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무너지는 세계 (1)
맥이 습관적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가 가장 먼저 온 것인지, 감독이 빌린 연습실에 도착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엄마의 허락은 생각보다 쉽게 받았다.
감독이 계약서에 명시된 계약금을 보여주니 맥에게 했던 폭언을 모두 잊은 사람처럼 그를 칭찬했다.
내가 보기에도 네가 끼가 있다느니, 자길 닮아 비주얼이 괜찮다느니.
그 태세 전환을 떠올리던 맥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아…. 망했다, 진짜. 어쩌자고 그랬냐, 미친놈아.”
앞으로 얼굴을 맞대고 영화를 촬영할 사이였다.
혹시라도 그 애가 자기랑 연기하기 싫다고 한다면?
맥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까득-
손톱을 깨무는 소리만 텅 빈 연습실에 울리고.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맥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잔뜩 확장된 동공으로 숨조차 멈추고 들어오는 사람을 주시했다.
“엉? 아, 일찍 왔네. 좋아, 좋아.”
리암이 성실한 배우를 보고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맥이 입에서 손을 떼고 우렁차게 외쳤다.
“안녕하세요!”
그 군기 잡힌 모습에 리암이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 것 없어. 앞으로 적어도 두 달간은 계속 볼 얼굴인데. 편하게 해, 편하게.”
“아…. 네!”
저걸 살릴지, 말지 가늠하던 면접 때의 모습이 선명하게 박힌 맥에게는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무려 감독이 편하게 하라는데 싫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맥이 리암의 눈치를 살피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을 굴리고 있는데, 리암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도현이랑 아는 사이야?”
“예?”
“저번에 오디션 볼 때 서로 알아보는 눈치던데.”
걔 이름이구나!
맥의 안색이 거멓게 죽었다.
첫 만남도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진 않은 것 같았는데, 두 번째 만남에서 완전히 조져버렸다.
“도현이가 네 연기를 제일 마음에 들어 했거든. 그것도 널 뽑는 데 한몫했지. 그래서 서로 아는 사인가 싶어서 말야.”
“제 연기를 마음에 들어 했다고요?”
“그럼! 합을 맞춰서 연기해 보고 싶다던데? 내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잘 맞을 것 같아서 아주 기대가 커. 흐하!”
“어,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오디션 끝나고 잠시 회의할 때.”
맥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가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짓의 업보를 되돌려 받고 있는 사이, 문이 열렸다. 리암의 얼굴이 환해졌다.
맥을 볼 때와는 다른, 진심이 담긴 미소였다.
“어! 왔어? 우리 배우님!”
“네. 안녕하세요, 리암. 오랜만에 보네요.”
“그러게. 어머님은 잘 계시고?”
“네, 잘 계세요.”
리암이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여기, 이사야 역을 맡은 맥 버클러. 이쪽은 유 역할을 맡은 이도현. 앞으로 같이 연기할 주연 배우니까 친하게 지내고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래라. 오늘 인사시키려고 부른 것도 있으니까.”
리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맥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버클러 씨. 이도현입니다. 유 역할을 맡았어요. 잘 부탁드려요.”
예의 바르다 못해 정중하기까지 한 인사에 맥이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버, 버클러 씨?”
낯선 호칭에 허둥지둥대던 맥이 손을 맞잡았다. 그저 여릴 것 같던 손은 의외로 굳은살이 져 있었다.
“야, 딱딱하게 버클러 씨가 뭐냐, 버클러 씨가. 둘 다 나이도 어린데 그냥 이름으로 불러. 보는 내가 다 닭살이 돋는다. 맥도 당황해서 대답을 못 하고 있잖아.”
그 말에 도현이 살짝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요? 그럼, 맥. 저도 도현이라고 불러주세요.”
“어어… 그래.”
맥은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눈앞에 있는 소년은 성자라도 되는 건가?
만약 맥이 도현이었다면, 당장 주먹 한 방 정도는 날렸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정중하게 굴고 있었다. 말간 눈빛, 담담한 표정. 그것을 뚫어져라 보던 맥이 깨달았다.
‘그 일을 들추지 않고 이렇게 덮으려는 거구나!’
차오르는 안도감에 맥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혹시라도 그때 일을 물고 늘어지며 발목을 잡힐까 봐 걱정스러웠는데, 지금 상황을 봐서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속내를 감춘 맥이 도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짧은 악수가 끝나고, 손이 떨어졌다.
