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알 속의 새 (5)
병실에서만 살았던 도현에게 있어서 거대한 충격이었다.
도현은 부모님을 따라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모든 가구를 배치해 놓은 건지, 따뜻한 베이지 계열의 가구들이 집을 감각적으로 꾸미고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티브이가 걸린 넓은 거실과 아일랜드 식탁이 자리 잡은 주방, 서재로 쓸 생각인지 책장이 가득한 방과 침대와 책상이 들어선 따뜻해 보이는 방을 구경한 후 이 층으로 올라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일 층과 다르게 이 층은 좀 더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짙은 남색과 파스텔 톤의 하늘색을 중심으로 꾸며진 방과 아직 용도를 정하지 않았는지 텅 빈 방을 보고 푹신한 러그가 깔린 다락방까지 구경한 도현은 다시 일 층으로 내려왔다.
“방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도현의 물음에 서혜나가 작게 웃었다.
“집이 좀 크긴 한데 괜찮은 집 중에서는 여기가 가장 학교랑 가까워서 어쩔 수 없었어. 남는 방이 있으면 어떤 용도로 쓸지 고민해서 네가 채워 넣어도 돼. 그래서, 쓸 방은 정했니?”
이미 마음을 정한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층에 다락방이랑 이어져 있는 방이요. 거기 쓰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다락방을 본 순간 도현은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넓게 탁 트인 창문과 바닥에 깔린 부드러워 보이는 러그는 완벽한 아지트처럼 보였다.
다락방이 아니더라도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하늘색으로 꾸며진 방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 방으로 하자.”
서혜나와 이장혁은 도현의 짐을 들고 이 층으로 올라갔다. 도현의 옷을 차곡차곡 개어 서랍에 정리하던 서혜나가 말했다.
“어느 방을 쓸지 몰라서 기본적인 가구만 들여놓았어. 필요한 건 내일 사려는데, 괜찮니?”
“네, 괜찮아요.”
“저녁은 먹었고?”
물어보면서도 서혜나는 내심 긴장했다. 아직 밥을 먹지 않았다면 무엇을 사줘야 할지 고민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렸다.
‘주변에 맛집이 어디 있었더라?’
서혜나가 미리 검색했던 음식점을 떠올리는데 도현의 대답이 돌아왔다.
“네, 먹었어요.”
도현의 부모님이 병원에 온 시간이 7시였다. 병원에서 저녁밥을 먹는 시간은 6시였기 때문에 도현은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였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네.’
서혜나가 왠지 모를 아쉬움과 허탈함에 한숨을 삼켰다.
“…그렇구나. 뭐 더 필요한 건 없어?”
“네.”
물어볼 것을 모두 물어보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세 가족 사이에 이제는 익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럼, 엄마랑 아빠는 남은 짐 정리할 테니까 방에서 쉬겠니?”
부모님이 짐 정리를 하는데 혼자 쉬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작은 몸으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가만히 있기도 그랬다.
도와드릴지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든 도현은 불편해 보이는 부모님을 보았다. 그리고 부모님도 자신만큼 이 상황을 어색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서로 불편할 일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자.’
그렇게 생각한 도현이 입을 열었다.
“네. 그럼 전 방에서 쉴게요.”
“그래. 알았다. 너도 피곤했을 텐데 푹 쉬렴.”
이장혁이 방을 나가고, 서혜나가 그 뒤를 따라 나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서혜나와 도현의 눈이 마주쳤다.
“내일 아침에… 깨우러 와도 괜찮겠니?”
“아….”
당황한 도현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서혜나의 얼굴이 조금 흐려졌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도현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생활했다.
잠에서 깨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했고 그게 당연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표정이 눈에 걸렸다.
‘앞으로 계속 같이 살 건데. 내가 익숙해지는 게 맞겠지.’
그렇게 판단한 도현이 괜찮다고 말하자 서혜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방문을 닫은 서혜나가 결심한 듯 단단한 표정을 지었다.
후회는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후회할 시간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했다.
* * *
다음 날, 서혜나가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도현을 깨우러 갔지만, 도현은 이미 기상한 상태였다.
