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5)화 (26/582)

제25화. 투쟁 (5)

사태가 진정되고.

나르샤와 도현이 대화를 나누던 동안 비스킷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던 진이 물었다.

“그럼 지금 들어가 봐도 괜찮겠지?”

“응. 대신 감기 옮지 않게 너무 가까이 가진 말고. 알았지?”

“알았어! 가자, 도현!”

진의 말에 음료수를 마시던 도현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둘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나르샤는 진을 뒤따라가는 도현의 뒷모습에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 완전 재수 없는 데다가 잘난 척쟁이야!

아!

나르샤의 얼굴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최근에 니콜라스가 자주 말하던 재수 없다는 편입생.

성격도 안 좋은데 왜 다들 친해지고 싶어서 난리인 건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리던 니콜라스.

‘짜식. 친한데 괜히 그런 거구나!’

니콜라스가 들었다면 억울해할 오해를 한 나르샤가 우리 집 애가 은근히 부끄럼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똑똑-

작게 문을 두드린 진과 도현이 숨을 죽였다.

‘깨어 있을까?’

둘이 잠시 시선을 교환하고-

“누구야?”

감기 때문에 목이 상한 듯, 약간 쉰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왔다.

“니키! 나야, 진! 나 들어간다!”

활기차게 말한 진이 니콜라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침대에 누워 붉게 상기된 얼굴로 골골거리는 니콜라스가 있었다.

아파 보이는 니콜라스의 모습에 진은 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얼굴을 맞대고 살아온 원수 같은 친구지만, 이렇게 몸져누워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니키, 괜찮아? 많이 아파?”

“아냐. 살 만해.”

니콜라스가 괜히 허세를 부렸다.

“도현도 같이 병문안 왔어!”

“…뭐?”

다 죽어가는 기색으로 누워 있던 니콜라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진 옆에 서 있는 도현의 모습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 네가 왜 여기 있어!”

“아프다길래 걱정돼서 병문안 왔어.”

“그러니까 네가 왜?!”

니콜라스의 말에 기겁한 진이 외쳤다.

“병문안 온 친구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니키!”

“쟨 내 친구 아니거든?”

“뭐? 너 진짜 못됐다!”

니콜라스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은 저 편입생이 얼마나 성격이 나쁜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어제도 니콜라스를 비웃고, 우습게 보지 않았던가!

아파서 붉게 달아오른 니콜라스의 얼굴이 조금 더 뜨거워졌다.

병문안을 왔다가 어째 더 상황을 악화시킨 듯한 느낌에 도현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어제 오해가 조금 있었어.”

도현의 갑작스러운 말에 니콜라스가 화를 내던 것을 멈추고 도현을 보았다.

“그, 어제 웃은 거. 널 비웃은 게 아니었어. 그리고 멋있다고 한 것도 진심이었고.”

도현의 말에 니콜라스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렸다.

누가 봐도 여전히 기분이 풀리지 않은 모습에 조금 난감한 표정을 하던 도현이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바위로 헤엄쳐 갈 때 되게 멋있어 보였거든. 진심이야.”

도현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니콜라스가 머뭇머뭇거리며 도현을 돌아보았다.

“…그게 그렇게 멋있었어?”

퉁명한 목소리였지만, 두 눈은 숨길 수 없는 기대로 반짝 빛나고 있었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성격이었지만….

도현이 보기에 그건 좋아하는 일을 향한 열정이었고, 애정이었다.

형의 바이올린처럼, 도현의 연기처럼, 니콜라스는 수영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열이 오른 와중에도 얼굴보다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 두 눈동자를 마주 보며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 정말로 멋있었어.”

“큼, 큼! 뭐,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어제 한 말은 취소해 줄게.”

말 걸지 말라고 외치던 니콜라스의 모습을 떠올린 도현이 작게 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극적인 화해를 하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니콜라스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둘은 더는 니콜라스를 귀찮게 하지 않고 방을 나왔다.

