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알 속의 새 (9)
카페테리아 라운지.
길게 내려 깐 속눈썹. 우수에 찬 눈동자. 고요한 표정.
도현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우물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도현을 니콜라스가 아니꼽다는 듯이 보았다.
‘멋있는 척하기는!’
니콜라스가 주변을 둘러보고 코끝을 찡그렸다.
카페테리아 내부는 미묘하게 도현이 앉은 테이블 주변에 인구 밀도가 높았다.
겉보기엔 다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것 같았지만-
흘깃- 흘깃-
밥 한 숟갈. 곁눈질 한 번.
밥 두 숟갈. 곁눈질 한 번.
카페테리아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아닌 척 도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말을 걸고 싶어 죽겠지만, 심각해 보이는 표정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다들 정신이 나간 거지.’
니콜라스가 보기에는 꼴값을 떠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코웃음을 한번 친 니콜라스가 삐딱한 눈길로 도현을 보았다.
…물론 조금. 아주 조금. 개미의 뒷다리에 붙은 먼지만큼 멋있어 보이는 것 같긴 했다.
“도현, 무슨 생각해?”
밥을 먹는 건지, 도현의 얼굴을 구경하는 건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도현을 보던 진이 물었다.
“아, 미안. 신경 쓰이게 했네.”
“아냐! 넌 얼굴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밌어서 괜찮아!”
…그게 괜찮은 건가?
겨우 이틀째지만, 또래 아이는 너무 어려웠다.
도현은 조금 착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나 고민 상담 엄청 잘하는데!”
진의 적극적인 어필에 도현이 망설였다.
사실 도현은 어제 공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흥분해서 언성을 높여 소리쳤던 자신.
‘…내가 대체 왜 그랬지.’
도현의 표정에 심란함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진의 얼굴도 덩달아 심란해졌다.
‘이런 걸 말해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도현의 눈에 완벽한 청자의 자세를 취한 진이 들어왔다.
진지한 눈빛과 테이블 위에 올려 깍지 낀 양손.
‘나는 지금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진의 모습에 도현의 입이 마법같이 스르륵 열렸다.
“내가 어제… 어떤 분이랑 말, 싸움 같은 걸 조금 했는데.”
아닌 척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니콜라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차가운 얼굴을 한 채 ‘그렇구나’라고 할 것 같은 도현이 말싸움이라니!
니콜라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도현은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사과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사과드려? 어른이랑 싸운 거야?”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엄마랑 싸웠어?”
“아니. 어제 처음 뵌 분이었어.”
역시!
니콜라스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편입생은 성격 파탄자였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 만난 어른과 말싸움을 할 리가 없었다.
니콜라스가 이상한 확신을 하는 사이, 진이 도현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싸운 건데?”
“의견 대립이 조금 있었어. 서로 의견이 다르다 보니까 말이 좀 격해졌어. 그러다가 그분이 나를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셔서 나도 맞받아치다가….”
도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화날 일은 아니었는데 너무 과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진의 앞에서 하소연하듯이 털어놓은 게 부끄러워졌다.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하는데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당연히 화나지!”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도현이 눈만 깜빡이는데, 진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나는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는 게 제일 싫어! 어리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닌데!”
미술품 경매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매번 ‘넌 어려서 안 돼’라는 이유로 좌절당했던 진이 도현의 손을 덥썩-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온기에 깜짝 놀란 도현이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먼저 사과하지 마! 절대! 절대 안 돼! 음…. 물론 그건 도현이 정할 일이지만! 그래도 안 돼!”
아무튼 안 된다는 진의 말에 도현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가 그런 둘을 짜게 식은 표정으로 보았다.
‘…바보들인가?’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상담했는데 한다는 소리가 사과하지 말라는 소리다.
심지어 진은 자신이 겪은 억울한 일을 속사포로 말하고 있었고, 도현은 어색하게 맞장구를 치며 반응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맹한 구석도 있잖아.’
꼬집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던 편입생의 새로운 모습에 니콜라스는 머릿속에서 도현의 이미지를 조금 수정했다.
* * *
짧게만 느껴지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수업 시간이 시작되었다.
도현은 줄리아가 준 스케치북과 연필을 내려다보았다.
‘자유 주제…. 뭘 그리지?’
명화집을 모아놓은 책을 보거나, 미술의 역사를 다룬 책 혹은 드로잉 기법서는 종종 읽었지만 직접 그림을 그린 경험은 별로 없었다.
보통의 아이들이 낙서하고 놀 때 도현은 글자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주변 아이들을 슬쩍 훔쳐보니, 이미 주제를 정하고 그리기를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뭐 하지.’
도현이 가만히 스케치북만 바라보고 있자, 반 아이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도현! 왜 아무것도 안 그리고 있어?”
“주제 정하는 게 어려워.”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에게 아주 조금은 익숙해진 도현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재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물어보시는 문제를 술술 풀던 도현이 어렵다고 말해 오는 것에 신이 난 재키가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그러면 좋아하는 거 그리는 건 어때?”
