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9)화 (30/582)

제29화. 투쟁 (9)

도현은 그날 밤, 밤새 뒤척이느라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그렇게 고민했음에도 뚜렷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안녕?”

“안녕.”

진의 아침 인사에 응수한 도현은 가방을 내려놓다가 멈칫했다. 도현은 자리에 앉다가 말고 진의 안색을 살폈다.

…여기도?

그동안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진은 도현을 어색하게 대하고 있었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손동작이나 한곳에 가만히 두지 못하는 눈동자가 이 상황을 얼마나 불편해하고 있는지 드러냈다.

도현은 순식간에 발밑이 울렁이는 것 같은 깊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자리에 앉았을 때, 니콜라스가 그를 바라보지 않고 완전히 등진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니콜라스는 항상 ‘좋은 아침!’이라 외치며 먼저 인사를 건넸….

아.

도현이 신음성을 삼켰다.

맞아, 어제도 이랬지.

왜? 언제부터?

도현은 하루아침에 달라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어볼까.’

도현이 손가락을 꼼질댔다.

일단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고, 인사를 받아주면 그때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했는지 물어보고 사과를….

…그냥 내가 싫어진 거면?

도현이 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렸다.

지난 한 달은 정말 이상한 시간이었다. 아무도 나를 싫어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애정과 관심을 나눠주었다.

그게 익숙해질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익숙해져 버렸나 보다.

‘사실 이 상황이 정상인지도 몰라.’

도현은 인사를 건네려던 생각을 지워버렸다.

혼자인 건 슬프지 않았다.

어차피 형이 떠난 그 순간부터 도현은 깊은 외로움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 * *

도현은 굳이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고 진과 니콜라스도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처럼 한없이 불편한 상황이 되었다.

자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한 조가 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일단. 음, 합주에 쓸 악기부터 각자 정해볼까?”

진이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어설프게 웃었다.

두 사람이 대답하지 않자, 진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어갔다.

둘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고 있던 도현이 황급히 말했다.

“그래. 좋은 생각인 거 같아.”

니콜라스는 도현을 보며 콧방귀를 한번 뀔 따름이었다.

“그래? 다행이다! 그럼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는 사람은 말해볼래? 난 피아노랑 기타 가능해!”

진의 엄마가 미술에 조예에 깊다면, 진의 아빠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부모님의 예술적 성향을 짙게 타고 난 진은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악기 연주를 배워 꽤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진의 말을 듣던 니콜라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피아노.”

진과 달리 연주하는 것을 썩 즐기진 않았지만, 누나인 나르샤가 피아노를 배울 때 함께 배워 어느 정도는 칠 줄 알았다.

둘의 이야기를 듣던 도현은 순간 머릿속에서 바이올린이 생각났으나, 빠르게 지워버렸다.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건 형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조용히 있는 도현의 모습에 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 혹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없는 거야?”

도현이 긍정의 의미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던 진이 말했다.

“그러면 리코더나 실로폰은 어때? 그건 연주해 본 적 있지? 수행 평가 날까지 틈틈이 연습하면 연주하기 어렵지 않을 거야.”

도현이 병원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진은, 유치원이나 1학년 때 배웠을 거라 가정하고 한 말이었다.

‘연주해 본 적은 없지만….’

형의 기억으로 진이 말하는 게 어떤 악기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라면 도현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코더로 할게.”

“그래. 그러면 악기는 그렇게 하는 걸로 결정! 이제 곡을 선정해야 하는데….”

벨벨벨벨- 벨벨-

진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 소리가 울렸다.

음악 선생님이 반을 나가고 진이 다시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바로 이어지는 종례에 결국 진은 말하길 포기하고 바로 앉아야 했다.

밥을 먹을 때도 조용했기 때문에, 며칠 만에 이어졌던 대화가 그렇게 끊겼다.

하굣길.

왁자지껄한 아이들 틈바귀에서 세 사람은 조용히 걸었다. 스쿨버스 정류장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진이 다급히 도현을 붙잡았다.

“도현아! 혹시 바빠? 우리 음악 수행 평가 곡을 오늘 정해야 각자 연습해 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 괜찮을까? 스쿨버스 오기 전까지만!”

“여기서?”

“응! 조금만 정하고 가자.”

도현이 아이들을 인솔하는 줄리아를 보았다. 워낙 천방지축인 아이들 탓에 소란스러워 잠깐 대화할 시간은 있을 것 같았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초조한 표정이었던 진이 활짝 웃었다.

