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8)화 (29/582)

제28화. 투쟁 (8)

솔직히 말해서 공원에 오기 전까지 리암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니, 바꿀 마음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그만큼 도현의 이사야는 완벽했으니까.

리암의 머릿속에서 이미 이사야는 도현이었고 도현은 이사야였다.

그런 도현이 유라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형제님. 저는 죄를 지었어요. 저는 제8계명을 어겼습니다. 저는…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리암은 넋을 놓고 홀린 듯이 도현을 보았다.

한껏 일그러졌던 얼굴도, 악마같이 웃던 얼굴도 모두 보았음에도 그 순간 도현이 정말로 참회하는 신자 같아 보였다.

그것이 유의 가증스러운 연기임을 알면서도 잔뜩 움츠려 파들거리는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현의 연기는 놀라우리만치 현실적이었고, 동시에 비현실적이었다.

이내 유의 감정이 격화되었을 땐.

“형제님!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핏대를 세울 것처럼 목을 내밀며 외치는 모습에 압도되었다. 허공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꼭 그의 팔을 쥐어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압도적이었다.

유가 어린 낯으로 이사야를 구슬리고 덫에 빠트리는 것을 보면서 리암의 머릿속에는 영화의 장면이 그대로 재생되었다.

도현이 유가 되어 연기하는 장면이.

도현이 연기하는 유는 지극히 감정적이었고, 섬세했으며, 예민했다.

그러면서도 까만 눈동자가 시선을 떼기 어렵게 만들었다.

날을 잔뜩 세운 새끼 짐승을 보면 으레 그렇듯 다가가서 경계심을 풀어주고 품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런.’

리암이 속으로 탄식했다.

유가 된 도현을 떠올려 버렸다. 강렬하게 박힌 그 이미지는 순식간에 깊게 파고들었다.

‘지는 건 생각도 안 해봤는데.’

그러나 결과는 명백했다. 리암은 억울했다. 저런 연기를 보고 나서 인정을 하지 않는 게 가능키나 한 일인가?

그래, 저 꼬마가 이상한 거다.

그리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리암은 자포자기한, 어쩌면 아주 설레는 심정으로 도현의 연기를 집중해서 감상했다.

도현의 연기는 아주 특이했다.

표정 근육을 움직이는 훈련을 제대로 해본 적 없을 텐데도 짧은 찰나에 표정이 휙휙 바뀌었다.

훈련되지 않은 근육은 섬세한 컨트롤이 부족했지만, 그것이 두드러지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평소에 사람을 보고 어색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마치….

마치, 도현은 꼭 진짜 유가 되어 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도현의 연기가 끝나고.

놀라움과 경악을 선사해 주었던 연기를 되새기며 전율에 몸서리치던 리암의 두 눈이 불시에 커졌다.

리암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둔탁한 감각을 느꼈다.

리암이 생경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애매하게 놓인 벤치. 하나뿐인 가로등이 전부인 공원. 그래, 항상 보던 공원이었다.

리암의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도현이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기에, 마치 정말 성당이 있고 그 앞에 이사야가 보이는 것처럼 굴어서 잠깐 현실 감각을 잊었다. 눈을 뜨고 있었는데 꿈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완전히 말려들었다.

그리고.

‘대박 났네.’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분명 도현은 이사야의 역할에 잘 맞았다.

도현이 이사야를 맡는다면 다시없을 완벽한 캐릭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졌다. 네가 이겼어.”

방금 그 연기를 보고 무슨 말을 하겠는가?

감독이라면, 아니, 눈이 달려 있다면 알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제게 엄청난 기회가 주어졌음을!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은 도현이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리암을 보고 해맑게 웃었다.

리암은 지는 걸 굉장히 싫어했지만, 더 이상 패배는 의미 없었다.

중요한 건, 이 연기를 고스란히, 한 치의 부족함 없이 영화에 담아내기 위한 준비뿐이었다.

* * *

이겼다.

도현은 자꾸만 같은 말을 곱씹었다.

도현은 리암과의 내기에서 이겼다. 이기고자 했고, 이길 거라 믿었기에 어쩌면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런데 자꾸만 가슴께가 이리저리 술렁거렸다. 내딛는 걸음걸음이 왜인지 가볍게 느껴지고, 무언가 보글보글한 감정을 내뱉고 싶었다.

아. 그렇구나.

도현은 불시에 찾아온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삶에 있어서 처음으로 제 손으로 얻어낸, 첫 승리였다.

그리고 그건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도현은 슬그머니 움직이는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잡아 내리며 리암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리암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더니, 자신이 한동안 바쁠 예정이라 할 이야기가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말한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

실제로 장소 섭외부터 스태프 고용, 소품 구매, 배우 캐스팅까지 다 해야 하는 리암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니까 부모님께 말씀드려라! 꼭!

리암의 당부를 떠올린 도현은 엄마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도현이 거실에 나와 있는 서혜나와 마주치곤 인사했다.

“저 다녀왔어요.”

“아. 도현이 왔구나. 으음, 그래. 지금 저녁 준비했는데…. 먹을 거니?”

과하게 조심스러운 서혜나의 태도에 도현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네. 손 씻고 내려올게요.”

“…! 그래! 엄마가 준비해 놓고 있을게.”

서혜나의 얼굴이 확 펴졌다.

‘오늘은 기분이 괜찮은 건가?’

지난 일주일 동안 도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달라진 도현의 모습에 서혜나는 뭔가 잘못된 걸까 봐 겁이 났다.

