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3)화 (34/582)

제33화. 투쟁 (13)

“그 빛무리랑 오늘 본 게 연관이 있는 건가요?”

【그래. 본질은 결국 같거든. 세상은 결국 단 하나의 흐름으로 묶여 있어. 나는 그걸 순리라고 부르지. 순리는 어디에나 있어.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도, 땅에서 굴러다니는 돌도, 지금 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너도 모두 순리로 이루어져 있어. 그리고 이 순리를 이행하는 게 동양사상을 빗대어 말하면 ‘기’의 개념과 조금 비슷해.】

“비슷하다면 결국 다르다는 것 아닌가요?”

【인간이 정립한 개념으로 이게 설명할 수 있는 한계니까. 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 수 없어. 그건 순리에 어긋나거든.】

비현실적인 일들은 이미 충분히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뇌가 이야기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도현은 애써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전에 모든 생명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영혼도 결국 순리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말은 즉 영혼을 구성하는 요소가 바로 ‘기’라는 거야. 기는 아무것도 아님과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유일한 개념이다. 온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는 ‘기’가 순리대로 모이면 그것이 영혼이 되고 색과 형상, 의미를 갖게 되지. 그리고 영혼이라는 성질을 잃으면 ‘기’ 그 자체가 되어 흩어지는 거야.】

도현이 천천히 그 의미를 곱씹었다. 순리, 영혼, 기. 온통 낯선 단어 투성이였다.

【네 영혼이 불완전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말 그대로 네 영혼에 미세한 흠이 있기 때문이었다. 흠이 있기에 기가 제대로 뭉치지 못하고 자꾸만 흩어지려 하니, 몸이 무너지는 게 당연하지.】

“왜 제 영혼에 흠이 있었던 걸까요?”

【세상에 완벽한 건 없으니까. 순리마저도.】

굉장히 불공평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도현은 이것에 대해 생각하면 끝이 없을 거란 걸 알기에 생각을 끊어냈다.

“그럼 제가 오늘 본 게 ‘기’라는 건가요?”

【그래. 정확히는, 물에 깃들어 있는 ‘기’였지. 너는 그 기가 순리대로 흘러가는 모습을 본 거야. 사실상, 불가능한 일을 해낸 거지.】

“네?”

【완전한 영혼을 타고난 존재들은 기를 볼 수 없어. 애초에 순리를 눈으로 본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당연한 얘기야. 넌 네 몸속에 있는 장기를 보고 느낄 수 있어?】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장기가 이상을 호소하기 전에는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게 정상이지. 기도 같아. 완전한 영혼을 가진 존재들은 완전하기에 그것을 보고 느낄 일이 없어. 너는 불완전한 영혼을 타고났고, 그 흠을 통해 기의 존재를 무의식중에 깨달은 데다가, 너와 같은 불완전한 영혼을 지녔던 정희성과 만나 공명한 덕에 그것을 선명히 인식할 수 있게 된 거지.】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아무리 너라고 해도 순리를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럼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어요?”

【집중해야지.】

“…그게 끝이에요?”

【그럼 뭘 더 바라는데?】

도현은 떫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보는 것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말에 도현이 조금 흥미를 보였다.

“예를 들면요?”

【나도 몰라. 네가 알아내야지. 나는 네가 해낸 것 이상의 것을 알 수 없어.】

“…아, 네.”

【뭐야! 그 시시한 반응은!】

도현은 덩어리의 투덜거림을 흘려 넘기며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보는 것 이상의 것…. 그게 대체 뭘까?

보는 것만으로도 헤엄치는 법을 익혔는데,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게 대체 뭘까?

【이 또한 결국 순리대로 일어난 일. 네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쓰는 것도, 그저 묻어두고 가는 것도 모두 네 선택에 달려 있다.】

내 선택. 도현이 덩어리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잠깐 생각에 빠진 듯 멍하니 있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덩어리 님. 설명해 줘서 고마워요.”

