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18)화 (19/582)

제18화. 알 속의 새 (8)

서혜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도현이 들어간 방을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어두운 안색으로 차에 타는 모습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준비한 말들이 입 안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지금.

집에 돌아온 도현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서혜나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도현이 정신적으로 위태롭다던 벤자민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학교에 보내는 게 너무 이른 결정이었을까?’

서혜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땐 그 선택이 최선이었어.’

벤자민이 연결해준 소아 정신과 의사와 충분히 상담한 후 내린 결정이었다.

혼자 있을 때 유독 이상 증세를 보였기 때문에 최대한 혼자 있는 시간을 줄이는 게 중요했다.

‘그래. 후회하기보단 나아가기로 했잖아.’

마음을 굳힌 서혜나가 문을 두드렸다.

조용-

한참을 기다려도 방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혜나가 침을 한번 삼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서혜나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방 안에는 도현이 바이올린 가방을 끌어안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텅 빈 눈을 한 아이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호흡할 때마다 미세하게 들썩이는 움직임만이 살아 있는 인간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열 걸음.

그 정도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

‘아주 먼 곳에 있는 것 같아.’

별보다 환하게 빛났던 두 눈동자는 그림자에 먹혀 탁했고, 사랑스러운 홍조가 어렸던 두 뺨은 그저 창백했다.

아이가 있는 곳에만 색이 모조리 빠져버린 것 같았다.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기이한 불안감에 서혜나가 다급히 도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정신을 차린 도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언제부터 와 계셨던 거지?’

도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언젠가 들키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최대한 자신의 상태를 모르길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 더욱 태연한 척 굴었는데….

도현의 표정이 조금 흐려졌다.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볼까 봐 걱정된다거나 정신 병원에 가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도현이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형과의 기억을 치료해야 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건 싫어.’

도현에게 너무 소중하고 귀한 기억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들통이 났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침묵이 버거워진 도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서혜나의 얼굴에 상황에 맞지 않는 미소가 떠올랐다.

“방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니? 길도 익힐 겸 동네 산책이라도 하는 건 어때?”

당황한 도현이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산책이요?”

“응. 엄마도 아침에 돌아다녀 봤는데,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어서 걷기 좋더라. 주변에 공원도 많고. 앞으로 반년은 살 동네인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서혜나의 어투는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순간, 도현은 깨달았다.

‘모르는 척해주시는 거구나.’

높은 곳에서 추락한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산책하기 싫으면 바다는 어때? 차 타고 가면 금방인데, 엄마랑 바다 구경하러 갈까?”

이상한 기분을 잠재우며 잠시 침묵하던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동네 돌아다니면서 산책하고 올게요. 혼자 가도 될까요?”

권유를 거절하는 건 죄송스러웠지만, 지금 도현은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러나 도현의 생각과 달리 서혜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방에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혼자라도 산책하는 게 몇 배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표정이 밝아지기까지 했다.

“그래! 너무 늦지만 않게 돌아오렴. 이따가 저녁도 먹어야 하고 아무리 안전한 동네라고 해도 밤길은 어린애 혼자 다니기에 위험하니까.”

그 외에도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않기, 어두운 골목길에는 들어가지 않기,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911에 전화하기 등등.

서혜나의 잔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도현은 지루하거나 짜증 난 기색 없이 경청했다.

오히려 잔소리를 듣는 게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서혜나가 말한 주의사항을 똑같이 외워 말하고 나서야 풀려난 도현은 바이올린 가방을 등에 메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이른 시간에 학교를 마쳐서 그런지, 아직 하늘이 환했다.

도현은 어디로 갈지 정해두지 않고 그냥 발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걸었다.

‘적당히 걱정하지 않으실 정도만 있다가 들어가야지.’

주택이 늘어선 거리를 걷던 도현의 눈에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들어왔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호의로 가득 찬 시선.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

밝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던 아이들.

오늘 도현은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변화를 실감했다.

처음엔 그 낯선 감각에 속절없이 휘말려 태평한 고민이나 하고 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다음에는 분함보다 슬픔이 더욱 커졌다.

도현이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겨우 불완전한 영혼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멸시와 혐오를 받다가 끝이 난 형의 삶은?

그 삶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발밑에 끝없는 수렁이 펼쳐진 것 같았다.

