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7)화 (28/582)

제27화. 투쟁 (7)

도현과 약속했던 날이 밝았다.

리암은 약간의 기대와 걱정을 담아 공원으로 향했다.

‘준비를 잘해 왔을까?’

리암이 만들어낸 ‘이사야’는 도현의 연기를 모티프로 완전히 재창조된 캐릭터였다.

이미 리암의 마음속에서 도현은 이사야였다.

‘유가 된 도현이라. 상상하기 어렵군.’

이런 상황인 만큼 어지간한 연기로는 리암의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하나….

연기력보다 이미지를 보고 배우를 캐스팅하는 감독이 있을 정도로 영화에서 ‘이미지’는 상당히 중요했다.

유의 역할을 맡지 못한 도현이 상심하지 않도록 잘 어르고 달래서 꼭 이사야로 캐스팅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성큼성큼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내기에서 지면 이사야 역할을 맡기로 했다지만, 도현이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어린애 아닌가.

싫다고 울면서 떼를 쓰면 리암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 도현이 울면서 떼를 쓸 일은 없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공원에 가자, 언제 왔는지 도현이 벤치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에게 반갑게 인사하려고 다가가던 리암이 순간 멈칫했다.

‘…도현이 맞나?’

리암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시간, 이곳에 서 있는 남자애면 도현이 맞을 텐데, 이상하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조금 더 가까이 걸어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도현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도현을 마주한 순간, 리암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지저분하진 않지만,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머리, 색감 때문에 오래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캐주얼한 후드, 비딱하게 선 자세, 성질머리를 숨기지 않는 눈썹.

그는 지금 서 있는 아이의 정체를 단숨에 깨달았다.

“유?”

“네. 일주일만이네요, 리암.”

도현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에 리암은 잠시 침묵했고, 이내 기가 차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준비가 아주 철저한데?”

“네. 제가 오늘 이길 거라서요.”

도전적인 말에 리암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눈에 붙은 불은, 분명히 승부욕이었다.

아이를 상대로 이기려 드는 게 어른답지 않은 일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리암은 본디 이성보단 감정을 따르는 인물이었다.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군. 그거야 이따 보면 알 일이지. 난 어리다고 안 봐줘.”

“마음대로 하시죠. 결과는 같을 테니까.”

리암이 허! 코웃음을 쳤고 도현이 팔짱을 꼈다.

잠시 둘 사이에 열렬한 시선이 오갔다.

먼저 말문을 뗀 건 리암이었다.

“좋아.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니 기대를 단단히 하고 보겠어. 일단, 준비해 온 장면이 어딘지 말해봐.”

리암의 물음에 도현이 한쪽 입꼬리를 슬쩍 들어 웃으며 리암의 손에 들린 시나리오를 향해 턱짓했다.

리암이 도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자,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 있는 거. 그거 준비했다고요.”

“뭐?”

도현의 말에 리암이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대본을 통째로 다 외웠다고 말하는 건가?’

진심인가 싶어 가늘게 뜬 눈초리로 도현을 보았지만, 도현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 순간 리암은 도현이 자신이 숨겨놓은 단서가 있는 씬 회차를 모두 외웠던 일이 생각났다.

‘진짜인가?’

리암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만에 이 대본을 다 외웠다고?

그렇다고 해서 도현이 괜히 거짓말을 할 것 같진 않았다.

오늘따라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긴 하지만, 결국 본질은 ‘도현’이었다.

리암은 도현의 말을 믿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씬 33.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보자. 할 수 있어?”

“네.”

도현의 짧고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준비할 시간은?”

“아뇨. 바로 해도 괜찮아요.”

“그래, 그럼.”

잠시 말을 멈춘 리암이 시나리오를 펼치고서 지문을 읽었다.

“씬 33. 오후 4시. 성당으로 통하는 오솔길. 이사야를 만나러 가는 유. …레디.”

도현이 눈을 감았다.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황량한 공원이 서서히 지워졌다. 몸을 따스하게 감싸는 오후의 공기. 산들거리는 싱그러운 잔디. 흙이 버석거리는 오솔길. 햇빛을 받아 빛을 반사하는 성당이 하나둘씩 여백을 채워 나갔다.

“액션.”

유가 눈을 떴다.

