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1)화 (22/582)

제21화. 투쟁 (1)

샌디에고 델마의 외곽에 있는 한적한 공원.

조그만 공원에서 성인 남성과 소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그걸 왜 몰라! 어? 감수성이 저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만도 못해!”

“제 감수성은 멀쩡해요! 그러니까 저한테 그만 물어보시라고요!”

“싫다, 꼬마야! 그럼 여기는! 새로 수정한 부분인데 봤어?”

“당연히 확인했죠! 그건 전보다 더 마음에 들어요!”

싸우는 건지 대화를 나누는 건지 알 수 없는 입씨름을 하던 둘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하여간. 까탈스러운 꼬마야.”

“그 까탈스러운 꼬마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이 누군데요.”

언뜻 보면 싸우는 것 같았지만, 둘의 목소리와 표정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화해(?)한 날로부터 삼 주가 지난 지금.

이틀, 혹은 삼 일에 한 번꼴로 만난 두 사람은 그 시간만큼 서로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계속되는 입씨름에 지쳐 등받이에 늘어지게 몸을 기댔던 도현이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시나리오의 한 부분을 짚었다.

“이사야 말이에요. 여기서 좀 다른 생각을 할 것 같지 않아요?”

“다른 생각?”

리암도 몸을 일으켜 세우고 도현의 말에 집중했다.

“네. 이 부분에서 이사야가 유한테 느끼는 감정이 동정심, 연민 같은 종류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제 생각에 이사야는 우월감도 느낄 것 같아요.”

“우월감?”

“네, 우월감.”

리암이 생각에 잠겨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사람 같은 행색을 하고 다니는 게 어떻겠냐는 도현의 제안에 일주일 전부터 면도를 시작해 깔끔하게 제모된 턱이 리암의 손가락 밑에서 미끄러졌다.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은데….”

도현의 말대로 하면 이사야의 캐릭터 설정을 거의 갈아엎어야 했다.

시나리오 대공사를 떠올린 리암의 얼굴이 홀쭉해졌다.

‘그대로 가려는 걸까?’

도현이 시나리오의 해당 장면을 다시 한번 읽었다.

처음에는 리암의 억지로 시작된 것이었으나,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도현의 태도도 점점 바뀌었다.

책을 읽기만 했던 도현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경험은 새롭고 신선한 자극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

군데군데 비어 있는 세계를 하나둘씩 채워가는 것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고, 현재 도현은 그 매력에 푹 빠진 상태였다.

리암의 마음이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도현은 조금 초조해졌다.

‘어떻게 설득해야 하지?’

도현의 머릿속이 맹렬하게 굴러갔다.

그때, 시나리오 종이에 적힌 대사가 도현의 눈에 들어왔다.

도현은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 * *

‘확실히 꼬마의 말도 일리가 있어.’

리암은 고민에 잠겼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만남이 계속될수록 도현은 리암에게 단순히 건방진 꼬마가 아닌 대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교환하는 상대가 되었다.

이미 도현의 의견을 반영해 수정한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이번에도 도현이 해석한 이사야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렸으나….

그러나 그렇게 바꾸고 나면 스토리 플롯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할 게 분명했다.

삼 주 동안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작성한 것만 여섯 번.

이제 와서 시나리오를 다시 작성하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이 이상 좋은 시나리오가 나올 것 같지 않아.’

완전히 초고부터 다시 작성한 게 여섯 번이었고, 자잘한 수정과 설정 변경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했다.

그러다가 처음 설정으로 되돌아갈 때도 있었고, 완전히 다른 작품으로 변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찾은 중간 지점.

리암은 지금 시나리오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쉽사리 도현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안 되겠어. 아무래도 이번 건 안 된다고 해야….’

그렇게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리암은 무심코 숨을 멈췄다.

아까 앉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인데, 무언가 달랐다.

가만히 앉아 있던 도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갈 반기기라도 하는 듯 너무 환한 표정을 지어서 리암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얘가 날 놀리나?’

리암이 어처구니없어하는 순간.

“신부님!”

평소보다 좀 더 높고 부드러운 울림이었다. 아주 친한, 혹은 경애하는 이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리암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는데?’

두 번이나 낚인 건가 싶어서 얼이 빠져 있는데.

이어지는 말을 듣고 나서야 리암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신부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

[신부님! 어쩐 일로 오셨어요?]

리암은 그 문장을 알고 있었다.

그가 썼으니까!

리암은 도현이 지금 무엇을 하는 중인지 깨달았다.

“아, 알고 계셨어요?”

도현은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맞추고. 도현만 보고 있으면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네. 요즘 많이 친해진 친구예요. 아, 그 친구는 쿠키를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매일 쿠키를 가져다줘요.”

신나서 재잘재잘 떠들던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니에요! 별일 아닌걸요. 집에 있는 건 항상 남으니까….”

도현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눈매를 늘어트렸다. 수심이 가득 찬 표정이었다.

“유는… 부모님이 없거든요.”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애써 걷어낸 도현이 선하게 웃었다.

친우의 시련에 슬퍼하는 마음을 숨긴 것일 진데, 이상하게 그 변화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신부님도 어려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유에게 쿠키를 가져다주는 건 제겐 별일이 아닌걸요.”

나긋나긋한 어조였다.

