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6)화 (37/582)

제36화. 투쟁 (16)

식은땀을 바지에 슥슥- 닦은 리암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화감독 리암 호프입니다.”

“네,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도현이 엄마 서혜나입니다.”

짧은 악수가 끝나고, 리암이 검은 가방에서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제가 작성해 온 계약서입니다. 우리 배우님한테는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했습니다.”

계약서를 건네받은 서혜나의 눈이 순식간에 프로페셔널하게 변했다.

“그럼 잠시.”

한 줄 한 줄.

아주 작은 조항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계약서를 읽어 내려갔다.

이미 만나기 전에 메일로 가계약서를 받아 변호사의 확인을 거쳤지만, 그래도 다른 부분은 없는지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했다.

리암이 괜히 눈앞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손을 바짓단에 대고 문지르며 부산스럽게 굴었고, 도현은 여유롭게 코코아를 홀짝였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달한 초콜릿 맛을 음미하고 있을 무렵.

탁-

서혜나가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잠깐 긴장감이 감도는 침묵이 이어지고.

“좋네요. 계약서에 서명하죠.”

그렇게 말한 서혜나가 싱긋 웃었다.

“푸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도현이는 저희가 책임지고 잘 케어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독님을 믿으니까 우리 아들을 맡기는 거예요.”

촬영장에 따라다닐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한참 미국에서 Marine를 확장하는 중이라서 그럴 짬이 나지가 않았다.

서혜나가 걱정과 미안함을 담아 도현을 보자 서혜나의 마음을 읽은 도현이 방긋 웃었다.

“전 괜찮아요. 리암도 로잔나도 모두 친절한걸요. 촬영 잘할게요.”

“그래. 엄마는 우리 도현이 믿어. 그래도 촬영 중에 힘든 일이 생기면 엄마한테 말해줘야 해?”

“네. 그럴게요.”

아들의 믿음직스러운 모습에 애써 걱정을 털어낸 서혜나가 리암을 보고 정중하게 말했다.

“우리 도현이 잘 부탁드릴게요.”

“주신 신뢰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훈훈한 대화가 오가고-

서혜나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운 기세를 띠었다.

“그런데 혹시….”

“예?”

“제작사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는데, 개인적인 투자는 어떠신가요?”

서혜나의 말에 리암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제가 패션 사업을 하고 있어서, 이 부분에서도 필요하다면 지원을 드릴 수 있어요.”

“큼, 흠! 그럼 새로운 계약서 작성을….”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두 어른의 모습을 보던 도현이 코코아를 내려놓았다.

촬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협상의 시간이 지나고.

리암과 서혜나가 극적인 합의를 마치고 손을 마주 잡았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리암이 서혜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도현이랑 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기다려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도현아, 엄마는 차에 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이야기하고 와.”

서혜나가 차를 가지러 내려가고, 의아한 표정의 도현이 리암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리암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사야 역할 정했다.”

리암의 말에 도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누구예요? 알려주실 수 있어요?”

어딘가 다급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히죽- 웃던 리암이 시간을 끌었다.

놀리는 듯한 기색에 도현이 조금 부루퉁해지려던 찰나, 리암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22번.”

“네?”

“22번 지원자. 맥 버클러. 걔로 정했어.”

“네에?”

도현이 답지 않게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충격으로 인해 눈의 깜빡거림이 줄어들 정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과격한 반응에 리암이 의문 서린 표정을 지었다.

“왜, 22번이 마음에 든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네. 그랬죠.”

도현의 얼굴에 잠깐 떨떠름한 표정이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어쩌다 그런 결정을 내리신 거예요?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고 고민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랬는데.”

리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음에 차는 게 그 애밖에 없더라. 조금 더 노력하겠다고 말하는데 눈빛이 살아 있었거든. 그 눈빛이 자꾸만 잊히지 않더라고. 원래 이 영화는 내 욕심이자 도전이었으니까 조금 더 욕심부려 본 거지. 감독으로선 실격인 부분이겠지만.”