진과 도현이 일 층으로 내려오자, 나르샤가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벌써 돌아가니? 곧 부모님 오실 텐데, 같이 저녁 먹는 건 어때? 새로운 친구도 소개해 드릴 겸.”

오늘 니콜라스의 집에 병문안을 온 것도 도현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도현이 난감해하고 있는 사이, 진이 방긋 웃으며 답했다.

“니키가 아파서 누워 있는데 우리만 저녁 먹고 가긴 좀 그렇지! 다음에 다시 놀러올게, 나르샤 언니!”

“하긴, 그렇긴 하다. 그럼 저녁은 다음번에 먹기로 하고…. 기다려봐. 집에 데려다줄게.”

나르샤가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었다. 도현이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르샤가 웃으며 거절했다.

도현과 진은 나란히 뒷자석에 착석했다. 능숙하게 시동을 건 나르샤가 백미러로 도현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다음에도 꼭 놀러 와. 앞으로도 우리 니키랑 친하게 지내주고! 오늘 병문안 와주어서 고마워.”

호의로 가득 찬 얼굴로 말하는 나르샤에 도현은 불현듯 깨달았다.

‘니콜라스는 정말 사랑받고 있구나.’

나르샤가 도현에게 보이는 호의의 기반은 니콜라스를 향한 애정이었다.

그 얼굴에 도현은 자연스레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사 일로 바쁘실 텐데도, 가정부를 고용하지 않고 매번 도시락을 손수 싸서 준비해 주신다. 귀찮을 법도 한데도 매일 아침 도현을 깨우러 와주시고, 학교에 갈 때와 돌아올 때도 매번 밝게 웃는 얼굴로 도현을 반겼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 도착했다!”

도현이 나르샤에게 감사를 표하며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도현.”

진이 도현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도현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진이 나르샤를 힐끔-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니키랑 별로 친하지 않은 거 알고 있었어.”

갑작스러운 말에 놀랐던 도현은 곧바로 납득했다.

학교에서 셋이 있는 시간이 제일 많았다. 영리한 진이 니콜라스와 도현의 사이가 서먹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도현이 그리 생각하며 표정이 흐려지려던 찰나, 진이 장난기 서린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혹시 도현이 니키를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거야! 니키는 정말 싫어하는 애한테는 그렇게 굴지 않거든. 사실 니키도 도현이랑 친해지고 싶어 할걸? 자존심이 세서 아닌 척하고 있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한 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이왕이면 니콜라스랑 도현이 친해졌으면 좋겠어. 둘 다 내 소중한 친구니까!”

말을 끝낸 진이 옷소매를 놓아주며 환하게 웃었다.

‘소중한 친구.’

진은 항상 적극적으로 도현에게 다가왔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현은 어쩐지 눈가가 달아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 그냥 살아도 안 돼. 최선을 다해서 행복하게 살아.

어디선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 * *

뭔가, 집에 곧바로 들어가기 싫은 기분에 정원에서 밍기적댔다.

우우웅-

주머니에 넣은 도현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엄마인가?’

너무 정원에 오래 있었나 싶었다.

친구 집에 간다고 말씀드리긴 했는데, 너무 안 들어오니 걱정되셔서 전화를 건 건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한 도현은 액정 위에 뜬 하얀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도현은 메시지 창에 들어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리암 호프 : 시나리오 완성했다.]

도현이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메시지 한 개가 더 도착했다.

[리암 호프 : 어디냐? 지금 공원에 왔으면 좋겠는데.]

도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잠시 공원에 들를 시간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도현의 손가락이 타자를 눌렀다.

[지금 갈까요?]

[리암 호프 : 응.]

[이십 분 정도 걸려요.]

[리암 호프 : 알았다.]

간결하기까지 한 대화가 오가고, 도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대체 무얼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린 건지 궁금했다.

도현의 다리가 부지런히 움직였다.

* * *

한적한 공원.

이제는 전용석으로 느껴지는 정자에 앉은 리암이 비장한 기색으로 공원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멀리서부터 작은 인영이 보였다.

