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0)화 (31/582)

제30화. 투쟁 (10)

“그니까…. 지난주에 그 행동들이 다 연기라고? 허어….”

진이 길게 탄식했다.

니콜라스와 진은 한참이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둘을 보던 도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

“어, 으음….”

진이 착잡한 눈빛을 띠었다.

“너무 예상치 못한 이유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진이 허허롭게 웃다가,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래. 뭐, 누구 생각처럼 빙의가 아닌 게 어디야! 사실 나 니키 검색 기록 보고 엑소시즘까지 검색해 봤거든. 이제야 이해가 되네. 그래서 다른 사람처럼 보였구나!”

진은 납득하다 못해 신기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오디션은 합격했냐?”

니콜라스가 툭 던진 질문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진짜? 진짜 합격했다고?”

“응.”

니콜라스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지었다. 그래서 도현은 잘못한 죄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진짜 신기하다! 그런 우연이 다 있구나.”

소설 같은 이야기에 두 사람은 눈을 빛내며 흥분했다.

“그…. 미안.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연습이라고 해도 주변 사람을 생각했어야 하는데….”

벌써 열 번째 나온 도현의 사과에 진과 니콜라스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니콜라스가 멈칫했다. 큼. 괜히 목을 가다듬은 니콜라스가 태연히 물었다.

“많이 미안하냐?”

“응….”

“정 미안하면 집에 초대하든가.”

“초대?”

“…그, 수영장도 쓸 수 있으면 좋고?”

진이 니콜라스를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흘겨봤다.

그러자 어깨를 움찔한 니콜라스가 괜히 버럭- 크게 말했다.

“아, 아니! 쟨 내 집에 온 적 있는데 나는 없잖아! 이건 불공평해!”

“어휴, 저 수영 바보.”

진이 입으론 니콜라스를 탓하면서도, 은근히 기대가 서린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진도 도현의 집에 놀러 가고 싶었던 탓이었다.

두 쌍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차마 이기지 못한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아싸! 수영한다!”

“우왓! 도현이 집에 놀러 간다!”

두 사람이 동시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과하게 좋아하는 둘의 반응에 도현은 조금 얼떨떨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초대할 걸 그랬나.’

그렇게 답지 않은 생각을 할 정도로.

* * *

“오셨어요?”

도현이 하교를 따로 하기 시작한 이후로, 서혜나는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돌아온 서혜나를 반긴 도현이 조금 쭈뼛거렸다.

그 모습에 서혜나가 의아해할 무렵.

“죄송해요.”

“어?”

갑작스러운 도현의 사과에 서혜나의 눈이 커졌다.

이미 한 번 경험해서 그런가, 말은 어렵지 않게 술술 나왔다.

“연기 연습 때문에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아서요. 말도 없이 그렇게 행동해서 많이 놀라셨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아….”

사실 도현은 이게 자신의 착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과도하게 생각하는 것이거나.

서혜나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건 스치듯 흘려들은 한마디가 전부였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도현이 의연한 표정으로 서혜나를 보았다. 진과 니콜라스에게 한 것과 달리, 겉치레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리고.

서혜나의 얼굴에 당황이 잦아들고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

“네?”

“엄마 기분을 신경 써준 거잖아. 기특하다, 우리 아들.”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서혜나가 가방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요새 눈치 보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귀엽다는 눈빛으로 도현을 보던 서혜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물론 걱정이 되긴 했는데… 도현이가 이렇게 먼저 말해주니까 다 상관없게 느껴지네. 오늘 외식할까?”

눈에 띄게 기분이 업된 서혜나가 신이 나서 물었다. 도현은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바로 준비하고 나와. 아, 참! 그 전에 아빠랑 통화 좀 해줄래? 아빠도 걱정 많이 하셨거든.”

서혜나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번호를 누르고 도현의 앞에 내밀었다. 빤히 핸드폰을 보던 도현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엄마한테 말한 것처럼 말해주면 아빠가 엄청 좋아하실 거야. 그래 줄 수 있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도현은 순순히 대답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날, 외식하고 돌아와서 잠들 때까지 서혜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 * *

드륵-

힘차게 문을 연 도현이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와 같이 사방에서 아침 인사 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에게 적당한 대답을 돌려주며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안녕!”