맥이 걱정했던 일들은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맥은 조금 기뻐하기로 했다.
기뻐하기로 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 * *
리허설은 빠르게 시작되었다. 시간이 넉넉한 편은 아니라 빠르게 장면을 맞춰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맥은.
‘미친. 저게 사람이야?’
도현의 연기를 보고 실시간으로 정신이 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왜 감독이 도현을 유 역할로 캐스팅했는지, 왜 심사위원석에 겨우 아역 배우가 앉아 있을 수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런 배우라면 누구라도 놓치고 싶지 않을 게 분명했다.
도현과 시선이 마주치고, 대사 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가, 같이 가자. 너, 윽!”
맥이 혀를 깨물었다.
“컷! 거기까지!”
리암의 목소리에 맥의 얼굴이 침통하게 변했다.
벌써 몇 번째 실수인지 이젠 셀 수조차 없었다.
맥이 연습을 대충했다거나, 대본을 숙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맥의 눈에 다급한 얼굴을 순식간에 지워버리고 무표정한 얼굴을 한 도현이 들어왔다.
저 애.
저 애의 연기가 문제였다.
그 앞에 서서 시선을 받고 있노라면, 넋을 놓고 있느라 대사를 치는 타이밍을 자꾸 까먹었다. 스크린 속의 배우가 되어야 하는데, 스크린 밖의 관중이 되었다.
압도적인 연기에 완전히 말려버린 것이다.
하얗게 질린 안색을 하고 있는 맥을 보던 리암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뛰어나도 문제군,’
만약 맥이 성인 배우였다거나, 경력이 있는 아역 배우였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맥은 이번에 처음 연기에 도전하는 초보였다. 그런 맥이 압도적인 재능에 말려 실수하는 걸 이해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
‘그래도 갈수록 실수가 줄고 있으니 다행인가….’
아직 헤매고 있지만 도현의 연기 속에서도 맥이 조금씩 길을 찾아가는 게 눈에 보였다. ‘여기선 이렇게 움직여야겠다’라는 생각이 보이는 기계적인 연기가, 좀 더 생동감 넘치고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있었다.
“자, 그럼 여기까지 하고 조금 쉬자. 이제 바이올린 선생님이 오실 차례거든.”
맥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내가 못 해서 포기하는 건가?’
이미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버린 맥에게는 리암의 말조차 자신의 연기 실력을 탓하는 말로 들렸다.
‘아냐. 겨우 리허설이잖아. 촬영 때 잘하면 돼. 잘할 거야.’
맥이 약해지려는 마음을 꽉 붙잡았다.
맥의 시선이 리암이 내민 음료수를 시원하게 들이켜는 도현에게로 닿았다. 손에 쥔 차가운 음료수를 만지작거리며 맥은 생각했다.
이 기회를 덧없이 날리진 않을 거라고.
맥이 독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아까 했던 연습을 되짚어 갔다.
그렇게 간간이 종이 넘어가는 소리와 음료수를 목 뒤로 넘기는 소리만 가득한 시간이 이어지고.
“어, 오셨나 보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리암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리고 리암이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철컥-
문까지 걸어간 리암이 문을 열어주자,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남성이 거기에 서 있었다.
“반갑습니다. 왈트 레이먼입니다.”
“네, 레이먼 씨.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총감독 리암 호픕니다.”
둘의 손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심드렁한 눈을 한 왈트의 눈이 연습실 안으로 향했다.
리암이 왈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서며 말했다.
“저기에 있는 배우 두 분입니다.”
“아, 예.”
미리 가르칠 사람의 나이를 들어 알고 있는 왈트가 속으로 코웃음 쳤다.
‘배우는 무슨. 코흘리개 어린애들이구만.’
겉으로 그런 속내를 티 내지 않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왈트가 눈살을 구겼다.
“동양인?”
무심코 소리 내어 한 말에 연습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왈트에게로 모였다.
그에 당황한 왈트가 팔을 내저었다.
“아니, 조금 의외라서요.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이번 기회는 왈트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기회였다.
일단 제시한 금액이 심상치 않았을 뿐더러, 만약, 이 영화가 대박이라도 터트리게 된다면 왈트의 명성도 같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었다.
가르치는 아이 중 하나가 동양인이란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했다.