도현은 덕지덕지 달라붙어 오는 질척한 검은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쫓기는 사람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병원에서 내내 앉아서 생활했던 탓에 근육이 부족한 다리가 통증을 호소해 왔다.

그때 도현의 시야에 작은 공원이 들어왔다.

‘저기서 잠깐 쉬어야겠다.’

슬슬 발바닥도 아파오는 참이었던 도현이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띄엄띄엄 세워진 가로등 몇 개와 모래가 깔린 작은 놀이터,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정자가 전부인 작은 공원이었다.

공원 입구에 선 도현은 정자에 앉아 있던 선객을 발견했다.

‘다른 곳으로 가야 하나?’

순간, 도현의 눈에 하얀 종이가 들어왔다.

정자에 자리한 남성이 하얀 종이에 미친 듯이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도현은 무심결에 남자가 있는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끄아아악! 젠장!”

돌연 남자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성을 지르자 도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 모르는 사람은 따라가면 안 돼. 알겠지? 이상한 사람 보면 911에 신고하고!

갑작스럽게 떠오른 엄마의 당부가 도현의 발목을 붙잡았다.

도현은 생각했다.

‘일단 모르는 사람은 맞지만, 저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따라가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럴듯한 생각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은….

‘음.’

도현의 시선이 괴이한 소리를 흘리고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이상한가?’

도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애초에 이상하다는 것의 기준이 뭐지?’

도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꼬였다.

우연히도 그 순간 남자의 발치에 떨어진 종이 뭉치가 보였다.

‘주워 드려야겠네.’

아까까지 하던 고민을 자연스럽게 치워버린 도현이 정자로 걸어가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어…?’

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일반적인 글과 달리 괄호 안에 들어간 지시문.

종이의 정체는 시나리오였다.

* * *

고집스럽고 불같은 성격 탓일까.

아르바이트부터 스태프 일까지.

할 수 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지만, 감독의 자리에 올라서는 건 쉽지 않았다.

언제나 조감독 자리를 꿰차는 건 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닌, 줄을 잘 댄 사람이었다.

리암은 자신이 조직에서 출세하긴 글렀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남들이 시켜주지 않으면 내가 한다!

패기롭게 제작사를 박차고 나온 리암은 감독으로서의 첫 시작으로, 직접 시나리오 제작부터 촬영과 편집까지 하는 독립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거기까진 좋았으나….

아무리 고치고, 다시 써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시나리오가 문제였다.

“으흐아악!”

리암이 다시 한번 괴성을 질렀다.

이대론 안 된다.

벌써부터 막히면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온 의미가 없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리암이 숨을 돌리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응?

리암은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양인 소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리암이 눈을 깜빡였다.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존재감이 강렬한 소년이었다. 그런 도현을 보는 리암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저 소년이 스크린에서 연기를 하면 어떨까?

매력적인 피사체를 보자 반사적으로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지 상상하던 리암은 소년의 손에 들린 종이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 시나리오잖아!’

아직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적이 없는 시나리오였다.

당장 돌려받으려던 리암은 생각보다 진지한 얼굴로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는 도현의 얼굴에 멈칫했다.

‘재밌나? 애가 보기에 재밌을 내용은 아닐 텐데.’

어차피 어린아이였다.

동화책이나 읽고 놀이터에 뛰어다닐 나이의 아이가 시나리오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여유를 되찾은 리암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사이, 마지막 장까지 읽은 도현이 종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떠냐?”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도현이 깜짝 놀라 리암을 쳐다보았다. 그런 도현의 시선에 코웃음을 한번 친 리암이 말했다.

“내 시나리오를 무단으로 읽었으니 감상평 정도는 말해주겠지. 그래, 어땠는데?”

“마음대로 읽어서 죄송해요.”

그 반응을 불쾌함으로 이해한 도현이 곧바로 사과했다.

리암이 됐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됐어, 됐어. 사과는 필요 없으니까 감상이나 말해봐.”

감상평을 물어보면서도 리암은 별 기대가 없었다.

‘무슨 이야긴지 이해나 제대로 했으려나?’

그냥 줄거리만 이야기해도 다행-

“재미없어요.”

짧고 간결한 감상평.

리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이해는 다 한 거냐? 그냥 모르겠는 걸 재미없다고 한 거지? 응?”

