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4)화 (25/582)

제24화. 투쟁 (4)

딱딱-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니콜라스가 이를 부딪치며 덜덜 떨었다.

“괜찮아?”

도현이 니콜라스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니콜라스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얘가 나보다 체력도 안 좋은데 왜 이렇게 멀쩡한 거지? 춥지도 않나?’

도현은 평소보다 조금 더 창백해지긴 했지만, 입술이 파랗게 뜬 니콜라스에 비해선 아주 멀쩡해 보였다.

‘괜히 오지랖 부리지 말고 그냥 지나갈걸….’

니콜라스가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 사이, 도현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니콜라스의 어깨 위에 올려주었다.

“뭐, 뭐야?”

“춥잖아. 젖어서 축축하긴 하지만, 그래도 입는 편이 나을 거야.”

걱정 어린 말투와 행동에 조금 말랑거리는 기분이 된 니콜라스가 괜히 툴툴거렸다.

“뭐, 나만 춥나?”

“나도 춥긴 한데, 버틸 만은 해.”

도현의 말은 진실이었다.

영혼이 하나가 된 후.

체력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도현의 몸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건강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튼튼해졌고, 지금도 계속해서 튼튼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전부터 도현은 추위에 강한 편이었다.

터벅터벅.

물에 젖은 신발이 땅에 닿는 소리만 울렸다.

학교에서도 진이 아니라면 말을 섞지 않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둘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

몸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에 검게 물들어 가는 바닥을 보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니콜라스.”

“어?”

침묵 속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란 니콜라스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니콜라스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 걔가 알아서 집으로 돌아갔잖아.”

“아니, 그거 말고도.”

도현이 고개를 들어 니콜라스를 보았다.

“나 걱정돼서 바닷속으로 들어온 거잖아. 그거 고마워.”

처음엔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는데, 천천히 생각해 보니 답이 나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니콜라스의 눈에는 얼마나 이상하게 비쳤을까 싶었고.

한달음에 달려와 준 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도현의 얼굴에 떠오른 희미한 미소에 니콜라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정 그러면 계속 고마워하든가.”

뻔뻔하게 말을 했지만, 붉어진 귓불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니콜라스를 보던 도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너, 너! 지금 나 비웃은 거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난 그냥 귀여워서….”

“뭐? 난 귀여운 게 아니라 멋있는 거거든? 그리고 너한테 귀엽단 소리 듣고 싶지도 않아!”

니콜라스가 얼굴을 와그작- 일그러트리며 말하자, 도현이 시원하게 웃으며 긍정했다.

“하하! 그래, 네 말이 맞아. 넌 멋있는 거야.”

도현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니콜라스의 눈에는 다 큰 어른이 투정 부리는 아이를 보고 어르는 것처럼 보였다.

니콜라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 나한테 말 걸지 마! 나 갈 거야!”

그러곤 휙.

붙잡을 새도 없이 가버렸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니콜라스의 뒷모습에 도현이 중얼거렸다.

“진짜 멋있어서 그런 건데…. 오해했나.”

바다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물살을 가르던 모습.

그건 정말로 멋있는 광경이었다.

‘내일 학교에서 오해를 풀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현이 집에 도착하자, 폭삭 젖은 생쥐 꼴이 된 아들의 모습에 서혜나가 경악했다.

도현은 엄마의 손에 붙잡혀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나서야 저녁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 * *

다음 날.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도현이 번개같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보이는 모습에 다시 실망한 듯 책으로 눈을 돌렸다.

‘왜 안 오는 거지?’

니콜라스는 가장 빠르게 등교하는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평소보다 등교 시간을 한참이나 넘겼는데도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늦잠을 잔 진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때까지도 니콜라스는 보이지 않았다. 니콜라스의 행방을 고민하던 도현의 귀에 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현! 오늘도 좋은 아침!”

“응, 좋은 아침.”

“응! 그런데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아 보여.”

“그게, 니콜라스가 안 보여서.”

“아! 그 멍청이?”

멍청이?