【난 애프터서비스까지 완벽한 덩어리거든.】

거들먹거리는 덩어리의 말투에 도현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병원에서 봤을 땐 왜 몰랐을까. 이렇게 따뜻한 덩어리 님인데. 말투가 정겨운 건 아니지만, 항상 도현에게 도움이 되어주려고 애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고마워요.”

【감사 인사는 됐다.】

덩어리의 몸체가 점차 흐려졌다.

덩어리는 사라지기 전, 도현의 영혼을 샅샅이 살폈다.

‘…그래도 전보단 좋아진 것 같네.’

어쩌면, 그가 이 작은 인간을 떠나야 할 순간이 조금 더 빠르게 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 *

덩어리가 다녀간 후.

도현은 한동안 ‘기’에 대한 생각으로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다시 한번 그때의 감각을 되살려 보고자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알 듯 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감각에 애가 타길 며칠.

이것이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닫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어차피 지금 생각해서 답을 찾을 수 없다면 너무 고민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한 도현은 풀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리고 있기보다 눈앞에 놓인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현재.

사방이 전신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도현이 고개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도현이 연기를 하겠다고 선언한 후, 서혜나가 무서운 추진력으로 만들어준 도현의 연습실이었다.

벽면이 모두 거울로 되어 있었고, 책을 꽂을 수 있는 책장과 물건을 놓을 수 있는 수납장, 배고플 때 꺼내 먹을 수 있는 냉장고와 촬영한 후 돌려 볼 수 있는 전문가용 카메라 한 대까지 놓인 연습실이었다.

‘씬 60. 이 부분을 다시…’

도현이 다시 연기 연습에 몰입하려는 순간.

띠링-

서랍장 위에 놓인 핸드폰에서 경쾌한 알람 소리가 울렸다. 도현이 핸드폰을 들어 올려 메시지를 확인했다.

[리암 호프 : 이사야 오디션]

[리암 호프 : 보러 올 생각 있냐?]

메시지를 확인한 도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도현이 황급히 타자를 눌렀다.

[보러 가고 싶어요.]

[보러 갈래요.]

[리암 호프 : 토요일 오후 2시. 센트럴 타워 301호.]

[혹시 준비해야 할 건 없나요?]

[리암 호프 : 그냥 몸만 와라.]

[네. 토요일에 봐요.]

화면이 꺼진 액정을 본 도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됐다.

‘오디션 참관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기회에 가슴이 떨렸다.

첫 영화.

자신과 합을 맞출 상대 배우를 만나게 되는 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 * *

기다리던 날이 밝았다.

“잘하고 와, 우리 아들!”

서혜나의 응원에 도현이 차 문을 열고 나가다 말고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네. 잘할게요.”

“너무 긴장하진 말고. 끝나면 엄마한테 전화해. 알겠지?”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검은색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다가 도현은 작게 심호흡을 한 후 빌딩 안으로 쏙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너무 일찍 도착할 것 같아 괜히 계단을 타고 올랐다.

301호 앞에 선 도현이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내리눌렀다.

똑똑-

도현이 문을 두드리고.

철컥.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곰 같은 덩치의 남자가 아닌, 윤기가 흐르는 레드 브라운 색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세팅한 여성의 모습에 당황하여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잘못 찾아왔나?’

도현이 문에 적힌 호수를 곁눈질하는데, 순해 보이는 눈꼬리를 접은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도현 배우 맞죠? 만나서 반가워요. 로잔나 쉴즈예요.”

도현은 친근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오는 로잔나에 고개를 갸웃했다.

로잔나가 짧은 탄성을 뱉었다.

“혹시 리암이 제 얘기를 안 해줬나요?”

“네.”

“이런…. 당황스러웠겠네요. 다시 소개할게요. 이번 영화의 보조 감독이자, 의상, 소품 담당이자, 조명 감독, 촬영 보조를 맡았어요. 슈퍼맨이죠.”

