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투쟁 (2)
나무 냄새가 날 것 같은 다락방.
의자에 앉아 캔버스 종이에 스케치를 하던 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아저… 아니, 리암은 지금 뭘 하는 걸까?’
리암이 이상 증세를 보였던 날로부터 일주일 후.
리암의 말을 따라 같은 시각에 공원에 들렀지만, 대체 뭘 하는 건지 지저분하게 나기 시작한 수염과 퀭한 눈빛을 한 리암은 빈손으로 나타났다.
‘일주일, 아니, 이주! 아니다. 너 핸드폰 있지?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라! 꼭!’
기다리지 않으면 큰일 날 기세로 소리치는 리암의 모습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리암에게선 감감무소식이었다.
잠시 핸드폰을 흘긋 본 도현이 다시 연필을 들어 올렸다.
슥슥-
도현의 손목이 능숙하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였고,
‘음…. 스케치는 완성된 것 같네.’
그렇게 여섯 번째 작품의 뼈대가 만들어졌다.
그림을 더 그려볼 생각이 없냐는 진의 물음에, 가끔 우울해질 때마다 하나둘씩 그리다 보니 작품의 개수가 계속 늘어났다.
그리고 늘어난 것은 작품뿐만이 아니었다.
<선의 기초>, <그림으로 보는 인체구조>, <인물화가 제일 쉬웠어요!>….
도현이 종종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눈치챈 서혜나가 그림에 관련된 온갖 잡다한 서적들을 사서 서재에 채워 넣었다.
심지어 도현의 다락방에는 전문가용 그림 도구와 다양한 종류의 종이, 그리고 사이즈별 캔버스 거치대까지 세워져 있었다.
방만 보면 프로 화가의 작업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학교 갔다 왔더니 다락방이 작업실로 변해 있어서 깜짝 놀랐지.’
너무 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잔뜩 기대한 엄마의 얼굴에 싫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도현이 다시 한번 서혜나의 추진력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똑똑-
멀리서 미약하게 들리는 노크 소리에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 방으로 돌아온 도현이 문을 열자, 서혜나가 싱긋 웃었다.
“이제 슬슬 나가야 하는데 준비는 다 했니?”
도현의 눈이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2시 10분.
그림을 그리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죄송해요. 금방 챙길게요.”
“아니야. 그러면 다 챙기고 아래로 내려오렴.”
도현의 죄송스러운 표정에 황급히 손사래를 친 서혜나가 말했다.
서혜나가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가고, 도현은 터벅터벅 옆방으로 향했다.
서혜나가 도현의 방 바로 옆에 드레스 룸으로 만든 방이었다.
매번 어디서 옷을 가져오는 건지, 옷장 하나 정도만 간신히 채웠던 도현의 옷들이 이제는 제법 많아져 있었다.
손에 잡히는 옷을 대충 골라 입고 나온 도현이 일 층으로 내려가자,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서혜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나갈까?”
“네.”
도현과 서혜나가 차에 몸을 실었다. 오늘은 정기 검진이 있는 날이었다.
* * *
“오랜만이네요, 도현. 잘 지냈어요?”
원장실에 들어온 도현을 보고 벤자민이 웃으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벤자민. 전 잘 지냈어요. 벤자민은요?”
“저야 항상 같죠.”
도현은 조금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일반 환자처럼 접수를 하고, 대기하고 있다가 원장실에 들어오는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도현에겐 신기하고 낯선 일이었다.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부분은 없죠?”
“네, 괜찮아요.”
“그래요. 퇴원하기 전보다 훨씬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그럼 오늘 간단한 검사 몇 가지만 진행할게요.”
검사는 시시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주기적으로 하던 검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한 시간가량 검사를 끝낸 도현이 다시 원장실에 들어오자, 원장실에서 서혜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벤자민이 도현을 반겼다.
“검사 결과는 메일과 우편으로 보내드릴 예정이에요. 3일 정도 후면 나올 거고요. 혹시 더 물어볼 게 있나요?”
도현이 고개를 젓자, 벤자민이 몇 가지 기본적인 당부 사항을 말한 후 병원 밖까지 배웅해 주었다.
짧고 빠르게 끝난 검진에 도현은 새삼 다시 깨달았다.
‘나 정말 다 나은 거구나.’
익숙해질 수 없던 전신의 격통과 그대로 녹아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높게 오르던 열.
때론 죽는 게 더 나을까 싶은 고통이 일상이었던 자신이었는데.
도현이 한 걸음을 앞으로 디뎠다. 탄력 있는 다리가 땅을 단단하게 지지하고 섰다.
가볍게까지 느껴지는 신체에 도현의 기분이 이상해질 무렵.
“오늘 외식할까?”
도현과 하는 두 번째 외출에 신이 난 서혜나가 물었다.
“외식이요?”
“응. 매번 집에서만 먹었잖아. 어때?”
그러고 보니 아빠와 같이 쇼핑몰에서 점심을 먹었던 날 이후로 한 번도 외식한 적이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학교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 같이 외출한 적조차 없었다.
서혜나는 도현이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중이었고, 도현은 리암과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면 혼자 있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아진 서혜나가 주변 음식점 이름을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술술 나오는 음식점 이름에 도현은 서혜나가 음식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했지만….
‘오늘 외식하려고 미리 알아놨지!’
그건 서혜나의 계획적인 행동에서 나온 결과였다.
“저… 제가 골라도 되는 건가요?”