“좋은 아침.”

진이 높게 묶은 금발 머리를 흔들며 인사했고 주변에 있는 애들과 낄낄거리며 떠들던 니콜라스가 손을 휘적였다.

“응, 좋은 아침.”

그가 알던 아침이 돌아왔다.

그에 도현은 기이할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안심한 도현이 미소 지었다.

그랬는데….

“미안! 나 옆 반 친구랑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나는 화장실 좀.”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마다 자꾸 쪽지를 보내며 쑥덕이던 진과 니콜라스는 점심을 먹고 반에 돌아오자마자 자리를 비웠다.

도현이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피하는 건….

‘아니야. 아닐 거야.’

도현은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수업 시간에 둘이 쪽지를 나눈 건 할 말이 있어서고 쉬는 시간에 자리를 비운 건 딱히 의도한 게 아닐 거다.

아닐 거다….

…아니겠지?

아닌 게 아니면?

도현의 얼굴에 점점 먹구름이 끼었다. 수심에 찬 표정으로 한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톡.

도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토독.

의아함을 담은 시선이 창문에 닿았다.

톡!

작은 돌멩이가 창문을 맞고 떨어졌다.

‘뭐지?’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촤르륵! 창문을 단번에 열어젖히자, 방금까지 도현의 상상 속에서 ‘미안…. 이제 너랑은 친구 하기 싫어’라고 말하며 쓸쓸히 멀어지던 두 사람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무슨….”

도현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화아악!

꽃비가 내렸다.

도현은 제 머리에 붙은 꽃을 떼어 냈다. 파스슥. 꽃에 대롱대롱 달려 있던 흙이 바스러지며 떨어져 내렸다.

진이 사인펜으로 얼기설기 그린 초 하나를 꽂은 파이를 불쑥 내밀었다.

“합격 축하해!”

“어, 어?”

“빨리 불어!”

도현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운동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도현이 새빨개졌다.

“저, 저기 얘들아….”

“빨리! 초 꺼지기 전에 얼른!”

종이로 된 초가 바람에 팔랑였다.

도망칠 구석이 없음을 깨달은 도현이 부끄러움에 눈을 꾹 감으며 후 입김을 불었다.

타이밍 맞춰 니콜라스가 빨갛게 칠한 불 모양을 똑 떼어 냈다.

“와아아!”

“축하한다, 짜식아!”

진과 니콜라스가 호들갑을 떨었다. 니콜라스가 땅에 수북이 쌓은 꽃을 주섬주섬 줍더니 도현의 머리 위로 뿌렸다.

도현은 꼼짝없이 다시 한번 꽃비를 맞아야 했다. 눈에 들어간 흙은 덤이었다.

따가움에 눈이 붉게 달아오르자, 니콜라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흐흠! 울 정도로 감동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무어라 부정하려던 도현이 결국 풋, 웃음을 터트렸다.

한번 터진 웃음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푸하하! 보는 사람마저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청량하게 웃는 도현에 니콜라스와 진이 뿌듯함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니, 한 번 더 해줄 수 있….”

“더 하긴 뭘 더 해, 이 악동들아!”

“으학!”

니콜라스가 깜짝 놀라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흉흉한 기세로 서 있는 교장 선생님이 있었다.

“그동안 얌전하다 했지! 내가, 내가 얼마나 아끼던 꽃들인데 그걸…!”

교장 선생님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진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교장 선생님. 비록 꽃은… 먼 곳으로 갔지만, 모두에게 웃음을 남기고 갔으니 충분히 의미 있는 생이었어요.”

그러고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팔을 뻗어 팔뚝을 토닥였다. 그 뻔뻔함에 그가 입을 턱 벌렸다.

어이없는 상황에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있는데 니콜라스가 한술 더 떴다.

“깜짝 놀랐네. 꽃쯤이야 새로 심으면 되잖아요?”

태연히 지껄인다는 게 되바라진 소리였다.

“이, 이….”

“이?”

