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6)화 (17/582)

제16화. 알 속의 새 (6)

서점에 왔을 때가 열한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한 시간도 넘게 구경한 것이다.

도현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시간에 놀라워하며 서혜나를 따라 계산대에 책을 올려놓았다.

Taylors book의 캐셔 앤디는 어린아이가 조그만 손으로 책을 올리는 것을 흐뭇한 심경으로 바라보다가 책 한 권을 바코드로 찍었다.

‘어?’

고개를 갸웃한 앤디가 아이가 고른 나머지 책을 모두 확인했다.

“아이가 읽을 책인가요?”

“네.”

서혜나의 대답에 앤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읽기엔 조금 어려울 텐데….”

우주에 표류하는 공상 과학 소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른들조차 잘 읽지 않는 고전도 몇 권 있었다.

앤디의 말에 서혜나가 도현이 고른 책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애가 읽기엔 무리인 책 같은데?’

물론 도현이 그저 갖고 싶어서 고른 책이라도 해도 사줄 생각이었지만, 서혜나는 조금 궁금해졌다.

“이 책들 다 읽을 거니?”

“네! 재밌을 거 같아요.”

앤디의 눈이 표지마저 두꺼운 책에 닿았다.

‘재밌을 거 같다고…?’

총명하게 빛나는 두 눈은 거짓을 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서혜나는 케일리에게 종종 전해 듣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도현이는 천재예요. 도현이 또래 중에서 도현이만큼 이해력이 뛰어난 아이를 본 적이 없어요.’

그때 서혜나는 단순히 아이 엄마에게 하는 립 서비스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진짜였나?’

잠시 고민하던 서혜나는 그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천재이건 아니건 도현은 자신의 아들이었으니까.

씩 웃은 서혜나가 앤디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여기, 계산해 주세요.”

“아, 네, 네!”

앤디가 카드를 받아들고 총 일곱 권의 책을 계산했다. 책을 넣은 종이 가방을 도현이 설레는 표정으로 받아 들었다.

그걸 본 서혜나가 손을 내밀었다.

“무겁잖아. 엄마가 들어줄게. 이리 줘.”

“괜찮은데….”

짧은 실랑이 끝에 승리한 사람은 서혜나였다.

서혜나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양손에 종이 가방을 든 채 서점을 빠져나왔다.

* * *

잠시 후.

도현은 부모님과 함께 해물 리조또를 먹고 있었다.

“이 해물 리조또가 쇼핑몰 명물 중 하나라고 하더라고. 맛은 어때?”

“맛있어요.”

새우와 오징어, 바지락을 아낌없이 넣어서 토마토 베이스로 조리한 리조또는 살짝 매콤해서 더욱 맛있었다.

이장혁과 서혜나가 야무지게 먹는 도현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게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느낌인가.’

둘은 부모의 마음을 절절히 체감하는 중이었다.

어느새 접시가 깨끗하게 비워지자 서혜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여보. 당신 오늘 여섯 시 비행기 맞죠?”

“응, 맞아.”

서혜나와 대화를 나누던 이장혁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에이드를 마시던 도현이 이장혁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구, 궁금한 거라도 있니?”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이장혁과 서혜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고 보니 말을 안 해줬구나!’

실책을 깨달은 이장혁이 도현에게 설명했다.

“둘 다 미국에 머무르고 싶었는데, 회사 사정상 그게 쉽지 않아서 말이야. 엄마만 미국에 남고 아빤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엄마는 미국에 있어도 괜찮으신 건가요?”

도현은 괜히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건 아닌가 싶어 불안해졌다.

도현의 생각을 눈치챈 서혜나가 단호하기까지 한 어조로 말했다.

“엄마는 엄마가 남고 싶어서 남는 거야.”

반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 진지한 서혜나의 얼굴에 도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후 5시.

공항에 선 도현은 싱숭생숭한 마음을 내리눌렀다.

쇼핑몰에서 점심을 다 먹자 시침이 3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너무 느리게 먹었나.’

소화 기관이 좋지 않던 도현은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 게 습관화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밥 먹는 데 배는 오래 걸렸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는 도현을 이장혁과 서혜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기다려 주었다.

점심을 늦게 먹은 탓에 쇼핑을 하기엔 애매했다. 세 사람은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새로 구매한 물건을 정리하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지금, 이장혁이 출국 절차를 밟고 있었다.

도현은 어정쩡하게 서서 비행기표를 들고 돌아오는 아빠를 보았다.

두 부자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어… 그러니까. 음.”

이장혁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도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갑게 작별 인사를 하자니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하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죄지은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더듬던 이장혁이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한국에 가서 종종 연락해도 괜찮겠니?”

인사말을 고민하던 도현의 머릿속이 딱 멈췄다.

이장혁과 서혜나가 긴장한 얼굴로 도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던 도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혁은 긴장하느라 꽉 쥐었던 주먹을 풀어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장혁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이젠 진짜 가야 했다.

그가 의자에 놓았던 가방을 들어 올리자, 서혜나가 말했다.

“조심히 가고. 도착해서 연락해.”

“알겠어. 당신도 항상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걱정은. 알았어요, 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할 테니까 내 걱정은 그만하고 늦기 전에 얼른 가.”

이장혁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서혜나와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도현이도… 건강하고.”

