 2, 1!”

쿵.

그때 한 사람이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소년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던 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쿵.

죽은 자 특유의 푸르스름함이 감도는 청년의 몸이 기계의 움직임에 따라 힘없이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쿵.

둔탁한 소음이 머릿속을 울리는데, 어디서 나는 소린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얼굴은 단잠에 빠지기라도 한 듯 편안해 보였다.

느릿한 눈꺼풀의 움직임을 따라 물기가 후두득- 떨어졌다.

손을 들어 얼굴을 훑은 소년이, 손가락에 닿는 물기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거짓말쟁이.”

토해내듯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

너무 추워서 손발 끝이 시렸다.

뒤늦게 소년을 발견한 간호사가 황급히 다가오다가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석상처럼 서 있는 한 소년이 죽고 싶다는 표정으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 * *

벤자민은 도현의 차트를 다시 한번 읽었다.

‘이건…. 기적이라는 말 외엔 설명할 방법이 없군!’

도현의 차트는 어느 날, 정확히는 일주일 전,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었다.

천천히 좋아졌다고 해도 놀라운 일인데 도현은 한순간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건강해졌다.

꼭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이.

이런 일은 벤자민에게 있어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현은 장기도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병이 낫는다고 해도 건강해지기까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도현의 몸은 그런 회복 과정을 모조리 생략하고 완전히 ‘건강’해져 있었다.

심지어 일반인과 비교해도 훨씬 건강한 도현의 수치는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육안으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에는 혈색이 돌았으며, 적은 활동량으로 인해 약해졌던 몸에는 적당한 근육이 붙고 있었다.

기적이었다.

가끔, 아주 가끔, 병원에서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나기도 했다.

과학의 선봉에 서는 의사 중에서 종교인이 많은 이유도 그러한 일들 때문이었다.

벤자민은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으나, 이번만큼은 신의 존재를 찾게 되었다.

똑똑-

도현의 병실 앞에 선 벤자민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벤자민은 익숙하게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하얀 병실.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은 소년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미동 없이 느릿하게 눈만 깜빡이는 소년의 모습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보다 핏물이 모두 빠져버린 하얀 밀랍 인형 같았다.

그러나 무생물인 인형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강렬한 존재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병실의 하얀빛이 흐르는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한데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언가 대단하고 경이로운,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Ghastly child (기분 나쁜 아이).

그것이 병원에서 도현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상하게 가까이하기 싫은, 지독한 거부감이 드는 동양인 아이는 병원 내에서도 기피의 대상이었다.

미신을 좋아하는 한 심장과 의사는 도현에게 동양의 귀신이 붙은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정도였다.

도현을 담당하는 간호사 헬리아와 벤자민 정도가 도현을 ‘Ghastly child’라고 부르지 않고 평범하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헬리아와 벤자민조차 도현과 오랫동안 함께 있는 것을 꺼렸다.

그런데 일주일 전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벤자민의 눈에 도현의 모습이 담겼다. 숨을 쉬는지 의심될 정도로 고요한 소년은, 창문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빛을 온몸에 두른 것 같았다.

기분 나쁜 불쾌함도, 발밑을 끌어당기던 괴기한 공포도 없었다.

오히려 성경에 나오는 천사가 저러할까 싶었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있던 벤자민이 자신을 돌아보는 도현의 얼굴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빛조차 반사되지 않을 정도로 순수에 가까운 검은색 눈동자가 벤자민을 응시했다.

벤자민은 가까스로 할 말을 떠올렸다.

“오늘 몸 상태는 좀 어떤가요?”

“좋아요.”

도현이 덤덤히 대답했다. 벤자민은 그 서늘한 표정 위로 그때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전기 충격에도 돌아오지 않던 생체 신호에 비참한 심정으로 고개를 든 순간 본, 고요하게 나락에 떨어지던 아이의 얼굴.

의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면서 죽음은 늘 곁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환자의 죽음에 초연해질 수 있다는 건 아니었다. 아마도 평생, 잊히지 않고 그의 뒤를 따라붙을 상흔 같은 기억이었다.

“검사상으로도 계속해서 몸 상태가 호전되고 있어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는 있지만, 지금 상태로는 사실상 병이 나았다고 봐도 좋아요. 일반 사람들과 비교해도 체력이 조금 부족할 뿐이지 다른 부분에선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는 도현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병원에 있는 것보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그 말에 도현이 반응을 보였다. 긍정적인 반응인 건지, 부정적인 반응인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한 반응이었다.

“퇴원하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더는 병원에 있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체력적인 문제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심리 상담은 도현이 거부했지.’

벤자민이 착잡한 기분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도현을 봐왔다.

그렇기에 외로움이 일상이었던 작은 아이에게 정희성이라는 남자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정희성은 도현에게 첫 가족이었고, 첫 친구였다.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상실이었다.

정희성이 사망 선고를 받은 날 이후로 도현은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도현의 간병인인 케일리의 말에 따르면 책을 읽지도 않고 내내 창밖을 보거나 잠을 잔다고 했다.

그러나 심리 상담을 거부한 이상 벤자민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차차 좋아지기를 바랄 수밖에.

벤자민이 도현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오늘 도현의 부모님께 연락드리려고 해요.”

도현은 느릿하게 눈만 깜빡였다.

“혹시 도현이 먼저 연락하고 싶은가요?”

“아니요. 선생님께서 해주세요.”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몇 년 만에 부모님과 재회하는 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무관심해 보였다.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게 전부인 사이니….’

도현이 부모님과 그다지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병원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도현을 꺼렸으니까.

그러나 정서적 교감에서는 부족할지언정 경제적으로는 한 번도 도현에게 부족하게 해준 적이 없는 이들이었다.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다는 소리였다.

