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7)화 (18/582)

제17화. 알 속의 새 (7)

델마 아카데미 2학년 하모니 교실.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하면서 조용했던 교실이 시끌벅적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는 데 성공한 진은 특별히 아끼는 노란색 후드 집업을 입어 평소보다 기분이 좋았다.

진의 발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안녕!”

진의 밝은 인사에 뒷자리에 앉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다.

채도 높은 금발을 양 갈래로 묶은 여자아이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진! 오늘은 안 늦었네?”

“내가 매일 지각하지는 않거든?”

교우 관계 원만. 성적 우수.

이렇게만 들으면 모범생 같은 진에게는 딱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잠을 너무너무 좋아한다는 것.

아침마다 진의 집 안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깨우려는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자려는 진의 공방은 창칼만 없을 뿐이지 누구보다도 치열했다.

뻔뻔한 진의 모습에 니콜라스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변했다.

“너 별명이 잠자는 숲속의-”

“아! 뭐라는 거야!”

퍽퍽!

진이 니콜라스의 어깨를 사정없이 강타했다.

“악! 으악! 알았어! 알았다니까!”

장난을 좋아하는 니콜라스도 진의 손바닥 아래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니콜라스가 화끈거리는 어깨를 매만지며 투덜거렸다.

“다비가 네 이런 모습을 알아야 하는데….”

“뭐? 어깨가 뻐근하다고?”

니콜라스의 입이 딱 다물렸다.

주변에 몰려든 여자아이들과 꺄르르- 웃으며 수다를 떨기 시작한 진을 보고 니콜라스의 눈가가 떨렸다.

‘세상 사람들이 진에게 속고 있어!’

겉보기엔 그저 천진난만한 여자애 같았지만, 그 속에는 아주 무시무시한 마귀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아는 게 자신뿐이란 생각에 니콜라스가 슬픔의 눈물을 속으로 흘리는 사이, 교실 문이 열리고 긴 머리카락을 아래로 묶은 여자가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모여 떠들던 아이들이 빠르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짝짝!

줄리아는 교실 안으로 들어오며 손뼉을 쳤다. 시끌벅적했던 교실이 단숨에 조용해졌다.

“자, 모두들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줄리아 선생님!”

아이들이 합창하듯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보며 줄리아는 귀여움에 몸서리쳤다.

‘핫! 안 돼! 오늘은 중요한 날이야! 정신 차리자, 정신!’

다시 심기일전한 줄리아가 큼큼,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말했다.

“자, 자. 집중! 오늘은 새로운 친구가 왔어요.”

줄리아의 말에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진도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니콜라스에게 속삭였다.

“여자애일까, 남자애일까? 여자애였으면 좋겠다!”

진은 새로운 친구를 사귈 생각에 잔뜩 신이 났다.

니콜라스도 이 새로운 소식에 들뜬 건 마찬가지였다.

“난 남자애였으면 좋겠는데!”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반에 줄리아가 탁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우리 착한 하모니 반 친구들은 새로운 친구랑 친하게 잘 지낼 수 있죠?”

“네!”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에 싱긋 웃은 줄리아가 교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살짝 연 줄리아는 잔뜩 굳은 얼굴로 대기하고 있던 도현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들어와도 괜찮겠니?”

줄리아의 물음에 도현이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마음을 조금 내리누른 도현이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끌벅적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도현은 반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어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왼발이 먼저인지 오른발이 먼저인지.

‘손은 동시에 뻗는 거였던가?’

한번 의식하니 걸음걸이가 끝도 없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고뇌 속에서 간신히 교탁 앞까지 도착한 도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십 쌍의 눈동자에 입 안이 말라왔다.

알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자, 도현아. 자기소개해 볼까?”

오랫동안 병원에 있었다거나, 학교에 다니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이야기는 일부러 생략했다.

때론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용기를 내서 반 아이들 면면을 둘러보았다.

대략 스무 명가량 되는 아이들이 도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주목받는 것도 처음이네. 사람들은 보통 나를 피하기 바빴으니까….’

거부와 혐오가 아닌 호의와 호기심이 담긴 시선.

도현은 목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저릿한 감각을 억지로 눌러 담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도현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델마 포트웨이 4번지에 이사 왔어요.”

말을 끝냈는데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아이들의 모습에 도현은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잘 부탁드려요.”

인사를 마친 도현이 줄리아를 보았다.

줄리아는 조금 난감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애가 너무… 정중했다.

너무.

어디서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그래. 도현이가 자기소개를 아주 예의 바르게 잘해 주었구나!”

줄리아는 초등학교 교사 3년 차의 경험으로 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자, 그러면 우리 친구들도 도현이랑 잘 지내자는 의미에서 다 같이 ‘잘 부탁해~’라고 말해볼까요?”

“잘 부탁해~”

“잘했어요! 도현아, 저기 뒤에 빈자리 있지? 저기 가서 앉으면 돼.”

“네.”

도현이 줄리아가 말한 자리로 걸어갔다. 자리로 향하는 내내 아이들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 줄리아가 친구랑은 친하게 지내야 한다, 싸우면 안 된다와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벨벨벨- 벨벨.

아침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현을 보던 줄리아가 한 차례 더 당부하고는 반을 나갔다.

줄리아가 나가자마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아이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

양옆으로 곱게 묶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고, 살짝 주근깨가 박힌 얼굴은 호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호감의 표시에 도현은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응. 안녕.”

소심한 대답에도 뭐가 좋은지 여자애가 밝게 웃었다.

“나는 진 레이시야. 얜 니콜라스 가비.”

진의 옆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가 코끝을 찡그렸다.

