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투쟁 (14)
“맥! 맥! 얘, 얼른 내려와서 일 좀 도와!”
맥이 거칠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틀어막았다.
“맥! 얘는 왜 대답이 없어. 맥!”
“에이씨.”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높게 째지는 목소리가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낡고 오래된 핸드폰 화면에서 한 젊은 남성이 의미 없이 말을 흘렸다. 거친 손길로 종료 버튼을 누른 맥이 점퍼에 핸드폰을 구겨 넣고 방을 나왔다.
위층에서 어슬렁어슬렁 내려오는 맥을 본 케이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할 일도 많은데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대체 뭘 하는 거니. 엄마 힘들게 일하는 거 안 보여?”
“아, 알았어. 도우면 되잖아.”
맥이 밀가루 포대를 들어 올렸다. 묵직한 무게에 잠시 휘청거린 맥이 간신히 중심을 잡고 포대를 커다란 통에 들이부었다.
냉장고로 가서 미리 깨두었던 계란 흰자를 가져오는데, 채소를 씻던 케이시가 말했다.
“너 또 방에서 연기니 뭐니 이상한 거 했지?”
케이시의 말에 기분이 상한 맥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이상한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에 케이시가 혀를 쯧쯧 찼다.
“이상한 게 아니긴 무슨. 만날 장사는 돕지도 않고 방에 틀어박혀서 혼자 뭘 하는 건지. 엄마는 이 나이에 허리가 부서져라 일하고 있는데.”
신경을 거스르는 말투에 맥이 애써 화를 참아내며 말했다.
“그만해. 지금 하고 있잖아.”
“너 네가 그렇게 한다고 배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사람들은 다 타고나는 거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 어?”
또 시작했다.
지겨운 레퍼토리!
늘 듣는 말이니까 흘려 넘기면 되는데, 감정은 쉽사리 이성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답답함이 치고 올라왔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그의 몸을 꽁꽁 감싼 채 옥죄고 있는 것 같았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체념인지, 원망인지 모를 감정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엄마도 혼자 일하는 거 힘들어. 근데 너까지 이러면 엄만 어떡하니, 어? 꿈? 좋지. 좋은데,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꿈만 꾸면 뭐 하니? 꿈꾸다가 굶어 죽을 것도 아니고. 그냥 엄마 말 듣고 가게 일이나 배워.”
케이시도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남편이 공사장에서 사고로 죽고. 홀로 맥을 키우다 보니 꿈과 희망이 있었던 젊은 날은 아득히 멀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만 좀 하면 안 돼?”
“응?”
“그만 좀 해달라고. 매번 안 된다, 안 된다! 듣기 싫어 죽겠어!”
“얘가,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
케이시의 말이 멎었다.
간신히 울음을 참는 듯, 고집스럽게 뜬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내가 언제 엄마한테 뭐 해달라 했어? 그냥 나 좀 냅두라고. 그게 그렇게 힘들어?”
“엄마는 그러다 시간 낭비할까 봐 그러지. 배우 되는 게 어디 뭐 쉽니? 그렇다고 네가 스타성이 있기를 해, 재능이 있기를 해?”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왜 해보지도 않고 자꾸 무시하는데?”
“허! 그걸 내가 왜 몰라. 너 키운 게 나야. 내가 널 모르겠니?”
케이시가 애석한 표정으로 맥을 보았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지금 해보든가, 그 잘난 연긴지 뭔지. 어? 엄마가 너 재능 있나 없나 볼 테니까 여기서 해보라고.”
케이시의 말에 맥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케이시는 그에게 하나뿐인 가족이었지만, 동시에 끔찍한 악몽이었다.
문득 맥은 자신의 꿈을 조롱받는 이 상황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다.
손에 질척하게 묻은 반죽도.
주름이 짙게 그려진 엄마의 얼굴도.
녹이 슨 벽지도.
눅눅한 공기도.
모두 지겨웠다.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다.
벌떡-
하던 반죽도 내팽개치고 일어난 맥이 몸을 틀었다. 그러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을 뛰쳐나왔다.
“맥! 어디 가는 거야! 맥! 얘!”
뒤에서 맥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가게를 빠져나와 정신없이 달렸다. 공터에서 농구를 하던 친구들이 맥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야! 맥! 어디 가냐!”
