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투쟁 (11)
도현은 어색한 기분으로 소파에 앉아 친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원래 바로 스쿨버스를 같이 타고 도현의 집으로 오려고 했지만, 꽃 심기 노동을 한 탓에 누구 하나랄 것 없이 모두 꾀죄죄한 몰골이 되어 각자 집에서 씻고 만나기로 했다.
도현은 깨끗해진 몸에 개운함을 느끼며 아까 했던 전화를 떠올렸다.
- 뭐? 지금 온다고…? 하, 오늘 그만 돌아가야…!
친구를 데려오겠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혜나는 곧바로 달려오려고 했다.
당장 회사 일을 때려치우고 나오겠다는 걸 도현이 간신히 말려야 했다. 희미하게 대표님을 부르짖는 처절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띵-동.
경쾌한 벨 소리가 울렸다.
도현은 인터폰으로 열기보다는 직접 밖으로 나와 대문을 열어주었다.
“안녕! 자아. 이건 선물!”
“수영장! 수영장은 어디 있어? 응?”
진이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과자 보따리를 도현의 품에 넘겨주었고, 니콜라스는 꼬리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쟤들은 내가 안 보이나 봐….”
도현은 뒤에서 홀로 남아 허탈한 표정을 짓는 나르샤에게 어색히 웃어 보였다. 나르샤는 곧 호탕히 웃은 후 이따 데리러 오겠단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도현은 나르샤를 배웅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수영장 앞에 선 니콜라스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뛰어들고 싶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에 진이 니콜라스의 목덜미를 질질 끌고 왔다.
“우리 합주곡 악보부터 정하기로 했잖아! 수영은 이따가!”
그게 꼭 말 안 듣는 덩치 큰 강아지와 주인의 모습 같아서 도현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키득키득-
아이같이 웃는 도현의 웃음소리에 진도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악보 몇 개 뽑아 왔으니까 어떤 버전으로 할지 골라보자. 아, 도현아. 집에 누구 계셔?”
“아니. 엄마는 회사 가셨어.”
“으음. 그렇구나! 아쉽다.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서혜나가 들었다면 안타까움에 몸부림쳤을 말이었다.
도현이 앞장서고, 진과 니콜라스가 그 뒤를 따랐다.
“실례합니다아~”
텅 빈 집이었지만, 조심스럽게 인사를 한 진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어, 니콜라스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와! 집 되게 예쁘다!”
“우와아….”
도현의 집 안에 들어선 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기도 넓었는데, 무슨 가구 잡지에 나오는 집처럼 완벽하게 꾸며져 있는 집은 상당히 감각적이면서 세련됐다.
서혜나와 이장혁이 패션 업계에 종사하는 만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덕이었다.
“도현이 네 방은 어디야?”
“이 층으로 가야 해.”
“빨리 가자!”
신이 난 진이 도현을 재촉했다. 친구가 집에 놀러 온 게 처음인 도현도 조금 상기된 뺨으로 앞장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베이지 계열의 따뜻한 톤으로 꾸며져 있던 일 층과 다르게, 푸른 계열로 깔끔하게 꾸며진 이 층의 모습에 진과 니콜라스가 한 번 더 감탄사를 터트렸다.
자신의 방 앞에 선 도현이 조금 쭈뼛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엄청 깨끗하다!”
“그러게. 너랑 다르게.”
니콜라스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의아해하는 도현을 본 니콜라스가 진의 비밀을 폭로했다.
“얘 엄청 더러워! 방 보면 진짜 난리도 아냐. 난 처음에 무슨 폭탄 떨어진 줄 알았어. 물건은 어떻게 찾나 몰라!”
“쯧쯧. 그 무질서함 속에 나름의 질서가 있단다.”
진이 태연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니콜라스의 표정이 어이없다는 듯이 변했다.
무질서 속의 질서를 어지러운 현대 사회와 결부시켜 일장 연설을 펼치던 진은 한쪽 구석에 놓인 가방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저거 바이올린 가방 아니야?”
음악 평론가인 아버지를 둔 만큼 다양한 악기에 익숙한 진은 가방의 정체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진의 말에 도현의 얼굴에 낭패라는 듯한 기색이 서렸다.