어색한 아침 인사를 마치고, 어색한 아침 식사를 한 후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쇼핑몰로 향했다.
주방 식기를 살 때도, 침구류를 구매할 때도, 자신의 옷을 살 때도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도현은 한 코너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Taylors book]
도현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서혜나는 도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곧바로 눈치챘다.
“여기 구경할래?”
서혜나의 물음에 도현이 머뭇거리자, 서혜나가 먼저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서혜나를 따라 들어간 도현은 눈앞에 펼쳐진 세상에 작게 입을 벌렸다.
누가 봐도 관심 있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서혜나가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읽는 척을 했다.
“나는 여기서 책 좀 살펴보려고. 도현이 너도 읽고 싶은 책 있으면 고르고 있어.”
“오늘 사야 할 거 많다고….”
“그건 아빠가 사면 되지. 아빠가 물건 고르는 건 엄마보다 꼼꼼하게 잘해.”
그렇게 말한 서혜나가 이장혁을 쳐다보았다.
“여보. 우리 필요한 물건 기억하고 있지?”
어딘가 매섭기까지 한 눈빛에 이장혁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 올게. 여기서 도현이랑 책 고르고 있어.”
서혜나가 몸을 빙글- 돌려 도현을 보고 씩 웃었다.
“들었지? 우린 여기서 책이나 고르고 있자. 물건 사는 건 아빠한테 맡기고.”
어느새 카트를 들고 사라진 아빠가 있었던 자리를 보면서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도현이 그동안 상상해 왔던 부모님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백설 공주>에 나오는 계모와도 달랐고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의 부모님과도 달랐다.
도현은 부모님을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서혜나는 어느새 책 코너를 옮기며 여러 책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 서혜나의 뒤를 따라다니던 도현도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도현에게 있어서 가장 책이 많은 공간은 병원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그런 도서관보다 다섯 배는 더 큰 책 가게는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도현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병원 도서관에 가면 도현이 모르는 책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도현이 아는 책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처음 보는 책 천지였다.
어느새 눈을 반짝반짝하게 빛낸 도현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책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서혜나는 그런 도현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조금 떨어져서 도현을 지켜보았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언젠가 간병인에게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어.’
책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은 꼭 은하수가 흐르는 우주 같았다.
생기를 가득 담아 빛나는 도현은 저절로 눈길을 빼앗길 만큼 사랑스러웠다.
서혜나는 빈 책장이 가득한 방에 책을 빽빽하게 채워 넣기로 마음먹었다.
* * *
한편, 도현은 흥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재밌겠다. 와, SF? 아, 공상 과학 소설?’
어딜 봐도 흥미로운 책 천지였다.
도현이 정희성의 기억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어떤 것인지도 모를 장르의 책들도 많았다. 다 재밌어 보여서 고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간신히 한 권을 들고 공상 과학 소설 코너를 빠져나온 도현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헤르만 헤세가 쓴 작품이 더 있었구나.’
낯선 책 사이에서 발견한 익숙한 작가명에 반가움을 느낀 도현이 책을 집어 들었다.
어느새 품에 안은 책이 한 권 두 권 늘어나기 시작했다.
팔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도현이 멈칫했다.
‘이렇게 많이 골라도 될까?’
책 몇 권을 다시 가져다 놓을지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 이달의 추천작? 무슨 책이지?’
볼을 발갛게 물들인 도현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앞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혔다.
투두둑-
갑작스러운 충격에 힘이 풀린 도현이 들고 있던 책을 놓쳤다. 당황한 도현이 떨어진 책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는데 머리 위에서 어딘가 앳되고 불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한 박자 느리게 알아챈 도현이 어정쩡하게 고개를 들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듯한 머리카락에 사나워 보이는 눈매. 햇볕에 그을린 듯 거칠어 보이는 어두운 피부를 한 소년이 도현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
도현의 반문에 맥이 못마땅하다는 듯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사람 치고 사과도 안 하냐?”
“아!”