진이 또 순한 양 같은 얼굴을 하고 가식을 떨고 있었다!

니콜라스가 소름이 끼친다는 표정으로 진을 쳐다보자 진이 책상 아래에서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니콜라스가 재빨리 도현에게 인사를 했다.

“어, 음. 반갑다. 친구들은 보통 니키라고 불러. 너도 그렇게 불러도 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니콜라스는 도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차가운 얼굴을 하고선 대답하는 것도 단답식이었다.

여자애들은 그것도 멋있다고 좋아하는 중이지만, 니콜라스가 봤을 때 이 편입생은 그냥 성격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절대로 인기가 많아서 질투하는 게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지금 아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어느새 도현은 반 여자애들에게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신이 나서 도현에게 말을 거는 진을 보고 니콜라스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꺼낸 말에 니콜라스의 귀가 쫑긋했다.

“나 포트웨이 4번지에 가본 적 있는데, 거기 주택들은 앞마당이 진짜 넓더라! 막 수영장 같은 것도 있던데!”

그 말에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 너네 집에도 수영장이 있어?”

“응, 있어.”

니콜라스는 부러운 눈길로 도현을 보았다.

집 앞마당에 있는 수영장이라니!

수영장을 만들어 달라고 단식 투쟁까지 했지만, 실패의 쓴맛을 보았던 니콜라스의 눈빛이 아련하게 변했다.

“정말? 니키가 수영하는 거 진짜 좋아하는데! 나중에 놀러 가면 되겠다.”

갑작스러운 진의 말에 니콜라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니콜라스와 도현의 시선이 마주쳤다.

찰나의 시간.

니콜라스가 긴장감에 식은땀이 난 손바닥을 말아 쥐고-

무표정한 얼굴로 니콜라스를 보던 도현이 시선을 스윽- 흘리고선 담담히 말했다.

“그렇구나.”

니콜라스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그렇구나? 그렇구나아?’

저 편입생은 성격이 안 좋은 게 분명했다!

마음이 상한 니콜라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니콜라스는 편입생과 친하게 지내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하며 아이들 틈바귀에서 빠져나왔다.

* * *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진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따라다니다 보니 점심시간이 되었고, 소문을 듣고 몰려온 다른 반 아이들을 상대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끝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마지막 수업이 끝이 났다.

도현은 줄리아한테 받았던 교과서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학교 수업은 생각보다 특별한 게 없구나.’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도현은 학교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도현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왜 배우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기초적인 내용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또래 아이들과 한 공간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건 새로운 경험이라 신기하긴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낯선 건 호의 섞인 관심을 보이는 또래들이었다.

또래 아이가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상황을 난생처음으로 겪는 도현으로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친밀한 감정을 자신이 받아도 괜찮은 것인지도.

도현이 복잡한 심경으로 가방을 들고 일어나는데, 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 챙겼어? 그럼 나가자!”

“나 말하는 거야?”

도현이 물음에 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긍정하자 옆에 서 있던 니콜라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니콜라스는 이 재수 없는 편입생과 같이 하교하고 싶은 마음이 쥐똥만큼도 없었다.

“언제는 여자애였으면 좋겠다면서. 남자앤데 왜 이렇게 좋아하냐?”

괜스레 툴툴거리는 니콜라스의 말에 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도현이는 여자애보다 예쁘잖아! 예쁜 건 다 좋은 거야.”

미술품 수집가인 엄마의 영향을 받은 진은 지극히 탐미적인 면모가 있었다.

뻔뻔한 진의 말에 니콜라스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얜 그래도 남자애잖아!”

“그러면 뭐 어때. 앨리스 언니보다 예쁜걸?”

앨리스는 델마 초등학교에서 가장 예쁜 학생이었다.

한때 앨리스가 첫사랑이었던 흔한 델마 초등학교 남자애 중 하나인 니콜라스는 버럭 화를 내려다 도현의 얼굴을 보았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는 패배자의 심경으로 진과 도현의 뒤에서 터덜터덜 걸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도현의 옆에 선 진이 종알종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집이 학교랑 가까워서 걸어서 다녀! 아빠가 항상 데려와 주시거든. 니키는 보통 스쿨버스 타고 다니고. 도현은 엄마가 데리러 오셔?”

도현의 집은 학교까지 걸어서 이십 분이 조금 넘는 거리에 있었다.

스쿨버스가 멈추는 지점에 가까이 있어서 스쿨버스를 타도 괜찮지만, 아직 여러모로 익숙해지지 않은 도현을 배려해 한동안 차로 등하교를 하기로 한 참이었다.

“응, 당분간은 그럴 것 같아.”

“으음. 아쉽다! 니키랑 같이 스쿨버스 타면 될 텐데. 집도 비슷한 방향이라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있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자 어느새 교문 앞까지 와 있었다.

도현이 두리번거리며 엄마가 있는 곳을 찾았다.

빵!

교문 옆에 세워져 있던 차 한 대가 경적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차를 살 거라고 했지.’

도현은 그게 엄마의 차임을 깨달았다.

“나…. 저기 엄마가 기다리고 계셔서.”

“아, 지금 가야 하는구나!”

진이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고 니콜라스의 표정은 밝아졌다.

니콜라스가 그러든 말든 진은 도현을 보고 밝게 인사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내일 봐, 도현!”

진의 인사에 도현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도현의 시선이 건들건들하게 손을 한 번 휘적 하고 사라지는 니콜라스의 뒷모습에 닿았다.

- 니키가 수영하는 거 진짜 좋아하는데!

명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후우.”

도현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놀러 오겠냐고… 물어봤어야 했을까.’

도현은 자신이 한 생각에 깜짝 놀랐다.

삽시간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