도현의 표정을 보지 못한 진이 가방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가방을 요리조리 살펴보던 진이 다시 한번 외쳤다.
“맞네! 바이올린!”
진이 도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도현아, 너 바이올린 켤 줄 알아?”
“뭐야. 그럼 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없다고 했어?”
진과 니콜라스의 물음에 도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혹시 잘 못 켜서 그런 거야? 쉬운 거 하면 되니까 못 켜도 괜찮은데! 나는 기타 치고, 니콜라스는 피아노 치는데 혼자 리코더 불면 조금 심심하잖아.”
“리코더 불면 많이 이상할까?”
“어? 아니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그냥 바이올린 연주할 수 있으면 바이올린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해봤어.”
진이 황급히 부정했지만, 어두워진 안색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도현을 보던 니콜라스가 생각했다.
‘대체 얼마나 못하길래 저러지?’
니콜라스에게 있어서 도현은 뭐든지 척척- 다 해내는 신기한 아이였다. 오늘도 요령이 생긴 도현은 금방금방 흙을 파내어 꽃을 단단히 심었고 덕분에 빨리 풀려날 수 있었다.
물론, 체육은 조금 못하는 것 같긴 했지만….
체육 외의 것을 못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더욱 궁금했다.
니콜라스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한번 연주해 보면 안 돼? 못해도 안 놀릴게.”
“아냐. 도현은 잘하는 게 많으니까 바이올린 정도는 못 켜도 돼.”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주는 진의 말에 도현이 안심하며 숨을 돌리는데 진이 불시에 기습했다.
“근데 듣고 싶긴 하다.”
옳소! 니콜라스가 맞장구쳤고 도현이 난감해했다.
“못해도 괜찮아. 줄리엣은 우리 조의 비주얼 담당인걸?”
“맞아. 자신감을 가져, 줄리엣.”
물론 도현이 연주를 꺼리는 건 자신감 문제가 아니었지만, 딱히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켤 줄 모른다고 해도 믿을 기세가 아니었다. 애초에 켤 줄 모르는 바이올린이 방 한구석에 고이 모셔져 있는 것도 이상했다.
망설이는 도현을 눈치챈 진과 니콜라스가 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한 번만! 한 번만. 응?”
“나도 듣고 싶어!”
“응?”
“응? 응?”
두 마리의 비글이 도현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눈을 빛냈다.
물론 각자의 속내는 조금 달랐다.
‘여기서 바이올린까지 잘 켜면 완전 사기야!’
이건 니콜라스의 속마음이었고.
‘바이올린 연주하는 도현! 사진, 사진 찍어야 하는데! 물어보면 허락해 주려나? 몰래 찍어야 할까?’
이건 진의 속마음이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은 지금만큼은 하나가 되어 도현이를 졸랐다.
한편, 도현은 눈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싫다고 단호하게 말해야 하는데, 말간 두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 마음이 약해졌다.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지던 오후에, 꽃비를 뿌리던 환한 얼굴이 자꾸 어른거렸다.
도현이 심지 않고 몰래 가져와 화병에 꽂아둔 분홍색 꽃 한 송이를 보았다.
한 번이면….
한 번이면 괜찮지 않을까?
도현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니까 이건, 꽃의 답례 같은 거였다. 받고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
도현은 이런저런 이유를 열심히 만들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꽤 그럴싸한 생각 같았다.
“이번 한 번만. 딱 이번 한 번만이야.”
“응! 딱 한 번! 약속!”
한 번이니까 괜찮을 거야. 마음 한구석 불편함을 몰아내기 위해 도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능숙하게 바이올린을 집어 드는 도현을 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기대에 차 있었다.
스윽, 슥.
도현이 거침없이 바이올린을 손질했다. 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니콜라스는 그저 휙휙 움직일 때마다 팽팽해지는 줄을 보고 신기해했지만, 진이 볼 때 정확하게 움직이는 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합 전 몸을 푸는 선수처럼 도현이 손목을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간단한 동작이 우아했다.