심리학 사전을 찾아보며 도현의 상태를 이해하려고 애썼고, 그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를 만나서 여러 번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종종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아이들의 인격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깊은 슬픔과 아찔함을 느꼈다.

결국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

서혜나는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을 찾았다.

도현이가 어떻게 바뀌든 받아들이자고,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고 지지해 주자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런데 방금.

서혜나의 착각이 아니라면 도현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서혜나가 분주히 저녁밥을 차리며 도현의 상태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이, 손을 씻고 잠옷까지 갈아입은 도현이 주방으로 내려왔다.

쪽갈비와 흰밥, 갖가지 반찬들이 먹음직스러운 윤기를 흘렸다.

“잘 먹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식전 인사를 한 도현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반듯하게 젓가락으로 쪽갈비를 들어 올리는 모양새가 나무랄 데 없이 단정했다.

‘도현이가 맞아!’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완벽했던 식사 예절이 꿈이었다는 듯이 구부정한 자세로 밥을 먹던 도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과서에 수록해도 될 정도로 반듯한 자세로 차분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서혜나가 도현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는 사이, 도현은 쪽갈비를 우물거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같이 산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도현은 엄마에게 무언가 요청해 본 적이 없었다.

도현을 늘 주의 깊게 보는 서혜나가 도현이 필요성을 느끼기 전에 미리 준비해 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뭔가를 부탁한다는 게 너무 낯설었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아니야. 말씀드린다고 리암한테 약속했잖아.’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도현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엄마,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도현의 말에 서혜나가 눈을 깜빡였다.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동안 살아왔던 환경 탓에, 무언가를 바라는 게 어려운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이 부모에게 당연히 요구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걸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 도현이 부탁이라는 말을 꺼냈다.

“뭐, 무슨 부탁인데? 뭐든 말해봐. 엄마가 다 들어줄게.”

서혜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도현이 부탁한다는 게 대체 뭘까.

그게 무엇이든, 어떤 짓을 해서라도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서혜나가 도현을 뚫어지게 주시하는데, 도현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영화? 그래 내가 다 사줄…. 뭐?”

서혜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혜나가 말을 제대로 못 들었다고 생각한 도현이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영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서혜나는 놀란 심정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진정하자고 생각하니 진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야.’

도현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책의 대사를 가지고 연기를 하는 ‘놀이’라는 것을 자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혜나가 도현을 보았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지만, 내 새끼라서 그런 게 아니라 도현은 정말 예뻤다.

저 사랑스러움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그건 인류에게 실례인 게 아닐까?’

서혜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현의 천재성을 다시금 깨달았다.

어쩜, 자기한테 맞는 길을 어려서부터 척척 찾아간담!

마음 깊이 탄복한 서혜나가 도현에게 물었다.

“일단, 연기 학원부터 등록할까? 오디션은 엄마가 찾아볼게. 혹시 뭐 더 필요한 거 있니? 연기 서적도 사다 줄까?”

영화 관계자들이 눈이 제대로 박혔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아주 만약 도현을 영화에 출연시키지 않는다면 직접 영화를 만들 의향까지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서혜나의 눈을 보던 도현이 어색하게 말했다.

“저….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미 출연하기로 한 영화가 있어요.”

서혜나의 두 눈에 충격이 서렸다.

이미 도현은 자신보다 몇 걸음은 앞서가고 있었다!

아들의 뛰어남에 감탄함과 동시에 자신의 무능력함에 한탄하던 서혜나가 문득 생각난 것을 물었다.

“대체 언제 오디션을 본 거니?”

“오디션은 아니고….”

도현이 한번 숨을 고르고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일을 천천히 풀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서혜나의 표정에 놀라움이 서렸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시나리오를 작성 중이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아직 어린 아들이 몇 차례나 시나리오를 가지고 의견을 나눴다는 부분에선 대견했고, 시나리오의 저자에 도현의 이름이 들어갈 거란 대목에서는 경악했다.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에 잠시 물을 한 모금 마신 도현이 말했다.

“그래서 오늘 테스트를 받고 합격했어요. 저 이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데, 허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허락하고 말고도 없었다.

도현이 원한다면 사비를 털어서라도 영화에 출연시킬 생각이었던 서혜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긍정했다.

“도현이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뭐든지 해도 괜찮아.”

말을 하던 서혜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입을 벌렸다.

“아, 아들. 혹시 말인데….”

“네?”

“요즘 평소에…. 배역을 연습하고 있었던 거니?”

유와 자신의 사이를 좁히던 연습을 떠올린 도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몰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연기…. 그래, 연기였구나.”

연기, 연기였어.

몇 번 반복해서 말하던 서혜나가 긴장이 풀린 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선 말했다.

“다행이다…. 나는 뭔가 잘못된 줄 알고….”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서혜나가 다시 몸을 반듯이 세우곤 빙긋 웃었다.

“더 먹어. 식겠다. 아, 밥 먹고 나선 감독님 전화번호 좀 알려주렴. 계약하려면 일정을 잡아야 하니까.”

“아… 네. 그럴게요.”

도현은 서혜나가 말한 대로 밥을 우물우물 먹었다. 그러면서도 흘깃흘깃 서혜나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혜나는 평소 같은 미소로 응수했다.

딸칵-

방으로 올라온 도현이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 나는 뭔가 잘못된 줄 알고….

그 전엔 무슨 얘기를 했지?

도현이 기억을 더듬었다.

- 요즘 평소에…. 배역을 연습하고 있었던 거니?

도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날 걱정하신 건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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