퉁명스러운 표정의 니콜라스가 탈주를 시도하자 뒷덜미를 낚아챈 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나는 음악을 꽤 오래 배워서 웬만한 건 다 칠 수 있어. 니키도 너무 어렵지만 않으면 칠 수 있을 거야. 도현이 네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곡을 고르면 될 것 같아.”

“생각해 둔 곡이 있어?”

“으음. 수업 시간에 배운 음악가의 곡을 연주해야 하니까.”

머리를 싸매던 진이 말했다.

“비발디 <사계> 중 봄 1악장은 어때? 유명한 곡이라 편곡된 악보도 인터넷에 많아서 쉬운 버전으로 연주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제 곧 봄이잖아!”

“뻔해.”

“뭐? 그럼 네가 골라보든가!”

“싫다고는 안 했는데?”

얄미운 표정을 짓는 니콜라스에 진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현은 둘이 티격태격 다투는 것에 끼어들지 않고, 소란이 진정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니콜라스를 응징하던 진은 도현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앗! 미안! 니키가 자꾸 얄밉게 굴어서…. 아무튼 그러면 우리는 악기랑 곡 다 정한 거지? 내가 악보 좀 찾아보고 괜찮은 거 있으면 뽑아 올게! 아빠한테 물어보면 될 것 같아.”

“아, 고마워.”

“별거 아닌데 뭘. 그럼 정할 건 다 정했으니까 이만 갈까?”

니콜라스와 진이 다시 걸음을 재촉하고, 둘이 발을 떼길 기다렸던 도현이 그 뒤를 따랐다.

일행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어정쩡한 거리.

도현은 심장이 조금 울렁거렸지만, 자꾸 둘에게 향하려는 시선을 억지로 떼어내어 괜히 굴러다니는 돌과 흔들거리는 풀 따위에 눈길을 주었다.

그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던 순간이었다.

“아! 진짜!”

니콜라스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뒤를 휙- 돌아보았다.

도현과 눈이 마주친 니콜라스가 씩씩하게 팔을 앞뒤로 흔들며 성큼성큼 걸어와서 도현의 바로 앞에 섰다.

“답답해 죽겠네! 너 지금 뭐 하자는 건데?!”

니콜라스의 행동에 기겁하며 뛰어오던 진이 이어지는 니콜라스의 말에 발을 멈췄다.

“대체 뭐야? 썩은 생선 같은 표정을 하고 다니질 않나, 눈만 마주치면 피하질 않나! 지금도 괜히 눈치 보면서 뒤에서 따라오고 있잖아! 저번엔 말 걸 때마다 귀찮다는 듯이 굴더니 이번엔 또 뭐야? 너 진짜 이상해. 알아?”

본래 니콜라스는 친구 한두 명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딱히 친구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고, 친구에게 집착하는 건 쿨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무시하면 될 텐데.

‘근데 자꾸 신경 쓰이게 하잖아!’

니콜라스가 분개했다.

아무래도 눈에 띄는 녀석인데, 풀이 죽어 있으니 자꾸 시야에서 거슬렸다.

도현과 자신을 흘끔대는 다른 아이들의 눈길을 받고 있노라면 꼭 악당이라도 된 것 같았다.

‘쟤가 먼저 시작한 건데!’

니콜라스는 억울했다.

진은 배알도 없는지, 틈만 나면 저 자식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면서도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더 어이없는 건, 도현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재수 없던 태도는 어디 가고, 꼬리를 내린 채 자꾸만 눈치를 봤다.

진은 도현의 눈치를 보고. 도현은 진과 자신의 눈치를 보고.

다가가고 싶은 게 뻔히 보이는데 멀리서 서성거리며 서로 아련한 눈빛만 뿌리고 있었다.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자존심이 상해서 먼저 말을 걸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이 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다다다다 쏘아붙인 니콜라스는 후련함을 느끼며 도현을 노려보았다.

그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도현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나는….”

“어! 너는! 너는, 뭐!”

운을 뗐긴 했는데, 뭘 말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도현이 다시 입을 다물자 니콜라스가 도끼눈을 뜨고 일갈했다.

“할 말 있으면 제대로 하라고!”

도현의 눈에 소리치는 니콜라스는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뭔가 잘못됐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아침마다 진과 인사를 나누고 비록 대화는 없더라도 점심에 같이 밥을 먹는, 그런 사이가 유지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아!

도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혼자인 게 익숙하다느니 지금까지가 이상한 일이었다느니 말은 잘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될까 봐 무서웠던 거다.