진은 직감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작게 쪼그려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작은 얼굴들을 본 도현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 * *
수천, 수만 번 가로질렀던 궤적을 따라 팔이 움직였다.
Allegro.
빠르고 활기차게.
경쾌한 선율이 울려 퍼지고, 하얀 이불을 덮고 있던 작은 것들이 하나씩 기지개를 폈다.
생명력으로 가득 찬 기운이 멀리 퍼져 나갔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늦장을 부리던 조그만 새싹도 고개를 들고.
이어지는 바이올린의 산뜻한 트릴.
나뭇가지 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작은 새들이 맑은 종소리를 울려대며 노래했다.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던 찰나.
찰랑. 찰랑.
어디선가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머릿속에 저절로 밝고 평화로운 풍경이 그려졌다.
새들이 지저귀고, 옆에는 맑은 샘물이 흐르는 풀숲을 맨발로 거니는 것 같은 기분에 진과 니콜라스의 얼굴에 평화로운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장조로 흐르던 음악이 단조로 바뀌었다.
화창하기만 했던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 앉아서 노래하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끊기고, 연이은 셋잇단음표가 불러온 강렬한 연주가 천둥과 번개가 되어 샘물이 흐르는 소리를 집어삼켰다.
쏴아아- 쏴아-
초록빛이 뒤덮인 땅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겨우내 얼어 있던 것들이 빗물에 씻겨 녹아내렸다.
얼마나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까.
빗소리가 서서히 멎고, 짙은 먹구름이 밝은 햇살을 못 이겨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다.
푸른빛을 되찾은 하늘 위에 유유히 떠 있는 태양이 대지를 노랗게 비췄다.
다시 돌아온 새들이 전보다 더 아름답게 노래하고-
봄이 찾아왔다.
* * *
연주를 마친 도현이 바이올린에 기댔던 고개를 바로 세웠다.
도현이 멍한 표정으로 활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연주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본능처럼 몸이 움직였다. 그건 신체가 아니라 영혼에 새겨진 기록이었다.
활이 현 위를 유영하던 순간 더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도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 감각의 주인은….
“…미쳤어!”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흥분과 떨림으로 달아오른 진이 보였다.
“미쳤어! 완전히 미쳤어!”
진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진의 소란에 갓 여운에서 벗어난 니콜라스가 괴물을 보듯이 도현을 보았다.
음악을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귀가 달린 이상 도현이 보인 연주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리코더를 한다고 한 거야?’
원래도 그랬지만 니콜라스는 도통 도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잘하는 게 있으면 자랑하고 싶지 않나?
도현은 오히려 드러내기를 꺼리는 기색이었다.
이번 일뿐만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도현은 굳이 자랑하지 않았다. 니콜라스 입장에선 바보 같은 일이었다.
‘뭐….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니콜라스가 도현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잘 들었다.”
도현이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도현을 보던 니콜라스가 생각했다.
…집에 가면 클래식이나 들을까?
그때였다.
진이 손뼉을 짝! 치며 주의를 끌었다.
“나 엄청 좋은 생각이 났어!”
진은 아까부터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영감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긴 상태였다.
진이 생각하기에 이건 운명이었다. 음악의 신이 길을 보여준 것이다! 만점으로 향하는 길을!
“도현!”
진이 고개를 홱 돌렸다.
“수행 평가에서 바이올린 하자! 부탁이야!”
“이번 한 번만이라고 했잖아.”
도현이 거절의 뜻을 내비치자 진이 시무룩해졌다.
“내가 죽여주는 영감이 떠올랐거든. 진짜 죽여주는데….”
진짠데. 정말인데.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모습에 도현이 손을 움찔했다.
‘무슨 계획인지 정도는 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진에게 홀랑 낚인 도현이 한번 들어 보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진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잘 생각했어! 내가 장담할게! 우린 델마 아카데미의 전설이 될 수 있어!”
…꼭 전설이 돼야 할까?
도현이 합리적인 의문을 떠올리는데, 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내 계획이 뭐냐면 말이야….”
화단을 파헤치기 전에 지었던 미소와 정확히 동일한 미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