“이 자식들아! 너희 다 교내 봉사야! 따라와!”

“으어! 아파요!”

교장 선생님이 둘의 귀를 잡고 끌었다. 두 사람은 바둥대면서 질질 끌려갔다.

도현이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고개를 든 니콜라스가 아련히 외쳤다.

“파이 꼭 먹어…! 꽃도 선물이야!”

“선물은 무슨 선물!”

세 사람이 무수한 시선 속에서 멀어지고, 혼자 남은 도현에게 시선이 한 번에 쏟아져 내렸다.

탁!

도현이 황급히 창문을 닫고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파이를 한쪽에 모셔놓고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는데, 머리에서 꽃 하나가 책상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푸, 푸흐….”

도현이 입을 막았다. 뿌리조차 다듬지 않은 꽃을 볼 때마다 뺨이 바들바들 떨렸다.

“푸크큭, 흐흑.”

결국 도현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흐느꼈다.

어느새 아까 했던 걱정들은 모두 잊어버린 채였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 * *

“한번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어! 이건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일이야!”

진이 헛소릴 하며 투덜거렸다.

“좀 눈에 안 띄는 곳에서 뿌릴걸.”

니콜라스는 어리석은 자신을 탓하며 나름의 반성(?)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도현은 화단의 흙을 열심히 파헤치고 있었다.

“자, 여기 하나 심어.”

“예에~”

니콜라스가 꽃 한 송이를 구덩이에 쑥 집어넣었다. 그러고선 설렁설렁 흙을 덮었다.

“제대로! 정성스럽게 해!”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감시하던 교장 선생님의 지적이 곧바로 날아왔다.

“하하!”

“…넌 혼나는 게 즐거워?”

“웃긴 걸 어떡해.”

니콜라스가 도현을 괴상하다는 듯이 보았다.

니콜라스와 진이 화단의 꽃을 파헤친 사고를 친 후.

다행인지 불행인지, 꽃을 꺾은 게 아니라 뿌리째 뽑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꽃을 전부 주워서 다시 심는 벌을 받게 되었다.

‘벌이 아니라 수습에 가깝지만.’

그리고 도현은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꽃을 줍는 둘을 보고 기꺼이 자원했다.

그리하여 지금이었다.

도현이 웃음을 삼키며 새로운 구덩이를 팠다.

“그래도 나름 재밌지 않아?”

“재밌긴 무슨. 열심히 파헤친 걸 도로 덮는 게 무슨 재미야.”

니콜라스가 한숨을 쉬었다. 도현은 니콜라스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보다 나 어제 엄마한테 허락 맡았어.”

“허락?”

“응. 집에 놀러 오고 싶다며.”

“아!”

니콜라스의 얼굴이 확 펴졌다.

“진짜? 오늘 가도 돼?”

“아마 될 거야. 언제든 상관없다고 하셨거든.”

“그럼 나 오늘 갈래!”

도현이 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진, 너도 오늘 괜찮아?”

“시간이야 차고 넘치지! 아. 그러면 오늘 가는 김에 음악 수행 평가도 조금만 준비할래?”

“그럴까?”

세 사람이 오늘 도현의 집에 놀러 가서 무엇을 할지 재잘재잘 떠드는 순간이었다.

“헤이~ 줄리엣, 안녕! 로미오는 어디 있어?”

지나가던 모르는 선배 무리가 짓궂게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도현이 입을 딱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흐학! 아. 이건 들을 때마다 웃겨!”

니콜라스가 배를 부여잡고 뒤로 넘어갔다.

점심시간에 있었던 소동 이후.

많은 이들 앞에서 창가에 고개를 내민 채 꽃비를 맞은 도현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붙었다.

당사자가 흙이 눈에 들어가 따갑든 말든 창틀에 팔을 괴고 꽃비를 맞는 도현의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던 게 문제였다.

“오! 로미오! 나를 위해 꽃을 따다 주다니! 로미오! 당신의 이름은 왜 로미오인가요!”

희극조로 대사를 친 선배가 낄낄대며 지나갔다.

도현이 빨개진 얼굴로 한숨을 삼켰다.

…이건 별로 재밌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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