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3)화 (24/582)

제23화. 투쟁 (3)

데구르르-

도현이 발밑에 굴러온 공을 보고 멈춰 섰다.

“여기! 여기로 패스해!”

앞쪽에서 달리고 있던 재키가 팔을 휘저으며 외쳤다.

도현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현재 위치에서 재키가 있는 위치까지 대략 20m.

‘힘, 마찰력, 공기 마찰력, 중력, 중력 가속도를 계산하면…!’

계산을 끝낸 도현이 왼발을 뒤로 보냈다가 크게 차올리려던 순간.

타앗!

어디선가 슬쩍 끼어든 발이 공을 빼앗아 갔다.

“하핫! 그러게 빨리 찼어야지. 난 간다!”

도현이 황망한 표정으로 신나게 공을 차며 달리는 니콜라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황급히 뒤따라 뛰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차오르는 숨에 점점 속도가 느려지고.

결국, 니콜라스를 놓친 도현은 니콜라스가 시원하게 골 안으로 슛을 차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넋이 나간 듯한 도현의 표정에 어느새 옆에 다가온 재키가 어깨를 두들겼다.

“괜찮아! 다음 골에서 만회하자!”

재키의 말에 도현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30분 후.

3대 1로 처참히 패배한 도현이 잔디에 드러누웠다.

파랗기만 한 하늘과,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던 도현이 생각했다.

‘책 속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도 있구나.’

체력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느낀 순간이었다.

* * *

하교 후.

집에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도현은 산책로를 뛰고 있었다.

누가 서혜나의 아들이 아니랄까.

한번 결정한 일은 물러서는 일 없이 곧바로 시행하는 무서운 추진력을 가진 도현이었다.

‘오늘은 새로운 길로 가볼까?’

항상 다니던 길과 새로운 길 사이에서 고민하던 도현이 새로운 길목으로 발을 뻗었다.

느린 속도로 달리다가 숨이 차면 걷고, 다시 괜찮아지면 뛰기를 반복하기를 한참.

나 있는 길을 따라 계속해서 달리다 보니 어느새 바닷가가 저 멀리서 보였다.

‘저기까지만 갈까?’

이미 적당한 운동 강도를 넘긴 지 한참 오래지만, 자신을 채찍질하는 데 익숙한 도현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철썩- 처얼썩-

차가운 바닷바람과 함께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닷가가 가까워지자 도현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와아···.”

도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는, 꼭 하늘을 뒤집어 놓은 것 같았다.

처음으로 본 바다는 도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아름다웠다.

‘형이랑 같이 보러 왔으면 좋았을 텐데.’

자연스럽게 희성을 떠올린 도현이 바다를 조금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서걱- 서걱-

운동화가 모래를 밟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귀에 닿았다. 도현은 발 앞까지 아슬아슬하게 밀려왔다가 떠내려가는 바닷물을 멍하니 응시했다.

싸아아- 싸아-

하얀 거품을 만들며 밀려들어 왔다가, 모래를 적시고 멀어져 간다.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감추고 뿔뿔이 달아나는 바다를 붙잡으려 한 발짝 앞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 위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바위와 같은 황토색을 띠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도현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바닷속으로 성큼성큼 움직였다.

바닷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지만, 도현의 관심사는 바위 위에 있는 이상한 것에만 쏠려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보일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도현이 좀 더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물살을 헤쳤다.

* * *

“짜증 나! 애초에 집에 수영장을 만들어주면 됐을 거 아니야!”

수영장 공사로 인해 물속에 들어가지 못한 지 벌써 한 달째.

차오르는 답답함에 누나 몰래 슬쩍 집에서 도망쳐 나온 니콜라스가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모랫바닥을 찼다.

그 와중에 바닷바람이 참 시원하기도 했다.

“이씨…. 만날 공부만 하라고 하고….”

시무룩해진 니콜라스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 하나를 들어 낙서하는 모습이 퍽 처량해 보였다.