당황한 표정의 도현이 보이지 않는지 진이 잔뜩 심통 난 얼굴로 말했다.

“니키는 감기에 걸려서 못 온대. 어제 몰래 혼자 집 밖으로 나간 것도 모자라 바다에서 수영했다나 봐. 이 날씨에! 어휴, 내가 정말 못 살아.”

입술이 파랗게 뜬 게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긴 했는데, 감기에 걸렸을 줄이야.

도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기, 진.”

“하여튼 그 수영 바보가! 응? 왜?”

“니콜라스가 바다에 들어간 거 나 때문이야.”

“뭐?!”

도현의 말에 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얼른 얘기해 보라는 진의 재촉에 도현이 어제 있었던 일을 술술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진이 긴 탄식을 내뱉었다.

“허어…. 그런 거였어? 근데 왜 얘기를 안 했지? 니키 엄마한테도 엄청 혼난 것 같던데.”

진의 말에 도현의 안색이 더욱 안 좋아졌다.

“너도 그렇지. 아무리 뭔가 보인다고 해도 바다에 들어가면 어떡해! 그리고 수영도 못 한다며! 엄청 위험했던 거 알지?”

진이 도현에게 따박따박 말했고, 도현이 침통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친구를 걱정시킨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친구?’

도현은 자신이 한 생각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언제부터 자연스럽게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던 거지?’

일부러 거리를 두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 묶여 있는 도현은 누군가를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고,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눈치채지 못한 사이 스며들었다.

도현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안 돼.’

자신은 이런 것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도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진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우리 학교 끝나고 같이 니키 병문안 갈래?”

“병문안?”

“응!”

거절해야 하는 게 맞았다.

이 이상 틈을 내주다간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거라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도현의 머릿속에 다급한 얼굴로 자신을 붙잡던 니콜라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연한 얼굴로 바다사자를 데려다주겠다던 모습도.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굴던 모습까지.

도현이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물었다.

“내가 가도 괜찮을까?”

“응! 나도 자주 놀러 가는걸? 으음, 지금쯤 나르샤 언니가 집에 있을 텐데, 언니는 굉장히 좋아할 거야! 그리고 니키도!”

진의 말에 도현의 표정이 조금 오묘해졌다.

니콜라스의 가족은 그렇다고 해도….

- 너 나한테 말 걸지 마! 나 갈 거야!

으음.

‘니콜라스는 별로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 * *

하교 후.

시끌벅적한 스쿨버스에서 내린 도현은 긴장한 기색으로 한 주택 앞에 서 있었다.

띵동~

벨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 누구세요?

안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나 진이야! 친구랑 같이 니키 병문안 왔어!”

철컥-

문이 열리고, 니콜라스와 닮은 젊은 여자가 진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진! 요 귀염둥이! 요즘 왜 이렇게 방문이 뜸해? 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헤헤! 나도 언니 보고 싶었어. 앞으로 자주 들를게.”

“그래, 자주 와. 아, 친구랑 같이 왔다고 했지? 누구야?”

나르샤의 물음에 진이 한 발짝 비켜섰다.

그러자 진의 뒤에 서 있던 도현의 모습이 드러났다.

도현이 어색한 기분을 애써 내리누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도현입니다. 니콜라스 병문안 왔어요.”

나르샤의 얼굴에 충격의 빛이 서렸다.

눈은 다 녹았는데, 왜 저기에 눈사람이 있는 건가 싶었다.

‘아니, 눈사람이 아니라 눈의 요정인가?’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새털같이 부드러워 보였고, 딱 봐도 총명해 보이는 두 눈은 새카맸다.

무슨 눈의 요정처럼 신비롭고 귀염뽀쨕하게 생긴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니, 니키한테 이렇게 얌전한 친구가 있다니…?”

니콜라스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남다른 아이였다.