“응! 엄마는 가리는 거 없이 다 좋아해. 그러니까 도현이가 먹고 싶은 데로 가자.”
도현은 음식점 리스트를 들을 때부터 머릿속에 박혔던 메뉴를 떠올렸다.
“그럼 치킨 먹고 싶어요.”
“치킨? 치킨 좋지! 네가 뭘 좀 아는구나!”
치킨의 민족 출신인 서혜나는 도현의 결정을 내심 반겼다.
내비게이션에 아메리칸 치킨 전문점이 찍히고, 새카만 차 한 대가 매끄럽게 도로 위를 달렸다.
* * *
노란 조명 아래서 닭고기가 유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빛났다.
깨끗한 기름에 튀겨 바삭한 껍질과 구석구석 잘 발린 붉은 양념이 어서 먹어보라고 도현에게 손짓했다.
냠-
포크로 고기를 찍은 도현이 닭 날개 하나를 입에 물었다.
오물오물-
신중하게 치킨을 씹어 먹는 도현을 서혜나가 긴장한 기색으로 쳐다보았다.
“맛은 어때?”
“음….”
도현의 표정이 조금 오묘해졌다.
기름기가 조금 많은 것을 제외하면 닭 껍질은 고소했고, 잘 익은 속살은 부드러웠다.
맛있긴 한데….
‘내가 생각하던 맛이 아니네.’
희성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치킨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래도 맛있긴 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핫소스의 매콤함과 식초의 새콤함이 은근히 중독성 있었다.
조금 많이 시기는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맛있어요. 엄마도 드셔보세요.”
“그래?”
도현의 대답에 얼굴이 밝아진 서혜나가 치킨 하나를 찍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서혜나의 표정도 오묘하게 변했다.
맛없는 건 아니지만, 한국식 치킨에 익숙했던 서혜나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미국 치킨은 이렇구나.’
서혜나의 입맛에는 한국에서 먹던 치킨이 더 잘 맞았다. 서혜나가 오물오물 잘도 먹는 도현을 보았다.
‘미국에서만 살아서 이 맛이 익숙한 건가?’
아직도 입 안에 남아 있는 시큼한 양념의 맛에 서혜나가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애가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도 한국 가면 치킨 시켜 줘야겠다.’
한국에 가면 할 일을 하나 추가한 서혜나가 열심히 치킨을 먹고 있는 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학교 수업은 괜찮아? 어려운 건 없고?”
“네, 다 쉬워요.”
그 말에 서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점에서 샀던 책들을 도현이 정말 읽기 위해 샀다는 걸 알고 한차례 놀랐던 서혜나는 도현이 정말로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예상대로 쉽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서혜나가 은근슬쩍 운을 뗐다.
“담임 선생님은 어떠셔?”
줄리아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부모의 마음이란 게 그랬다.
혹시 도현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하지는 않을까, 우리 애한테 소홀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서혜나의 질문에 도현이 줄리아를 떠올렸다.
도현을 향해 짓는 미소는 항상 친절하고 상냥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도현은 줄리아가 자신이 아이들과 잘 섞일 수 있도록 많이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도현이 병원에서 살았다는 것도, 학교를 다녀본 경험이 없다는 것도 말하지 않은 건 도현을 위한 배려였으리라.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그림에 관심이 너무 많으시지.’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미술 쪽으로 나갈 생각이 없냐는 줄리아 선생님의 권유를 떠올린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굉장히 좋은 분이야.’
조금 부담스러울 때도 있긴 했지만, 가르치는 학생한테 많은 애정을 쏟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었다. 도현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잘해주세요. 신경도 많이 써주시고요.”
“그래. 착한 사람 같더라. 아이들한테 애정도 많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다행이네.”
서혜나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도현을 보던 서혜나가 가장 묻고 싶었던 말을 슬쩍 꺼냈다.
“친구들이랑은 많이 친해졌니?”
담임 선생님인 줄리아랑 전화하면서 도현이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도현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서혜나의 질문에 도현이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다들 착하고 친절해요.”
“매일 같이 교문으로 나오는 친구들은? 그 친구들은 어떤 아이들이니?”
서혜나는 도현의 학교생활이 너무나 궁금했다.
도현은 진의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무미건조한 도현의 반응에도 항상 밝은 미소를 띠며 다가오는 아이.
“금발 머리 여자아이는 진인데, 진은… 굉장히 밝아요. 웃음도 많고 친절해서 인기가 많아요. 그리고 니콜라스는.”
도현이 조금 뜸을 들였다.
매번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면서, 그렇다고 도현을 따돌리거나 피하지는 않는다.
멸시와 혐오 속에서 살아왔던 도현에게는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도현이 말했다.
“좋은 친구예요. 장난기도 많고요.”
니콜라스가 진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그랬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평탄한 도현의 어조에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서혜나가 내심 안도했다.
혹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거나 어렵지는 않은지 걱정스러웠는데, 도현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서혜나가 도현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엄마한테도 소개해줘.”
“네. 기회가 되면 그럴게요.”
도현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 도현을 보고 서혜나는 등교 첫날을 떠올렸다.
그때 지었던 어두운 표정이 아닌, 차분해 보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엔 생기 없는 표정으로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보다, 그 시간에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
느려도 괜찮았다.
서혜나는 언제까지나 도현을 기다려줄 수 있었으니까.
그저 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합!
무심코 시큼한 치킨을 문 서혜나의 미간이 구겨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