도현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떨어진 책들에 신경이 쏠려 사람과 부딪힌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도현이 미안한 기색을 잔뜩 담아 말했다.
“죄송합니다.”
맥은 각 잡힌 자세로 사과해 오는 도현의 모습에 살짝 당황의 빛을 띠었다.
어떤 말을 해도 무어라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는데 너무 완벽하게 정중한 사과였다.
맥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허리를 일으킨 도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맥을 보았다.
“혹시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그럼 다쳤길 바라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른 맥은 선한 얼굴로 쳐다보는 도현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요즘 애들은 원래 이런가?’
코를 흘리며 찡찡거리며 우는 애들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애들밖에 본 적이 없던 맥에게 있어서 도현의 정중한 태도는 처음이었다.
사실 맥은 도현이 서점에 들어온 순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홀로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며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아이의 주변에만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특별하고 싶은 사람만이 있을 뿐 특별한 사람은 없다고 굳게 믿어왔던 맥의 신념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도현에게 시선이 빼앗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점 안의 사람들이 대부분 도현을 흘낏거리고 있었다.
누가 쳐다보든 말든 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홍조를 띤 채 책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맥의 마음이 비틀렸다.
누가 봐도 사랑받고 곱게 자란 모양새라 배알이 꼬였다.
저 얼굴이 일그러지고 울음을 터트리는 걸 봐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도현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부딪혔다.
그런데 당황하며 울 것 같았던 도련님은 떨어진 책에만 관심이 있었고, 자존심이 상한 맥이 주의를 돌리자 곧바로 사과해 왔다.
전부 맥이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
까만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투명하게 비추자 맥은 어쩐지 허탈해졌다.
어차피 맥과 엮일 일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척 보아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괜히 시비 걸어서 본전도 못 찾았네.’
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다. 가라.”
“네?”
맥은 대답 대신 도현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쳤다. 순간적으로 몸이 기우뚱 기울었던 도현이 중심을 잡고 바로 섰을 땐 맥이 멀어진 후였다.
‘…뭐였지?’
아리송해진 도현이 멀뚱멀뚱 서 있다가 땅에 널브러진 책을 발견했다.
‘아! 책 주워야지!’
방금 일어났던 일을 머릿속에서 단숨에 치워버린 도현이 주섬주섬 책을 주웠다.
한편, 서혜나는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현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서혜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들끼리의 일에 어른이 끼어드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서혜나였지만, 막상 자신의 아들에게 그런 일이 닥치니 걱정스러워서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갈등이 해결된 것 같았다.
도현의 어른스러운 대처에 대견스러운 한편, 아이답지 않은 침착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서혜나는 자연스럽게 도현에게 다가갔다.
“책은 많이 골랐니?”
이달의 추천작 코너를 심각하게 보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서혜나의 손에는 가벼운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품에 안은 책을 내려 본 도현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몇 권…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을까요?”
도현의 말에 서혜나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 지금도 적어!”
“적다고요?”
지금까지 도현이 고르고 골라 선택한 책의 개수가 여섯 권이었다. 도현이 서혜나의 손에 들린 책과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번갈아 보았다.
“일 층에 있는 서재 봤지? 거기 텅텅 비었잖아. 다 채워 넣으려면 한참 더 사야 할걸.”
빈 책장이 가득했던 방을 떠올린 도현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미약하게 떨렸다.
“거, 거길 다 채워 넣어도 돼요?”
“그럼! 그러라고 있는 방인걸.”
서혜나는 한 손으로 눈을 비볐다.
순간, 도현의 머리 위에서 파닥거리는 귀를 본 것 같았다.
다행히 다시 본 도현의 머리 위는 깨끗했다. 하얗고 말랑한 찹쌀떡 같은 얼굴이 서혜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구 자식인데 이렇게 귀여운 거지? 하늘에서 떨어졌나?’
서혜나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도현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몇 권 더 골라도 괜찮을까요?”
“괜찮긴 한데….”
서혜나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점심부터 먹자. 여기에 유명한 음식점 있대. 혹시 해물 좋아하니?”
배고픔도 잊고 있었던 도현은 12시가 넘은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거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