귀엽다는 이유로 고양이에게 밥을 주다가 집을 고양이 굴로 만들어버린 적도 있었고, 엄마 아빠를 골탕 먹이기 위해 하루 동안 지붕 위에 숨어 있었던 것 정도는 약과였으며, 나르샤의 문제집에 온통 낙서를 해놓는 작은 악마 같은 짓도 서슴지 않았다.

수영에 꽂힌 후로는 조금 얌전해졌지만….

얼마 전에도, 수영장을 만들어 달라는 이유로 온갖 떼를 쓰다가 통하지 않자 단식 투쟁을 하던 니콜라스를 떠올린 나르샤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정말 우리 니키 친구니?”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는 상황에 도현이 긍정을 표하자 나르샤의 얼굴에 감격이 차올랐다.

“세상에! 아 참, 이럴 게 아니지. 얼른 들어와. 추운데 밖에 너무 오래 서 있게 했네.”

나르샤가 비켜서자, 진이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도현은 흘끔- 나르샤의 눈치를 보다가 어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게 처음이라 긴장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나르샤의 눈에는, 긴장한 도현의 모습이 예의 바른 아이의 모습으로 비쳐 보였다.

진과 도현이 집 안에 들어서자, 둘을 거실 소파로 안내한 나르샤가 과자와 음료수를 꺼내 왔다.

“니콜라스는 지금 방에 있어. 아까는 자고 있었는데, 지금은 깨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많이 안 좋아요?”

도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나르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는데, 어젯밤엔 열이 정말 펄펄 났어. 어휴…. 우리 집 말썽쟁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날씨에 바다에 들어간 건지. 지금은 아파서 봐주고 있지만, 다 나으면 크게 혼쭐을 내야지.”

나르샤의 말에 도현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저….”

“응? 왜?”

“니콜라스가 바다에 들어간 건 저 때문이에요.”

“으응?”

도현의 고백에 나르샤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도현이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제가 바닷속으로 들어갔는데, 그걸 보고 니콜라스가 놀라서 따라 들어온 거예요.”

“그게 정말이니?”

“네, 죄송합니다.”

니콜라스가 아픈 건 다 도현의 탓이었다.

도현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이라고 해도 니키가 나 몰래 집 밖으로 나간 건 혼나야 하는 일이야.”

나르샤의 말에 도현의 고개가 더욱 아래로 숙여졌다.

“으음, 너는 왜 바다에 들어간 건데?”

“바위 위에 이상한 게 있어서요. 뭔지 확인해 보려고 가까이 가다 보니까 조금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됐어요.”

도현의 말을 듣던 나르샤는 어제 니콜라스가 입고 왔던 겉옷이 생각이 났다.

‘처음 보는 옷이다 싶었는데, 이 친구 옷이었구나!’

두 눈을 깜빡이던 나르샤가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니콜라스의 친구 중에 얌전한 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얌전하고 예의 발라 보이는 모습에 깜빡 속았는데, 이쪽은 니콜라스와 다른 타입의 사고뭉치인 것 같았다.

“그래서 바위 위에 뭐가 있었는지는 확인했니?”

분명 자신을 탓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다른 질문에 도현이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새끼 바다사자였어요.”

나르샤의 머릿속에 그 장면이 두둥실 그려졌다.

새끼 바다사자와, 예의 바른 사고뭉치와, 우리 집 말썽쟁이.

‘뭐지…? 이 심장에 안 좋은 조합은?’

나르샤의 안색을 살피던 도현이 슬그머니 하고 싶었던 말을 뱉었다.

“그, 니콜라스는 저를 도우려던 거였어요. 그러니까….”

조금 우물쭈물하던 도현이 애처롭게 눈꼬리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혼내지 말아주시면 안 될까요?”

쿵- !

그 파괴적인 귀여움에 나르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혼낼 건 혼내야 한다.’라는 이성과 ‘귀여우니까 한 번만 봐주자.’라는 본능이 팽팽하게 부딪쳤다.

그리고.

승리를 거머쥔 건 본능이었다.

나르샤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도현의 얼굴이 밝게 펴졌다.

한 번 더 심장에 공격을 당한 나르샤가 심장을 부여잡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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