농구에 빠지지 않던 맥이 본 척도 하지 않고 달려가는 것에 친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금세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공을 튀겼다.
허억- 헉-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골목에 들어서자, 그제야 달리던 것을 멈춘 맥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롯이 홀로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툭-
담벼락에 기댄 맥이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에 머리를 대고 한참이나 멍하니 있던 맥이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을 무작정 꺼내어 보니, 차가운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핸드폰 화면을 켠 맥은 습관적으로 자주 들어가던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슥슥-
까맣게 탄 눈으로 기계적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맥의 손이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독립 영화, 아역, 10세에서 16세 남아… 일반인 지원 가능.”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핸드폰 액정의 빛만을 반사하던 푸른 눈에, 작은 별빛이 차올랐다.
* * *
팔락-
도현이 프로필을 한 장 넘겼다.
똑똑-
이제는 익숙한 노크 소리가 들리고.
21번째 지원자를 맞이하려던 도현은 열 살 정도 된 소년 뒤로 보이는 한 중년 여성의 모습에 고개를 기울였다. 여성의 뒤에는 곤란한 표정의 스태프가 서 있었다.
“어머님! 들어가시면 곤란해요!”
“우리 애가 너무 어려서요. 옆에 서 있기만 할게요.”
스태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오디션장에 들어온 여성이 심사위원석에 앉은 리암과 로잔나를 보고 서글서글한 얼굴로 웃었다.
“우리 조셉 잘 부탁드릴게요. 조셉, 얘, 인사드려야지.”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슬쩍 들던 조셉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오….”
“하하. 우리 애가 평소엔 활발한데 지금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조셉. 엄마랑 같이 연습했잖아. 그대로 할 수 있지?”
“으응…. 엄마 나 무서워.”
“무섭긴 뭘. 준비한 대로만 하면 돼!”
오디션을 보러 와서 사담을 나누는 두 사람을 보던 리암과 로잔나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엄마의 손을 잡고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이마를 꾹꾹 누르던 리암이 결국 역정을 냈다.
“여기 오디션장입니다! 준비되지 않았다면 이만 나가 주세요!”
리암의 말에 조셉을 달래고 있던 여성이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애가 너무 긴장해서 그래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잘할 수 있어요. 그렇지, 조셉?”
“저는 배우를 뽑으려는 겁니다! 돌봐야 할 어린애가 아니라요! 이만 됐습니다. 볼 만큼 본 것 같네요. 이만 나가 주시죠.”
“뭐, 뭐요?! 말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심한 건 들어와서 오 분이나 그러고 있는 그쪽이고요!”
“아니, 허 참. 겨우 오 분 가지고…. 됐네요! 저도 우리 아들 이런 영화에 출연시키고 싶지 않네요! 겨우 무명 감독이….”
얼룩덜룩하게 붉어진 얼굴을 한 여성이 아이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리암은 거의 뒷목을 잡을 기세였다.
털썩-
의자에 몸을 기댄 리암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도현은 조금 유감스러운 기분으로 ‘조셉 알버튼’이라는 프로필에 엑스 자를 쳤다. 벌써 여섯 번째 엑스 자였다. 열을 식히고 있는 리암을 보던 도현이 로잔나에게 물었다.
“원래 자주 이러나요?”
“아역 배우 오디션 말하는 거죠?”
“네.”
“안타깝게도… 네. 이런 일이 드문 편은 아니죠.”
으음….
도현이 비음을 흘렸다.
물론 모든 지원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말 진지한 태도로 준비를 해 온 지원자도 많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지원자도 많아서 문제였다.
리암이 다음 프로필을 들춰 보았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다음 지원자도 연기 경력이 전무한 일반인이었다.
지금까지 오디션을 본 일반인은 둘 중 하나였다.
겁먹어서 아무것도 못하거나, 열심히는 하는데 연기력이 영 별로거나.
아역 배우이기 때문에 그러한 점이 특히 더한 것 같았다.
‘도현이 특이한 거였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은 리암이 중얼거렸다.
“일반인까지 지원 영역을 넓힌 게 실수였나….”
리암이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을 무렵.
규칙적인 노크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 들어왔다.