어색하게 흘러나온 말에 도현이 입을 들썩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렇게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한 대가 미국을 떠났다.

* * *

도현은 침대 위에 흐물흐물하게 늘어졌다.

형과 놀러 다닐 때 말고 이렇게 활동량이 많은 날은 처음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기 힘들었다.

‘이렇게 정신없이 지나간 날도 오랜만이네.’

도현은 기묘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형이 눈을 감은 날 이후로 하루하루가 너무 길었다.

매분 매초가 너무 길고 지루해서, 오래오래 살다가 오라는 형과의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단 생각이 들 정도로.

도현의 시선이 책상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진 바이올린 가방에 닿았다.

들떴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도현이 오늘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건, 형의 영혼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도현이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피곤했다.

* * *

따란~ 딴~

알람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서혜나는 하품을 하며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전 7시.

길게 기지개를 한 후, 화장실로 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찹찹!

뺨을 두어 번 두드린 서혜나가 로션을 꼼꼼히 바르고 침실을 빠져나왔다.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으면서 기분 좋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자고 있겠지?’

어제 아침.

도현이의 아침잠을 깨우는 데 실패한 서혜나는 괜한 오기가 생겼다.

꼭 잠자고 있는 아들을 직접 깨워주고 싶다는 이상한 오기였다.

도현의 방문 앞에 선 서혜나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몇 초 후.

“들어오세요.”

방 안에서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실패구나!’

서혜나는 실패의 쓴맛을 삼키며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참 전에 일어났는지 졸음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똘망한 눈을 한 도현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책상에 앉은 도현의 앞에는 어제 산 책이 펼쳐져 있었다.

“책 읽고 있었니?”

“네. 잘 주무셨어요?”

도현의 아침 인사에 서혜나는 잠깐 감격스러워졌다.

‘어젠 내가 건넨 인사에 대답하는 게 전부였는데!’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봐도 괜찮은 걸까?

서혜나는 조금 희망을 품었다.

“응, 엄마는 잘 잤어. 도현이는?”

“저도 잘 잤어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가 서혜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행복한 얼굴로 웃는 엄마의 모습에 도현은 조금 어색해져서 눈을 피했다.

“아침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생각나는 음식이 없던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서혜나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떠올렸다. 어제 빠르게 쇼핑을 마무리하느라 식재료를 많이 구입하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요리가 한정되어 있었다.

집에 있는 식재료로 할 수 있는 요리를 떠올려보던 서혜나가 말했다.

“핫케이크는 어때?”

“괜찮아요.”

도현의 대답에 서혜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핫케이크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혼자 남은 도현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시간 전부터 일어나 있었지만, 책은 여전히 첫 페이지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정말로 학교에 다니는 거야.’

기대와 두려움, 설렘과 우울함이 도현의 마음속을 휘저어 놓았다.

새로운 환경.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다가도 방 한 켠에 자리한 바이올린 가방을 볼 때면 손끝이 싸늘하게 식었다.

‘형은 나를 위해 영혼까지 희생했는데…. 나는.’

바닷속에 갇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몸을 잠식하는 무기력과 우울함에 도현이 지친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밥 먹으러 내려오라는 엄마의 목소리에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층으로 내려가 식탁에 앉은 도현의 얼굴은 평소와 같아 보였다.

도현은 태연한 얼굴로 핫케이크를 말끔히 비웠다.

* * *

줄리아 하모니는 기대로 가득 찬 얼굴로 교무실 문을 응시했다.

오늘은 새로운 학생이 편입하는 날이었다.

줄리아는 편입생의 서류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특이 사항에 오랜 병원 생활로 학교를 다녀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근무 3년 차.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줄리아는 굳게 결심했다.

‘즐거운 학교생활이 되도록 만들어줘야지!’

줄리아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오 분 간격으로 교무실 문을 기웃거리기를 몇 차례.

드르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벌떡!

줄리아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들어온 사람은 한 동양인 여자였다.

굵게 컬이 들어간 갈색 머리카락과 아이의 엄마라기엔 젊고 예쁜 얼굴이 눈에 띄었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화려한 패션이었다.

몸을 감싸면서도 과하지 않은 롱 원피스와 고급스러워 보이는 롱 코트를 어깨에 걸친 여자가 맑은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교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작은 소년이었다.

작은 머리통을 발견한 줄리아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새카만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흰 피부였다.

하얀 눈밭처럼 희고 고운 피부에 줄리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동양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무슨 눈사람을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아이와 눈이 마주친 줄리아가 숨을 흡! 들이켰다.

‘미친! 귀여워!’

사진으로 봤을 땐 조금 아파 보여서 잘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사람이라기보다는 요정을 데려다가 놓은 것 같았다.

병원 생활 탓인지 아이 같지 않은 성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것이 더욱 아이를 특별하게 느껴지게 했다.

“도현이 반 선생님이신가요? 만나서 반가워요. 도현이 엄마예요.”

서혜나가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띠며 손을 건넸다.

‘앗! 맞다!’

아이에게 시선이 팔려 인사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줄리아가 급하게 건네진 손을 마주 잡았다.

손을 한 번 흔든 서혜나가 매끄럽게 입술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줄리아의 표정이 멍해졌다.

‘유전이구나.’

줄리아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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