* * *

오는 길에 머릿속은 온갖 번뇌로 들끓었다. 성당. 높은 스테인드글라스. 오후의 평온함. 소년을 둘러싸고 기도하던 사람들. 손을 꼭 붙잡던 신부의 주름진 손. 배경처럼 깔리던 잔잔한 기도문.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또다시 성당.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대리석 바닥. 온후하던 공기. 구원을 청하던 사람들. 증오 한 줌 없이 편안한 얼굴. 그 사이에 서 있던 이사야.

그 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혼을 붙잡힌 것처럼 같은 장면이 반복해서 스쳐 지나갔다.

군중 사이에 익숙한 소년이 보인다.

매일 세탁해 깔끔한 소맷단. 정갈하게 정돈한 머리칼. 반들거리는 갈색 로퍼.

축복받은 삶을 사는 주제에, 무슨 구원을 바라는지 모를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노래 같은 기도를 입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그 가운데서 홀로, 이질적이게 서서, 십자가에 못이 박힌 예수처럼 대롱대롱 전시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빨지 않은 헤진 재킷. 빗어주는 부모가 없어 뻗친 머리카락. 하얀 바닥 위에서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흙탕물과 온갖 오물로 검게 물든 운동화.

사람들은 소년의 구원을 청했다. 자비를 입에 담았다. 유의 귀에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 저기 좀 봐요. 저 불쌍한 아이의 모습을 보세요.

두 눈엔 얄팍한 호기심을 담고.

- 부모 없이 자라 보살핀 흔적이 없는 볼품없는 행색을 봐요.

입과 혀엔 값싼 동정을 올려서.

- 아, 가련하기도 하지.

우리 모두 주님께 기도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그렇게 소년의 불행을 혀로 조각내어 전시했다.

탁.

태엽이 멈춘 인형처럼 소년이 멈춰 섰다. 애써 구겨진 얼굴을 풀어보려 하지만 비틀려 꽉 다물린 입매는 파들거리다가 곧 다시 원점이었다.

그 과정을 몇 번이고 반복한 끝에 유는 간신히 담담함을 가장할 수 있었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 튼다.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이를 목격한 순간.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에 잠긴 그 가증스러운 얼굴을 보자 표정을 관리한 보람도 없이 두 눈에 새파란 분노와 증오를 담은 불꽃이 튀겼다.

유는 어제 겪었던 그 장면이 계속 머리를 헤집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 순간 귓가에서 하염없이 맴돌던 기도문이 뚝- 끊겼다.

제가 원하는 것을 깨달은 유의 얼굴이 자연스레 펴지고, 입가에 희열에 찬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이사야가 그를 돌아보기 전 빠르게 사라졌기에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유가 천천히 눈을 늘어트렸다. 일자로 단정하던 눈썹이 내리막을 그리고, 입매는 울음을 참는 것처럼 불안하게 다물려 있다.

“이사야.”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흩어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유의 두 눈이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일렁였다.

다가가고 싶지만, 겁이 난다는 듯 유의 걸음걸이는 조심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오는 이사야에 유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끊어질 듯 말 듯, 슬픔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사야…. 나 고해 성사를 하고 싶어.”

숨을 한번 들이쉬곤, 힘이 빠진 사람처럼 스르르, 의자에 앉았다.

“어제, 그러니까 어제 미사에 참여했잖아. 너도, 신부님도, 신도들도 모두 나를 위해 기도했는데…. 이사야, 나는, 난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유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목구멍 뒤로 삼킨 감정이 버거워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한번 입술을 짓씹은 유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사야, 제발. 내가 말할 사람은 너밖에 없어. 신부님께 말했다가… 그랬다가 용서받지 못할까 두려워. 너는 그러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간절했다. 맞물려 하얗게 질릴 정도로 꼭 쥔 손이 유의 심정을 대변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이사야가 유의 고해를 받아들였다.

절벽에 매달린 사람처럼 위를 향하던 눈동자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유는 흐트러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눈을 꼭 감고 언젠가 이사야에게 배웠던 십자 성호를 그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사야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다가, 혼나는 게 겁이 나는 아이처럼 꽉 감았던 눈을 떴다.

“고해는… 처음입니다.”

한 박자의 쉼이 이어지고.

“형제님. 저는 죄를 지었어요. 저는 제8계명을 어겼습니다. 저는…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느릿느릿, 고해하는 유는 얼굴에 난 생채기와 뻣뻣한 머릿결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는 충실한 신자처럼 보였다.