내가 이렇게까지 비겁한 사람이었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듯 쉽게 사과를 올리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자신은 그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달아오른 얼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도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내가…. 혹시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으면 알려줄 수 있을까?”

“…뭐?”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아니. 누가 그걸 못 들었대? 지금 너 나랑 장난하자는 거…. 허! 진짜냐?”

새로운 비꼼인가 싶었던 니콜라스는 입술을 꾹 깨문 도현을 보고 순간 말을 잃었다.

니콜라스가 입을 떡 벌리고 있자 진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도현. 그걸 묻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차분한 진의 물음에 도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너희가 날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내가 뭔갈 잘못한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 진작에 물어봤어야 하는데… 겁이 나서 못 물어봤어. 미안해.”

그 솔직한 대답에 진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나는 네가 우리가 싫어진 줄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도현이 깜짝 놀라 묻자 진이 대답했다.

“도현. 너는 조금 차분한 편이긴 해도 다정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태도가 변해서…. 예전처럼 웃지도 않고. 대화할 때 자꾸만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눈도 잘 안 마주치려 하고. 붙잡으려 할 때는 몸을 피하고.”

진의 말이 이어지는 내내 도현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리고 항상 날이 서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네가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서 물어봐도 아무 일도 없다고만 하고.”

그건…. 정말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해주려 하지도 않고 물을 때마다 싫어하니까…. 내가 싫어졌나 싶었어.”

차분하게 시작했던 말은 침울하게 끝이 났다.

도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것… 그것 때문이었어?”

“응.”

도현은 잠시 침묵한 채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진은 지금 도현이 유를 연습했던 것을 말하고 있었다.

도현은 불시에 깨달았다.

- 나는 뭔가 잘못된 줄 알고….

그렇다면, 엄마도….

그래. 생각해 보면 정말 단순한 일이었다.

도현은 불가해한 무언갈 맞닥뜨린 표정이 되었다.

도현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없었다.

그건 첫 만남부터 깊은 울림을 주었던 형을 제외하곤 모두에게 적용되는 당연한 명제였다.

울어도, 웃어도, 화내도, 빌어도.

날이 지나면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갔고 도현은 병원에 남았다. 그뿐이었다.

그뿐이었는데….

도현은 이 순간, 완전한 영혼이 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처음으로 깊이 실감했다.

울고 소리치지 않아도. 눈에 띄게 굴지 않아도. 자그마한 행동의 변화만으로도… 관심을 가진다. 알아봐 준다.

도현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집어넣고선, 잘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살짝 젖은 눈동자가 진과 니콜라스를 차례로 향했다.

“진, 니콜라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형에게 사과할 때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간절한 눈동자로 둘을 쳐다보았다.

도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동자는 두 아이의 마음을 몽실몽실하게 풀어주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도현이 다시 한번 사과의 말을 올리기 전에 니콜라스가 선수를 쳤다.

“그래. 또 그러지 마라. 다음에 그러면 절교야, 너.”

도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끝이야?”

“그럼?”

니콜라스가 헹, 코웃음을 쳤다. 도현이 진을 바라보자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과 받아줄게.”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자 도현이 의아함과 불안함을 숨기지 못한 채 물었다.

“왜 용서해 주는 거야?”

도현의 말에 니콜라스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다.

“난 네가 재수 없는 거 처음부터 알아봤어. 진은 얼굴만 봐서 몰랐겠지만! 재수 없는 애가 재수 없게 행동한 거지 뭐.”

도현의 얼굴이 조금 충격으로 물들자,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진이 빠르게 끼어들었다.

“니키가 괜히 저렇게 말하는 거야. 그리고 용서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친구니까 그런 거지!”

둘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미안…. 진짜 미안해.”

“괜찮아! 것보다. 그럼 이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나는 도현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줄 알았어. 그래서 조금 무서웠다? 니콜라스는 인터넷에 빙의도 검색해 본 거 알아?”

“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너 그랬잖아! 내가 검색 기록 다 봤어!”

진과 니콜라스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도현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선 말했다.

“연기 연습한 거야.”

“…뭐?”

니콜라스와 진이 싸우던 것도 멈추고 도현을 쳐다보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이유라, 얼굴을 조금 더 발갛게 물들인 도현이 조금 빠르게 말을 이었다.

“지난주에 일종의 오디션 같은 게 있었거든. 그래서 짧은 시간 내에 캐릭터랑 나를 동일시하기 위해서 연습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점점 몰입하게 돼서….”

도현이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진과 니콜라스가 황당하다는 눈빛을 띠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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