날이 많이 풀렸지만, 바닷가는 여전히 서늘했다. 바닷가의 강한 바람 탓에 손끝이 금방 빨갛게 물들었다. 옷 속을 파고 들어오는 한기에 한차례 몸을 떤 니콜라스가 한숨을 길게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바다가 있는데 들어가질 못하니?”

바람과 손을 잡고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춤을 추는 바다는 제멋대로 하늘의 영역을 침범하다가 스러지길 반복했다.

미련이 뚝뚝 흘러넘치는 얼굴로 바다를 보던 니콜라스가 휙휙 고개를 저었다.

감기에 걸리면 한동안 수영장은 꿈도 못 꿀 게 분명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얼른 돌아가려는데, 멀리 서 있는 작은 사람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누굴까?’

호기심이 생긴 니콜라스가 집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돌려 해변에 서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니콜라스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재수탱이 편입생!

못 볼 걸 봤다는 듯 다시 되돌아가려던 니콜라스가 멈칫했다.

‘뭘 하는 거지?’

편입생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현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던 니콜라스가 지루함을 느낄 때 즈음.

‘헉!’

편입생이 갑자기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발만 적시려는 거겠지?”

불안해진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니콜라스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편입생은 멈출 줄 모르고 더욱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도현의 몸이 반절 정도 물속으로 사라지자, 퍼뜩 든 무서운 생각에 니콜라스가 도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야!”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도현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잘못 들었나?’

그렇게 생각한 도현이 다시 전진하려던 찰나.

“야! 아씨, 야! 이도현!”

“어?”

선명하게 들리는 자신의 이름에 깜짝 놀란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도현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는 니콜라스가 있었다.

“니콜라스…?”

도현의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니콜라스가 도현의 양어깨를 붙잡더니 사정없이 흔들었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바다엔 왜 들어가는 건데!”

“그, 그만 흔들,”

“어? 너 무슨 이상한 생각 한 건 아니지? 야, 대답해!”

도현도 정말이지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답하려고 할 때마다 니콜라스가 팔을 흔들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거 혹시 일부러 그러는 걸까?’

도현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때 즈음.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도현을 뒤늦게 발견한 니콜라스가 헛기침을 하며 도현을 바로 세워주었다.

“…어지러워.”

“흠, 큼. 그래서 바다엔 왜 들어간 건데?”

“이 손부터 놔줘.”

창백한 얼굴로 말하는 도현의 모습에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니콜라스가 물었다.

“놓으면 또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는 건 아니고?”

“아니야!”

도현의 단호한 부정에 니콜라스의 손이 도현의 어깨에서 떨어졌다.

니콜라스의 손에서 풀려난 도현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을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확인할 게 있어서 들어간 거야.”

“확인할 거?”

“응.”

“대체 뭐길래 겨울에 바다에 들어가는 미친 짓을 하는 건데?”

차마 도현이 나쁜 마음을 먹었을까 걱정되어서 달려왔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니콜라스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니콜라스의 물음에 도현이 손가락을 펴 바위 위를 가리켰다.

“저기, 저 위에 있는 게 뭔지 궁금해서.”

도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간 니콜라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바다사자잖아?”

“바다사자?”

니콜라스의 눈에 의아한 빛이 서렸다.

“응. 라호야코브 해변 쪽에 무리 지어 다니는 애들인데 왜 혼자 여기까지 왔지?”

“라호야코브? 많이 먼 곳이야?”

“그렇게 멀진 않은데….”

니콜라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위 위에 늘어져 있는 바다사자를 보았다.

“크기를 보니 새끼 같은데,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도현과 니콜라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고민하던 도현이 제안했다.

“일단, 저기까지 가보는 거 어때? 그렇게 깊어 보이지는 않는데.”

“끄응….”

니콜라스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차가운 바닷물 때문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그때, 니콜라스의 눈에 멍청한 얼굴로 바위 위에서 뒹구는 바다사자가 보였다.