생각보다 더 격한 반응에 도현은 아차 싶었다.

인간관계에 서툰 도현의 화법은 극단적인 면이 있었다.

너무 말을 안 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게 말하거나.

이번엔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게 말을 한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돌려 말할 줄을 몰라서….”

쩌억-

애써 현실 도피를 하던 리암의 자존심에 선명하게 금이 갔다.

순식간에 야차 같은 얼굴로 변한 리암이 희번덕하게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어느 부분이 그렇게 재미가 없는데!”

눈 밑엔 진한 다크서클, 턱에는 까끌한 수염이 자란 성인 남성이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모습은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였지만, 담력이 남다른 도현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먼저 물어봤으니까 솔직하게 대답해도 괜찮겠지?’

하얗게 바스러진 리암의 멘탈을 알지 못한 도현이 또 한 번 폭탄을 내뱉었다.

“전개가 너무 잔잔해서 지루하게 느껴져요.”

“뭐, 뭣이라?”

아프기 그지없는 소년의 말에 간신히 잡고 있던 이성의 줄이 뚝- 끊겼다.

리암이 마지막 페이지로 종이를 넘겨 도현의 얼굴 앞에서 미친 듯이 흔들었다.

“자! 봐라! 이 장면! 이 감동적인 희생과 화해의 장면!”

“음…. 그게 감동적인 부분인가요?”

도현이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꼬마 같으니라고!”

“제 감수성은 지극히 정상적이에요. 마지막 장면이 그저 그렇게 느껴지는 건 유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아서고요.”

어딘가 씁쓸한 어조를 눈치채지 못한 리암의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시나리오 전반에 걸쳐서 결말에 대한 단서를 던져놨는데 발견하지 못했나 보지?”

“열여섯 번째, 마흔한 번째, 쉰두 번째 장면 말씀하시는 거 맞죠?”

“거짓말하면 안 된단다, 꼬마야. 어떻게 그걸 한 번 보고 다 기억….”

신나서 말을 늘어놓던 리암이 일시 정지를 누른 동영상처럼 멈췄다.

리암이 떨리는 손으로 시나리오를 넘겼다.

열여섯 번째 장면… 마흔한 번째 장면… 쉰두 번째 장면….

‘진짜잖아?’

리암이 경악하는 사이, 도현이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유는 누구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왔잖아요.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온 유라면 희생하기보단 도망치는 쪽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유에게 있어서 이사야는 새로운 가능성 그 자체야. 자신을 희생해 그 가능성을 지켜냄으로써 자신과 화해를 하게 된 거지. 너무 철학적인 내용이라 꼬마가 이해하긴 어려운가 보구나!”

그쯤 되자 도현도 열이 올랐다.

도현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그러는 아저씬 너무 이상론적인 거 아닌가요? 비현실적이에요!”

“네가 염세주의자인 거겠지, 꼬마야! 그리고 아저씨 아니거든?!”

“저도 꼬마 아니거든요?!”

두 사람의 눈이 맞부딪히고, 보이지 않는 전기가 타올랐다.

휙!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외면했다.

잔뜩 열이 오른 도현이 씩씩거리며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아저씨 마음대로 하세요! 전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 와중에도 인사하는 것은 잊지 않은 도현이 지글지글 불타는 눈을 한 채 고개를 꾸벅- 내려 인사하고 뒤로 돌았다.

“허! 그래! 내 마음대로 할 거다! 잘 가라!”

리암도 맞받아치며 손을 휘적여 보였다.

잠시 후.

리암은 얼굴을 부여잡고 인간의 말이라고 보기 어려운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내가 대체 뭘 한 거지?’

그놈의 다혈질적인 성격 때문에 아이랑 진심으로 싸워버렸다.

나이 서른넷 먹고….

차오르는 자괴감에 리암이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는 한편 도현은,

‘내가 말을 너무 무례하게 했어.’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후회하고 있었다.

조금 머리가 식자 무례했던 언행이 하나둘씩 생각났다.

‘그런 식으로 말을 했으니…. 화를 내도 무리가 아니야.’

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를 당한 적도, 누군가와 의견 대립을 한 것도 처음이라 그답지 않게 흥분해 버렸다.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사과드려야겠지.’

어느새 노을이 져 조금 흐려진 하늘을 보던 도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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