리암에게 이 영화가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이다. 너 때문이기도 해.”

“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의심이 가는 게 있었다. 도현이 곧바로 물었다.

“제가 22번이랑 같이 연기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것도 그렇긴 한데. 원래 내가 널 생각하면서 이사야를 만들었잖아. 그런데 네가 멋지게 그걸 뒤집어 버렸고. 그래서 괜히 기대가 생긴 거 아니냐. 혹시 그 애도 너처럼 내 생각을 멋지게 뒤집어 줄 수 있을지.”

그렇게 말한 리암은 유쾌해 죽겠다는 듯이 광대를 씰룩였다.

“어차피 다 처음인 거. 한번 제대로 모험해 보는 거지. 왜. 갑자기 영화에 대한 믿음이 뚝 떨어지냐?”

리암의 호기로운 눈빛을 받은 도현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아니요. 재밌을 것 같아요.”

“그래.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두 악동이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 *

“맥, 얘. 마트 가서 이것들 좀 사 와.”

케이시가 내미는 종이를 순순히 받아든 맥이 말없이 지갑 하나를 들고 가게를 나왔다. 그 뒷모습을 보던 케이시가 고개를 기울였다.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했다.

군말 없이 가게 일을 돕질 않나, 시키는 것도 순순히 하질 않나.

그렇게만 보면 긍정적인 신호겠지만, 말수도 사라진 게 문제였다.

매일같이 가라앉은 얼굴로 시키는 것만 하니 편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됐다.

‘무슨 일이 있나?’

학교에서 친구랑 싸우기라도 한 건가 싶어서 의아해하던 케이시가 곧 관심을 거뒀다.

‘저게 얼마나 가겠어.’

단순히 생각한 그녀는 다시 장사 준비를 위해 열심히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맥은 마트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오디션 이후.

맥은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밑바닥 인생은 밑바닥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마트에 들어가 엄마가 적어준 목록을 하나하나 집어서 계산대에 올렸다. 캐셔에게 카드를 내밀며 맥은 생각했다.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는 것도 어쩌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냥 남들처럼.

흘러가는 대로 대충 대충.

대충~ 대에충~ 인생은 대충이라네~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봉투를 받아든 맥이 마트를 빠져나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지잉-

주머니에 든 핸드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친구인가 싶어서 심드렁한 얼굴로 핸드폰을 꺼낸 맥이 화면을 켰다.

투두둑!

A-Mart라고 써진 봉투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열린 봉투 입구로 온갖 야채와 과일들이 빠져나와 길바닥에 굴러다녔다.

그런데도 맥의 눈은 온통 핸드폰 액정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한참이나 핸드폰 화면이 불구대천의 원수인 양 노려보던 맥이 바보처럼 맥 빠진 소리를 냈다.

“흐익?”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느리게 고개를 가로젓던 맥이 핸드폰에 코를 박을 듯이 눈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러나 변하는 건 없었다.

“어억!”

뒷걸음질 치던 발에 장을 본 봉투가 밟혔다.

미끄러운 비닐봉지에 맥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고.

콰당!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행인들이 맥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그러나 맥은 그 시선도, 아마도 멍이 들었을 엉덩이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맥이 눈에 서서히 빛이 차올랐다.

“진짜? 진짜야? 정말?”

몇 번이고 핸드폰 화면을 껐다가 켜도 변하지 않는 선명한 글자가 눈에 박혔다. 맥이 손으로 철썩 뺨을 한 대 갈겼다.

아팠다.

“우, 우아아악! 으악! 하느님! 세상에!”

철저한 무교였던 맥에게 종교가 생겼다.

한참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던 맥이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주변에 잔뜩 널브러진 음식을 발견하고 사색이 됐다.

허겁지겁 봉투에 주워 담은 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죽-

“큼.”