신부님께 무슨 말을 들었는지, 도현은 쑥스럽다는 듯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그런 걸로 유가 행복과 즐거움을 느낀다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

‘그런 걸로’를 말할 때 발음이 유독 묘했다. 말의 내용과 표정만 보면 천사나 다름없는데, 미묘하게 거슬렸다.

그리고 그 정점을 찍은 건.

“정말 저한텐 별일 아니니까요.”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겸손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만족감’이었다.

그 짧은 순간으로 인해, 이사야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달라져 버렸다.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쌓아왔던 긴장감이 논리적 개연성을 충족시킨 탓인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미쳤네.’

리암이 도현의 연기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걸 두 번이나 확인했으면서도, 도현의 연기를 보는 내내 자꾸만 뒤를 돌아볼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만큼 도현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자연스러웠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데.

도현이 정말 놀라운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재능!

천의 얼굴이라도 가진 것인지, 작은 표정 변화만으로도 분위기가 휙휙 바뀌었다.

극단적인 감정을 연기한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섬세한 감정을 연기하면서도,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건지 정확하게 느껴졌다.

리암은 아주 오랜만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만약 도현이 더 많은 감정을 연기한다면?

그의 카메라로 저 연기를 담아낼 수 있다면?

저 어린 천재가 스크린에 데뷔하는 게 자신의 첫 영화라면?

리암의 마음이 뜨겁게 들끓었다.

그는 직감했다.

이것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아저씨?”

도현이 조심스럽게 리암을 불렀다.

리암을 설득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자, 도현은 자신이 해석한 이사야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작정 연기를 시작했다.

‘너무 대책 없이 굴었나?’

도현이 조금 후회하는 사이, 리암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너, 꼬마야.”

도현을 부르는 리암의 목소리는 조금 기묘해서 도현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너 이름이 어떻게 되냐?”

3주가 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하루걸러 하루 보는 수준으로 얼굴을 맞대었던 도현과 리암은 놀랍게도 아직까지 통성명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꼬마라고 부르면 됐지.’

‘아저씨라고 부르면 되겠지.’

그리 생각한 둘은 서로의 신상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타인에게 지독하게 무심한 타입의 두 사람이 만나 만들어진 기현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리암은 이 엄청난 꼬마의 이름을 간절할 정도로 알고 싶어졌다.

리암이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는 가운데, 도현이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도현이에요.”

이도현.

몇 번 이름을 중얼거린 리암이 말했다.

“난 리암 호프다.”

조용-

자기소개를 끝낸 두 사람은 뒤이어 찾아온 어색한 정적에 애써 딴청을 부렸다.

마음이 급해 이름을 묻긴 했는데,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에 리암이 시나리오를 뒤적이는 척을 했다.

도현도 괜히 바이올린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가방은 뭐냐? 매번 들고 오던데.”

시나리오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사담을 일체 나눈 적 없던 둘이었지만, 이젠 통성명까지 한 사이였다.

리암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고 여기며 그동안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하던 도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올린 가방이에요.”

“바이올린?”

리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혹시… 바이올린을 전공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현이 연기를 하지 않는 건 영화계의 손실을 넘어 인류 전체의 손실이었다!

도현이 얼마나 바이올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든, 연기에 대한 재능만은 못할 거라고 리암은 확신했다.

“바이올린은 취미로 켜는 거냐?”

리암이 자신의 희망 사항을 담아 물었다.

그러나 도현이 한 대답은 리암의 예상 밖이었다.

“바이올린 켤 줄 몰라요.”

“…엥?”

리암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러면 가방은 왜 들고 다니는 건데?”

도현의 입꼬리가 조금이지만,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웃는 듯, 우는 듯.

리암의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연약하고 애달픈 미소였다.

“선물받은 거라서요. 소중한 거라 자주 들고 다녀요.”

‘…아!’

그 순간, 리암은 잔뜩 꼬였던 실타래가 한순간에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도현이 연기한 이사야.

유.

그리고 바이올린.

리암은 자신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펜을 손에 쥐고 미친 듯이 써 내려가는 리암의 모습에 도현이 느릿하게 눈만 깜빡였다.

“저기…. 아저씨?”

자신을 본 둥 만 둥 글을 쓰는 리암의 모습에 도현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사야는 어떻게 하는 거지?’

리암을 설득하기 위해서 연기까지 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도현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리암은 시나리오 집필에 완전히 몰입해서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

지금 상태로 무슨 말을 하든 리암에게 닿을 것 같지 않았다.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종이에 얼굴을 박고 있던 리암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리암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그게 꼭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을 발견한 야생 동물의 그것과 닮아 있어서 도현은 뒷목이 조금 서늘해졌다.

“이 시간! 여기! 이곳! 다음 주!”

사람 말이라고 하기엔 뭔가 많이 부족한 말이 튀어나왔다.

‘글을 너무 많이 써서 머리가 좀 이상해지셨나?’

도현이 리암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꼭 와! 알겠지? 꼭 오라고!”

어느새 한참 멀어진 도현을 향해 리암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슬금슬금 공원 입구를 빠져나가던 도현이 어깨를 살짝 떨었다.

‘…911에 전화해야 하나?’

전화기를 손에 든 도현이 진심으로 고민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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