유쾌한 어조로 말한 로잔나가 미소 지었다.

로잔나의 농담에 긴장이 풀린 도현이 마주 웃으며 로잔나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유 역할을 맡은 이도현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로잔나.”

“도현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리암이 그렇게 보여도 보는 눈은 확실한 사람이거든요. 영화판에서 오래 일한 대배우를 보고도 그렇게 극찬한 적이 없었는데, 도현을 완전히 신봉하더군요. 덕분에 제가 호기심이 생겨 이 영화에 참여하게 되었지만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현의 반응을 본 로잔나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저 많이 기대하고 있는데, 계속 기대해도 괜찮죠?”

어떻게 보면 도전적으로까지 들리는 말에 위축될 법도 하건만, 도현은 그런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로잔나는 작게 감탄했다.

오랫동안 영화계에서 일한 만큼 많은 배우들을 만나왔고 그중에서는 아역 배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경험상 아역 배우는 보통 두 가지 타입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자신을 아역 배우라고 여기는 타입과 배우라고 여기는 타입.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상대에서 신뢰를 주는 도현의 태도는 단연코 후자였다.

로잔나는 흡족한 내심을 숨기며 말했다.

“그럼 들어갈까요? 안에서 리암이 프로필을 보고 있거든요. 도현도 오디션이 시작되기 전에 프로필을 한번 봤으면 하는데. 괜찮죠?”

“네, 물론이죠.”

로잔나를 따라 방에 들어오니, 앉아서 종이를 유심하게 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도현은 그 사람이 리암이라는 것을 한 박자 느리게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퀭한 폐인 같았던 몰골은 어디로 가고,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멀끔한 남성이 거기에 있었다.

리암이 고개를 슬쩍 들어 도현을 보았다.

“어. 왔냐?”

“네. 왔어요.”

짧고 삭막한 인사가 오가고.

자리에 앉은 도현이 자신의 앞에 놓인 프로필 용지를 보았다.

“일 차 서류 심사, 이 차 영상 심사에 합격한 지원자들이다.”

두 번이나 걸러졌는데도, 지원자 수가 상당했다.

‘원래 이렇게 경쟁률이 치열한가?’

도현이 의문을 품는데, 그 기색을 눈치챈 로잔나가 설명해 주었다.

“리암이 도현을 보고 감명받아서 이번에 일반인들을 상대로까지 지원 영역을 넓혔거든요. 그래서 지원자들이 좀 많이 몰렸어요. 그것도 원래 숫자의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거예요.”

“10분의 1이요?”

도현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프로필을 천천히 읽어보는데, 경력란이 채워진 사람들도 있는 반면, 텅 빈 사람들도 많았다.

‘나처럼 처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그 사실이 괜히 도현을 설레게 했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유심히 살펴보는데.

“음…?”

단정하게 내린 앞머리와 깔끔한 옷차림을 한 십 대 초중반의 아이.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자, 도현은 결국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프로필을 다 외웠을 때 즈음.

“이제 다들 대기실에 모여 있겠네요.”

로잔나의 말에 도현이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55분.

5분 후면 오디션이 시작된다.

설레 하고 있는 도현에게 리암이 말했다.

“프로필마다 평가란 있지? 거기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쓰면 돼.”

리암의 말뜻을 이해한 도현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도 평가를 하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널 왜 불렀겠어? 네가 같이 호흡을 맞출 상대 배우니까, 신중하게 써라. 물론 이렇게 말 안 해도 잘하겠지만 말이다.”

서프라이즈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벅찬 떨림과 동시에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던 도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필 용지를 떨리는 눈으로 보는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가슴팍에 STAFF 라는 명찰을 단 사람이 몸을 쑥 내밀었다.

“2분 후, 1번 지원자부터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스태프의 말에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고.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2분이 지난 후.

똑똑-

끼익!

“안녕하세요! 할리 하펜입니다!”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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