또한, 벤자민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어.’

누가 보더라도, 지금의 도현은 Ghastly child가 아니었다.

* * *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Marine 한국 지사 사무실.

서혜나 대표의 왼쪽 눈가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이번 S/W 라인 디자인팀 팀장 오성희가 긴장된 손끝을 말아 쥐었다.

“이거, 색이 어떤 것 같아요?”

“네?”

“내가 보기엔 텁텁한데.”

서혜나가 클러치 백을 들어 올려 꼼꼼히 살피며 말했다.

“체인 컬러랑 매치도 별로고…. 아, 체인 길이는 좀 더 늘려도 좋을 것 같네요.”

테이블 위에 클러치 백을 도로 내려놓은 서혜나가 오성희를 보았다.

대표님은 부하 직원에게도 친절한 상사였지만, 일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철저했다.

오성희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가 이번에 런칭한 카타니아 디 마리나 라인은 평소 조금 나이대가 있다고 느껴졌던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서 나온 라인이잖아요. 카타니아 항구 도시의 젊음과 활력을 녹여내야 하는데… 이건 색이 좀 올드해요. 색 수정이 필요할 것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오성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피드백을 받아 적었다.

다른 신상들도 하나씩 살펴보며 피드백을 한 서혜나가 오성희를 돌아보았다.

“마리나는 점점 더 연령층을 확대해 갈 계획이라, 이번 라인이 굉장히 중요해요. 디자인은 예쁘게 나왔으니 디테일한 부분만 조금 더 신경 써서 다듬어보죠.”

“네. 피드백하신 부분을 디자인팀과 다시 상의해서 수정하겠습니다.”

“그래요. 아, 그리고 이번 플래그십 스토어에 진열할 제품들 말인데….”

우우웅- 우우웅-

핸드백 속에서 올리는 진동 소리에 서혜나의 말이 멎었다. 손을 들어 양해를 구한 서혜나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에 뜬 이름에 서혜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대표님?”

신호음이 네 번 울리는 동안 전화를 받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모습에 오성희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든 서혜나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다음에, 이야기하죠.”

그렇게 말한 서혜나는 오성희의 인사를 받고 다급하게 디자인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보폭을 넓게 해서 빠르게 움직인 서혜나가 대표실 문을 다급하게 열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문을 잠근 후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전화가 끊긴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한 건이 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누른 후 귓가에 가져다 댔다.

뚜루루- 뚜루루-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다.

- 네, 전화 받았습니다.

“…벤자민 선생님, 이도현 환자 보호자입니다. 전화 확인하고 연락드렸습니다.”

- 아, 오랜만입니다, 혜나 씨. 제가 바쁠 때 연락드렸나요?

“아니요. 괜찮아요.”

한 박자 쉰 서혜나가 망설임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하셨나요?”

마지막으로 병원에서 연락이 온 것이 한 달 전이었다.

서혜나는 그때 도현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병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환자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는 간호사의 말에, 핸드폰에 도현의 번호를 띄우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가, 신호음이 연결되기 전에 끄기를 반복했다.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그녀의 아들에게 그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아이 대신 자신의 인생을 선택했다.

그런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자신은 최악의 부모였다.

그런 서혜나의 귀로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 축하드립니다, 미즈 서. 이도현 환자의 퇴원이 확정되었습니다.

“퇴, 원이요?”

서혜나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 네. 메일로 검사 진단표 보내 드렸는데, 첨부한 파일 확인해 보시면 한 달 전부터 수치가 급속도로 정상화되었습니다. 지금은 거의 완전히 건강해졌다고 봐도 좋습니다. 희귀병이다 보니 회복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한 달 동안 지켜본 결과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병이 완치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 내렸습니다. 체력적인 부분은 병원에 있는 것보다 퇴원해서 활동량을 늘리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둔탁한 것에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꺼린다고 아이에 대한 동정심까지 모두 잃은 건 아니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의 병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8년이었다.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 동안 몇 번이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다음에 온 전화는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는 내용이었지만, 서혜나는 수없이 많이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완치라니.

- 미즈 서?

벤자민의 부름에 서혜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병이 나았다는 거죠?”

- 네. 정기적으로 검사를 진행하며 지켜볼 필요는 있지만….

벤자민의 말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서혜나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도 모를 만큼 넋이 나간 채로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 무엇보다 지금 이도현 환자는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

- 지인의 죽음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하루 종일 창밖을 보고 있거나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으로 소비하고 있습니다. 심리 상담을 권유해 보기도 했는데, 그건 이도현 환자가 거절했습니다. 지금 도현이에게 필요한 건 가족의 위로예요.

서혜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현이가 불편해할 거다. 내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그런 생각으로 쓰러졌다던 도현에게 전화 한 통조차 하지 않았다.

“도현…. 도현이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나요?”

- 네. 이도현 환자가 현재 무기력감, 활동량 저하, 식욕 저하, 수면 장애를 겪고 있는데, 심리 검사를 거부해서 정확하진 않지만… 제 소견으로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울증.

서혜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건물 안에 서 있는데 바닷속에 갇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손발 끝이 차가워졌다.

“…혹시 엄마 아빠를 찾았나요?”

- …아니요. 그런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다행이다.

다행인데, 왜 이렇게 속이 시린지 모를 일이었다. 온몸이 떨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벽에 몸을 기대었다.

발밑에 구덩이가 생긴 것 같았다.

퇴원 날짜는 남편과 조정해 보겠다고 이야기한 서혜나가 전화를 끊었다.

스르륵- 벽을 타고 몸이 내려앉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다음 일정에 늦어서 비서가 찾아올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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