굳은 눈매와 미묘하게 경련하는 입꼬리에서 긴장한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다. 어설프긴 해도 미소를 띠고 있다는 부분에서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일단 자세는 합격이군.’
꽤 진지하게 임하는 것 같은 22번째 지원자의 태도에 리암이 몸을 바로 했다.
정중앙에 선 22번 지원자가 심사위원석을 한번 둘러보았다.
로잔나와, 리암을 지나쳐 도현에게 닿자.
“어?”
“응?”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를 내었다.
눈을 깜빡인 도현이 프로필에 붙은 사진을 다시 한번 보았다가, 22번 지원자를 보았다.
“아…!”
도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왜 익숙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서점에서 부딪친 사람이네.’
그때와 너무 달라져서 바로 알아보질 못했다.
대충 자른 듯 시야를 가릴 정도로 길었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여기 저기 스크래치가 난 점퍼 대신 하얀 셔츠를 입고 있어 분위기가 너무 다르게 느껴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맥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상기했다.
저 애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지금 해야 할 건 그게 아니었다.
맥이 긴장으로 토기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맥 버클러입니다.”
도현도 차분함을 되찾고 진지한 태도로 맥을 보았다. 프로필을 내려다보던 로잔나가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반가워요, 맥. 몇 가지 좀 물어보려는데 괜찮죠?”
“네.”
“맥은 왜 이번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나요?”
“배우가 되고 싶어서요. 그런데 경력이 없는 어린애를 써주는 곳이 없었고요.”
‘요것 봐라?’
맥의 직설적인 대답이 리암의 흥미를 자극했다. 심드렁했던 표정이 재밌다는 듯이 바뀌었다.
“왜 배우가 되고 싶은데요?”
리암의 질문에 맥은 초조한 얼굴로, 그러나 진심 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스크린 속의 사람들이 빛나 보여서요. 왜 그들만 특별할까 생각했죠. 저도 그들처럼 특별해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누구한테나 인정받고, 누구한테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흐핫! 이거 아주 유쾌한데!”
리암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성인 배우 중에선 종종 있었다.
‘돈을 벌려고요.’, ‘유명해지고 싶어서요.’, ‘쿨하잖아요?’ 같은 이유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그러나 이렇게 어린 배우에게서 이런 소릴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당당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런 대답을 들으면 싫어하는 감독들도 많았지만, 맥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리암은 그런 유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면접을 위한 가식적인 대답보다야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인 맥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연기 실력이지.’
멀끔한 외모 탓에 깔끔하게 꾸며 놓으니 나름 도련님 같아 보이긴 했지만.
사소한 버릇, 표정, 말투, 억양에서 강하게 자란 아이 특유의 독함과 거침을 숨길 수는 없었다.
만약 유의 배역이었다면 이미지는 곧바로 합격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이사야 배역 오디션이었다.
맥이 가지고 있는 개성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난 이사야 역할을 맡기엔 불리한 부분이었다.
눈을 빛내고 있는 누구처럼 연기력으로 완전히 커버할 수 있지 않는 한은.
리암은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말했다.
“그럼 준비해 온 연기나 한번 봅시다.”
“네!”
맥은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맥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 * *
‘으음….’
리암이 속으로 신음성을 삼켰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22번 지원자는 연기를 잘했다.
그것도 리암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아역 배우는 어리다 보니 감정 표현에 서투른 부분이 있었다. 또한,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과장되거나 어색하게 연기를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나 맥의 연기는 지금까지 봤던 지원자 중에서는 단연코 독보적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대사 하나, 표정 하나, 몸짓 하나.
부족한 부분은 있을지언정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깔끔한 연기.’
그게 전체적인 리암의 감상평이었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그런, 딱 적당한 교과서적인 연기.
‘보여지는’ 역할인 배우에게 있어서 부담스럽지 않고 깔끔한 연기는 때론 엄청난 강점이 될 수 있었다. 지금 맥의 나이를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미지가 너무 안 맞아…. 유 역할이었으면 정말 딱이었을 텐데.”
리암이 안타까운 심정에 무심코 소리 내어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흠, 연기는 좋았는데. 이사야를 연기하기엔 너무 독해 보여.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 야생에서 비바람을 맞고 자란 들풀 같다는 소립니다.”
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