“그래요. 거짓 증언을 했어요. 저는 고아가 아니에요.”

유가 짧게 한숨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제 부모님은 잘 먹고 잘 놀고 잘 살아 계시고, 저는 집을 나왔어요. 하하, 제가 집을 나왔어요.”

불안에 찼던 눈동자가 거짓이었다는 듯, 목소리엔 명백한 즐거움이 담겨 있었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과 죄책감에 눌려 있던 모습과 어긋난 그 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이한 불쾌감과 꺼림칙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스타카토처럼 끊어지는 웃음을 내뱉던 유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입매가 축 내려갔다.

“형제님. 저는 제4계명을 어겼습니다. 형제님께서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귀한 생명을 받았고 양육되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히 부모를 사랑해야 한다고 알려주셨죠. 그러나 제게 생명을 주신 부모는 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던 어린 저를 차가운 길바닥에 버렸고, 저를 양육해 주신 부모는 제게 아무런 교육을 하지 않고 방치했어요. 그들은 제 영혼과 육신을 돌보지 않았어요.”

억울함을 호소하는 울분에 찬 목소리였다. 고해를 하는 목소리는 점점 더 격양되었다.

유는 제 앞에 앉은 이사야와 눈을 마주쳤다. 물기로 촉촉해진 검은 동공은, 습기에 번들거리는 뱀의 비늘과 닮아 있었다.

“형제님! 저는 제7계명을 어겼습니다. 집을 나온 저는 머물 곳도, 덮을 옷도, 먹을 음식도 없었어요. 저는 살기 위해 도둑질을 했습니다. 타인의 돈을 훔쳤어요. 훔친 돈으로 머물 곳을 구하고, 새 옷을 장만하고, 배를 채웠어요!”

유가 끔찍하다는 듯이 도리질 쳤다.

“형제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유의 몸이 발작하듯이 들썩거렸다. 그러고선 허공에 대고 손아귀를 쥐었다. 꼭 누군가의 팔을 붙잡은 모양새였다.

“제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 예?”

마주한 이를 삼켜버릴 듯이 노려보던 유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손에 힘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 늘어졌다.

“회개? 하하, 회개…. 회개요.”

유가 이사야의 말을 곱씹었다. 그건 우스워하는 것 같기도 했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선 체념한 사람처럼 느릿하게 말했다.

“저는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도둑질을 계속할 것이며, 수없이 많은 거짓 증언을 입에 올릴 거예요. 형제님, 저는 그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저는…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어요.”

독 같은 슬픔에 가득 차 죄를 고했다.

“형제님. 아, 형제님…. 저는 제10계명을 어겼습니다. 형제님을 볼 때마다, 때 묻은 곳 없이 깨끗한 소매와 잘 다려진 옷, 광이 나는 구두를 볼 때마다 그것을 탐내었습니다. 형제님. 지금도 그래요.”

떨리는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뱉었다.

“형제님. 저는 악마인 게 아닐까요? 저는 지금 지옥에 있는 게 아닐까요? 제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시련에 휩쓸린 어린 짐승의 낯을 하고는, 두려움에 어깨를 떨며 몸을 움츠렸다. 이사야를 바라보는 검은 눈이 퍽 간절했다.

그게 제 발목을 죄여 오는 독사인 줄도 모르고 이사야는 긍정했다. 구원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전 믿기 어려워요. 저 같은 볼품없는 자에게까지 하느님의 손길이 닿을까요? 저는 두려워요.”

눈가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내내 붉게 물들었던 눈자위가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이사야의 발목을 칭칭 둘러싼 독사가 입을 쩍 벌렸다. 독니가 번들거렸다.

“만약 그 말이 진실이라면… 내게 한 말이 진심이라면…. 내가 믿을 수 있도록 증명해 주세요, 형제님. 증명해 줘, 이사야.”

콱!

독니가 파고든 발목부터, 핏줄을 타고 온몸에 퍼지길 기다렸다.

친절하고 상냥한 소년이 그를 외면할 수 없음을 아니, 그 동정과 연민으로 나를 기만했으니, 나 또한 그것으로 너를 추락시킬 거야.

유는 이사야의 대답을 듣고 희미하게 웃었다.

터져 나오는 유쾌한 웃음을 참기 위해 꾹 억눌린 미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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