히죽- 히죽-

광대가 도저히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결국, 맥은 미친 사람처럼 혼자 실실 웃었다. 입꼬리가 계속 씰룩거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비관론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기쁨에 몸부림치던 맥이 시야에 보이는 가게에 발걸음을 멈췄다.

‘엄마한테 어떻게 허락을 받지?’

아직 미성년자인 맥은 부모님의 허락이 필수적이었다.

끙끙거리며 행복한 고민을 하는데, 갑작스럽게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 좋겠네. 누구는 뭣도 없어도 돈으로 주연 자리를 얻고. 나같이 가난한 새끼는 평생 가도 못 앉을 자리에 앉고.

쿠웅!

어디선가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오디션은 네가 아니라 네 부모님이 봤겠지.

자신이 했던 망언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귓가에 울려 퍼졌다.

‘망했다.’

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에 도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바쁘냐?

“아니요. 괜찮아요.”

수화기 너머에서 다짜고짜 들린 말에도 도현이 차분히 대답했다.

- 프리프로덕션 기간이 끝났다.

“그럼….”

도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 그래. 이제 실전이야.

잠깐 확장된 동공이 다시 수축하고, 도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언제부터 촬영 들어가요?”

- 일단, 주연 배우만 모아놓고 리허설 한 번만 하게.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 장면이 들어가 있어서 손동작도 익혀야 하고.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할 거긴 해도 손은 배우의 손이 나와야 되거든. 너도 바이올린 켤 줄 모른다며? 일단 바이올린 선생님 한 분 초청해서 너랑 맥이랑 손동작을 배울 계획이다.

“영화에 나오는 바이올린 곡이 뭔데요?”

- 드뷔시의 <달빛>.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네요.”

- 그렇지? 그리고 익히는 속도가 빠르면 다른 곡들도 추가해 볼 생각이야. 그냥 간단하게 흉내만 내면 되고 나머진 편집으로 해결할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진 말고.

리암의 설명이 이어지는 사이, 도현의 시선이 방 한 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바이올린 가방에 닿았다.

부풀어 올랐던 풍선이 순식간에 꺼졌다.

위로 올라가 고운 호선을 그리고 있던 입매가 일자를 그렸다.

도현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수행 평가란 명목으로 수없이 꺼내 들어 부드럽기만 하던 손끝에 조금씩 굳은살이 생기고 있었다.

‘혹시 지금 내가, 리암을 기만하는 건 아닐까.’

마음이 불편해졌다.

표정이 점차 굳어가는데, 리암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 아무튼, 리허설 날짜는 3월 27일 오후 한 시로 하려는데, 시간 괜찮아?

도현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 그래, 그럼. 맥한테도 물어보고 확정되면 날짜랑 장소 문자로 보내줄게. 그 전까지 연기 연습 열심히 하고 있어. 이제 진짜 촬영 시작이니까.

“알았어요.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 그래, 끊는다.

길게 늘어질 것 없이 깔끔하게 통화가 끊기고, 도현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표정이 가라앉았다.

도현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피곤함이 가득 담긴 한숨이었다.

뭘 어쩌자는 건지.

도현은 자신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감정 통제만큼은 자신 있는 도현이었는데, 최근엔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매 순간 그를 잡아먹던 공허에서 벗어났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즐겁다가도 손이 싸늘하게 식었고 슬프다가도 참을 만했다.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리암을 속이고 있다.

아니, ‘내’가 바이올린을 켜지 못하는 건 진실이니 속이는 건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 다 핑계였다.

어쩌면 충동적으로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결정했던 때부터 잘못한 건지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고.

푸른 계열의 감정들은 어김없이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을 그리움 앞에서 도현은 무기력해졌다.

평생 살아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이었고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도현에게 정희성은 그랬다.

너무 깊고 진하게 남아버렸다. 정작 본인은 사라지고 없으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고 싶은데 답을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현이 고개를 파묻었다.

다 괜찮으니까, 그냥.

보고 싶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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