이대로 두고 가면 다음 날이 될 때까지 저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난 왜 이렇게 시력이 좋아가지고!’

속으로 한탄한 니콜라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 가보자!”

서로를 마주 보고 고개를 한번 끄덕인 둘이 바닷물을 휘저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배 부근에서 출렁거리던 물이 점점 높아지다가, 가슴 위까지 차올랐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수영해서 갈까?’

이미 젖을 대로 젖은 것 같았다.

더는 거리낄 게 없어진 니콜라스가 다리에 힘을 빼고 유연하게 팔을 뻗었다.

길고 날렵하게 뻗은 팔과 손의 움직임에 따라 파도치는 물결.

갈색 머리카락이 물 밖으로 나올 때마다 물방울이 산산이 비산했다.

온몸을 사용해서 바닷물을 가로지르는 니콜라스는 바다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도현이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순식간에 앞으로 치고 나간 니콜라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바위에 도착해 도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나도 가야지.’

도현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바위 앞에 간신히 도착하자, 니콜라스가 업신여기는 얼굴로 말했다.

“그냥 수영해서 오면 될 걸 왜 걸어서 오냐?”

“수영 못 해.”

“뭐?”

놀란 표정을 짓던 니콜라스가 뭔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 체육 시간에 보니까 운동 진짜 못하더라. 체력도 완전 약골이고.”

“…그 정도는 아니야.”

“긔 증둬는 애니예~”

니콜라스의 깐족거림에 도현이 정색했다.

무의식중에 진에게 하듯이 도현을 놀리다가 싸늘한 반응을 얻은 니콜라스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음! 일단 얘를 어떻게 할지나 생각하자!”

괜히 민망해진 니콜라스가 주제를 돌렸다. 티 나는 주제 전환을 모른 척해준 도현이 바다사자를 보았다.

“으억? 우억?”

‘이 인간들은 뭐지?’라는 표정을 한 바다사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너 대체 왜 여기에 혼자 있는 거냐?”

니콜라스가 바다사자의 몸을 약하게 꾹꾹- 누르며 물었다.

“으억! 억!”

바다사자가 귀찮다는 듯이 몸을 홱- 틀었다.

그리고.

부빗- 부빗-

“응?”

부빗-

도현은 자신의 몸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바다사자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얘, 얘가 왜 이러지?”

도현이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니콜라스를 보았지만, 니콜라스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글쎄. 네가 어미 바다사자로 느껴지나?”

“내가?”

도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다사자는 해사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도현에게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바다사자를 보던 도현이 말했다.

“저기, 난 네 엄마 아니야.”

“욱?”

바다사자가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그리고, 네 아빠도 아니야.”

“우욱?”

새끼 바다사자가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몹쓸 짓을 한 기분에 도현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진짜 엄마 아빠는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얼른 돌아가야지. 집이 어딘지 기억나니?”

“억. 우억. 으악.”

뭔가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와 도현의 시선이 맞닿았다.

‘대체 어떻게 하지?’

‘나도 몰라.’

심각하게 무언가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리던 니콜라스가 결심한 듯 단단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수영해서 라호야코브 해변까지 데려다줄게.”

“뭐?”

도현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게다가 얘를 데리고 제대로 수영할 수 있겠어?”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두고 갈 순 없잖아.”

“그렇지만….”

도현이 망설였다.

“어차피 이 방법밖에 없어.”

니콜라스가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그럼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내가 늦게까지 안 돌아오면 신고해 줘. 부탁한다.”

결연하게 말하는 니콜라스에, 도현이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스와 도현이 찐한 눈빛을 나누던 때.

퐁당!

어디선가 귀여운 물소리가 들렸다.

니콜라스와 도현의 고개가 돌아가고, 거기엔 태연한 표정으로 유유히 헤엄쳐 가는 새끼 바다사자가 있었다.

“…돌아가네?”

“돌아간다.”

니콜라스와 도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 슬그머니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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