“좋아하는 거?”
“응!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
도현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고마워. 정한 것 같아.”
“그래? 그럼 다 그리고 보여줘!”
도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키가 자신의 그림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하고, 도현도 연필을 들어 올렸다.
눈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눈동자 색은 어땠는지.
웃을 때 입꼬리가 어떻게 호선을 그렸는지.
멀게만 느껴지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언젠가 연필 데생에 관련된 책을 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데생의 기본을 차근차근 떠올리며 스케치북 위를 천천히 채워 나갔다.
손이 스케치북 위를 지나갈 때마다 유려한 선이 그어졌다.
선과 선이 모여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고.
손목에 힘을 빼고 스치듯이 움직이자 명암이 만들어졌다.
도현은 어느새 그림에 완전히 몰입하여 미친 듯이 손을 움직였다.
기억 속에만 남았던 희성이 하나둘씩 현실로 끌어 내려졌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줄리아는 한곳에 옹기종기 모여서 떠드는 아이들을 보고 못 말리겠단 표정을 지었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제자리에 앉아 있는 애들이 없었다.
“얘들아! 자기 자리에 앉아서 그림 그려야지!”
줄리아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중 한 아이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줄리아에게 달려오면서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도현이가 그림 진짜 잘 그려요!”
“응?”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 한가운데에 도현이있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아이들이 주변을 에워싼 채 시끄럽게 떠들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선생니임! 빨리 와서 선생님도 봐보세요!”
재키가 줄리아의 손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그렇게 잘 그린다고?’
호기심이 생긴 줄리아가 순순히 재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생의 그림 실력은 보통 비슷비슷하니까.
‘어디 한번 볼까?’
그리고.
별 기대 없이 도현이의 스케치북을 본 줄리아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게 진짜 도현이가 그린 거라고…?’
그냥 형식적인 칭찬 한번 해주고 아이들을 해산시키려고 온 건데, 도현의 손에서 피어나는 그림에 온 정신을 빼앗겨 버렸다.
스케치북 위에서 한 남자가 웃고 있었다.
오로지 연필로 그려진 그림인데도 주황빛의 온기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단순히 그림 하나를 본 것에 불과한데도, 도현이 이 남자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애틋함. 존경. 사랑. 그리움.
그림에서 전해져 오는 선명한 심상에 줄리아가 울컥했다.
아름다운 그림인데, 이상하게 손끝이 아려왔다.
도현의 손놀림이 점차 느려지다가 완전히 멎었다.
“누굴 그린 거야?”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도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장난 아니다…!”
“화가 같아! 미술 배우는 형보다 더 잘 그려!”
“수집하고 싶다! 우리 집에 있는 미술품 보관대에 넣어놓고 싶어!”
주위에 바글바글하게 모인 아이들이 부담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모인 거지?’
그림에 집중하느라 아이들이 구경하는 것도 몰랐던 도현은 조금 황당해졌다.
짝!
쏟아지는 질문과 감탄사 속에서 도현이 당황하고 있자 줄리아가 손뼉을 쳤다.
“자, 자. 얘들아! 한꺼번에 물어보면 도현이가 대답을 할 수가 없잖니.”
줄리아의 말에 아이들이 조금 진정해서 한층 조용해졌다.
그 틈을 타 줄리아가 은근슬쩍 도현에게 질문했다.
“큼! 도현아. 그림 속에 있는 분은 누구니?”
아까 반 아이 중 하나가 했던 질문이었다.
‘대체 누굴까?’
도현과 같은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호감이 절로 이는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보다 더욱 눈에 띄는 건 행복을 빚어 만든 것 같은 미소였다.
저렇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도현과 무슨 관계인지 너무 궁금했다.
줄리아와 아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희성이 형이에요.”
도현은 오랫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다.
“가족이니?”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줄리아가 그림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를 보다가 무심결에 말했다.
“도현이가 아주 좋아하는 형이구나.”
잠시 눈이 커졌던 도현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났다.
“네, 아주. 아주 좋아하는 형이에요.”
처음 보는 도현의 미소에 줄리아가 입을 살짝 벌렸다.
왜 그동안 웃지 않았는지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그림 속 남자랑 닮았네.’
보는 사람이 서글퍼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집으로 돌아온 도현은 스케치북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이 생생했다.
도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모자라.’
겨우 그림 한 점이 채우기에는 거대한 구멍이었다.
그림을 보고, 또 봐도 그리움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에 목이 말라왔다.
보고 싶었다.
형이 너무 보고 싶었다.
도현이 몸을 작게 옹송그렸다.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조차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무력하게 내던져진 아이는 지독할 만큼 지쳐 있었다.
‘…괴로워.’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고통스러웠다.
도현이 빠르게 맥동하는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왜 살아 있는 거지?’
이럴 거면.
이럴 거면 차라리.
【차라리 뭐. 차라리 죽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
“…덩어리 님?”
도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