왈트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자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통성명부터 하죠. 이쪽은 도현 리. 이쪽은 맥 버클러입니다.”
“그렇군요. 만나서 반가워요. 도현, 그리고 맥.”
통성명을 나누고, 왈트가 도현과 맥에게 연습용 바이올린을 나눠주었다.
“자.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시작하죠. 둘 다 바이올린을 배워본 적이 없다고 했으니 기초부터 하겠습니다. 먼저 바이올린을 잡으려면 어깨 받침을 끼워야 하는데 여기 보면 굴곡진 부분이 있죠? 이게 바이올린의 굴곡과 반대되도록 끼워야 해요. 이제 준비는 끝났으니, 바이올린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알아봅시다.”
왈트는 아주 기본적인 바이올린과 활 잡는 법을 비롯해 튜닝하는 법, 운지법을 차례차례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마친 왈트가 은근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다 외웠어요?”
별다른 기대를 하고 묻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기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왈트의 눈가가 떨렸다.
“이걸 다 외웠다고?”
기초적인 자세를 제외하고도 1포지션뿐만 아니라 세컨, 서드 포지션까지 설명했다.
애초에 한 번에 알아듣길 바라서 설명한 것도 아니었다. 고작해야 바이올린 흉내나 좀 낼 애들이 아니던가.
코흘리개들이 바이올린을 제대로 이해하고 움직일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그저 돈을 준 사람 앞에서 어느 정도 생색을 내기 위한 형식상의 설명에 불과했다.
왈트가 미묘한 비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제대로 들은 건 맞죠? 거짓말은 좋지 않아요.”
누가 봐도 도현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도현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손에 들린 바이올린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곤란해하는 눈치라고 이해한 왈트가 자애로운 선생님의 얼굴을 꾸며내며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1포지션과 서드 포지션의 운지 자리에 대해서 설명해 볼래요?”
왈트가 비웃음을 삼켰다. 곧 거짓말이었다고 말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기다리는데 도현의 왼손이 현의 한 부분을 짚었다.
“솔부터 시작하면, 솔, 솔부터 온음 라, 라의 온음 시, 시의 반음….”
왈트의 눈가가 떨렸다.
왈트가 나눠준 연습용 바이올린에는 운지 자리를 표시하는 테이핑조차 안 되어 있었다. 영화 찍을 때 알록달록 스티커를 붙인 채 연주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음계를 찾아 짚고 있었다.
“서드 포지션은 1포지션에서 3번 손가락 자리를 1번 손가락으로 눌러서….”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말하는 도현의 모습에 리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기억력 하나는 정말 끝내줬다.
맥이 입을 헤- 벌리고, 왈트의 얼굴이 붉어질 때 즈음 도현의 설명이 끝났다.
말을 마친 도현이 한 박자 쉬고 바이올린을 곱게 내려놓았다.
“틀린 부분이 있었나요?”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왈트가 억지로 입꼬리에 미소를 매달았다.
“아, 아주 잘 외웠어요.”
겉으로 칭찬하면서 속으론 이를 바득- 갈았다.
‘날 민망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저런 쇼를 보인 게 틀림없어!’
오늘 바이올린을 배운다는 걸 알고 미리 외워 오기라도 한 게 틀림없었다. 그걸 비밀로 하고 자신을 놀린 것이다.
고작 9살 난 아이가 그럴까 싶었지만, 저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왠지 속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를 분함과 수치심에 주먹을 쥐었다 펴던 왈트가 입매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론을 안다고 연주를 잘하는 건 아니거든요. 물론 연주하는 것도 아니라 흉내 내기만 하는 거고 실제로 연주는 제가 할 거지만.”
이게 유치한 행동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 거슬렸다.
눈치와 사회성이 제로에 가까운 리암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맥은 그 미묘한 느낌을 잡아냈다.
저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도현을 보는데 도현의 표정은 마냥 태연하기만 했다.
맥은 조금 헷갈렸다.
‘눈치채지 못한 건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고 있는 눈치인 것 같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저 애는 자신과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내내 저 표정으로 있었다.
‘혹시 저 표정도 연기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맥이 서둘러 왈트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묘하게 비열한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그게 꼭, 몸집을 부풀린 도마뱀이 똬리를 튼 아나콘다에게 달려드는 것 같아서.
어쩐지 맥은 조금 아연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