도현은 오랜만에 보는 리암의 얼굴에 어쩐지 반가운 기분까지 들었다.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리암에게 가까이 간 도현은 인사를 하려다가 리암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대체 그 몇 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조금 사람 같았던 행색이 다시 지저분해져 있었고 두 눈에는 광기처럼 느껴지는 안광이 도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에요, 리암.”

“그래! 내가 이 날만을 기다렸다! 자. 빨리 읽어봐!”

리암이 눈을 번뜩이며 도현에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그동안 무엇을 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리암은 지금 당장 도현이 시나리오를 읽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결국, 도현은 자리에 앉아 정자세로 시나리오를 정독했다.

도현의 눈이 빠르게 글을 읽어 내려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냉정한 표정이었지만, 리암은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탁!

도현이 시나리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재미있네요, 이 시나리오.”

도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리암의 입꼬리가 위로 솟구쳤다.

“흐하하! 그럼 그렇지. 이 리암 호프님이 쓰신 시나리오가 별로일 리가 없지!”

리암의 자화자찬에 도현이 조금 한심한 표정으로 리암을 보았다. 한참을 웃던 리암 호프가 고개를 휙- 돌려 도현을 보았다.

“고맙다.”

“네?”

“고맙다고. 네가 아니었으면 이 시나리오는 없었어.”

리암은 진심이었다.

몸은 고되고, 정신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갈아엎은 횟수는 이젠 세기를 포기했을 정도였다.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글을 썼다.

갈수록 지쳐갔지만.

반대로 그는 어쩌면 처음으로, 제대로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사 인사에 조금 민망해진 도현이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데 리암이 놀라운 말을 했다.

“시나리오 공동 저자로 네 이름을 넣을 생각이다.”

“네?”

자꾸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 같았지만, 도현은 그 말 말고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도현의 반응에 리암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네가 없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시나리오야. 그러니 공동 저자로 들어가는 게 맞지. 물론 내 이름 뒤에 넣을 생각이지만 말이다.”

자신의 이름이 박힌 시나리오라니….

생각조차 한 적 없는 일에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한 건 시나리오가 어떤지 감상을 늘어놓은 것 밖에 없는걸요.”

“우리가 그동안 했던 토론은 다 잊어버린 거냐? 그 정도로 참여했는데 이름을 넣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이건 당연한 일이니까, 싫다고 하진 말아라.”

“…고마워요, 리암.”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기쁨과 설렘이 더욱 컸다.

도현의 뺨에 오른 홍조에 리암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이다운 표정도 지을 수 있었구나.’

늘 무표정하거나 냉정한 얼굴로 딱딱한 말투를 쓰는 애늙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드러운 홍조가 어린 채 두 눈을 빛내는 도현은, 그 나이대의 아이처럼 사랑스러워 보였다.

깜짝 선물 같은 이야기에 기분이 좋아졌던 도현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으니까…, 이제 이런 만남도 끝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제 공원에는 안 나오는 건가요?”

“음?”

“시나리오가 완성됐잖아요.”

도현의 말에 정신을 차린 리암이 중요한 일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현에게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보여주는 순간보다 더욱 긴장한 리암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영화 찍을 준비를 해야지.”

“그럼…. 많이 바빠지겠네요.”

“그래. 배우도 구해야 하고 장소도 알아봐야 하고 해야 할 게 많아.”

“그래도 리암이라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도현의 진심 어린 응원에도 긴장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리암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찬란한 열정을 담아 빛나는 두 눈동자가 도현을 담았다. 그 순간 리암은, 아주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하늘의 별에 닿길 원하는 순수하고 어린.

자신을 숨 쉬게 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꿈에 모든 걸 바칠 준비가 된 무모하고, 그래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리암은 도현이 이사야를 연기한 순간부터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입에 담았다.

“내 영화에 출연하겠어?”

“…네?”

“내가 널 내 영화의 배우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소리다.”

도현의 두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뜨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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