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8)화 (39/582)

제38화. 무너지는 세계 (2)

왈트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시범을 보여줄 테니까 따라 해보는 걸로 하죠.”

말을 마친 왈트가 턱 받침대에 턱을 기대고 팔을 들었다.

그리고 고요하고 잔잔한 드뷔시의 <달빛> 연주가 시작되었다.

리암은 그 선율을 눈을 감고 감상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에 바이올린 음악이 삽입되는 만큼, 실력이 좋은 바이올리니스트를 찾느라 고생했다.

실력이 좋으면서도, 예산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람.

그러다 보니 조금 어정쩡한 인물을 고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게 리암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가 고심 끝에 고른 바이올리니스트의 실력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거 괜찮은 그림이 나오겠는데.’

리암이 회심의 미소를 짓던 순간.

왈트의 연주가 멎었다.

“자, 일단 여기까지만 연주해 볼게요. 한번 따라 해보겠어요? 일단, 그래요. 맥부터.”

가까이서 악기 연주를 들어보는 게 처음이라 긴장이 되었다. 맥이 쭈뼛거렸다.

“괜찮아요. 편하게 해봐요, 편하게.”

전혀 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못 한다고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맥이 어정쩡하게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아니, 자세를 그렇게 하면 안 되죠. 턱을 좀 더 기대고, 팔은 더 들고. 네, 그렇게. 제 팔 움직임이 어땠는지 기억나요? 기억나는 대로 해보세요.”

맥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한 번 보고 기억할 리가 있냐!’

맥이 리암을 힐끔- 쳐다보았다.

명백히 흥미로워하는 표정.

도저히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이 된 맥이 눈을 딱 감고 그저 되는 대로 팔을 움직였다.

내가 몸을 움직이고 있는 건지.

몸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건지.

무아지경의 경지로 팔을 휘두르고.

끼익- 끼기긱- 끽-

차마 이승의 소리라고 하기 어려운 괴상한 소리가 연습실 내에 울려 퍼졌다.

리암이 괴로운 표정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는데, 왈트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거기까지.”

맥은 돌아올 혹평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평가가 돌아왔다.

“아주 좋았어요. 일단 자신감을 가지고 하는 게 가장 중요하죠. 제대로 된 연주는 그다음이고요.”

“네, 예?”

“그리고 움직임에서 진정성이 보이네요. 마치 바이올린과 하나 된 것 같은 모습이었어요. 그렇게 감정을 담은 연주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거죠. 소질이 있어 보이는데요?”

리암과 맥의 황망한 눈동자가 왈트에게 닿았다.

방금 그 소리는….

누가 봐도 개소리였다.

“동작 하나하나 디테일은 다시 차분히 배워보도록 하고… 그러면.”

왈트의 눈이 도현에게 닿았다.

아주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도현? 연주할 차례예요.”

“네.”

간결하게 대답한 도현이 바이올린을 집었다.

유일하게 이 공간의 긴장감을 눈치 챈 맥이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

왈트의 눈이 경악을 담아 크게 확장되었다.

그저 아무렇게나 팔을 휘둘렀던 맥과는 다르게, 활이 현에 닿지 않도록 미묘하게 사이를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문제는.

‘저건 <달빛>이잖아!’

도현의 움직임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드뷔시의 <달빛>이 머릿속에서 들렸다.

현을 누르는 왼손과 활을 움직이는 오른손.

그 모든 게 <달빛>을 연주하고 있었다.

실제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왈트의 귓가에는 도현이 연주하고 있는 음악이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그만큼 완벽하고 나무랄 데 없는 자세였다.

왈트는 그런 도현의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뭔가 어디에서 본 것만 같은….

‘아!’

쿵!

왈트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래.

왜 처음부터 저 애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겠다.

저 앤 누군가와 자꾸 겹쳐 보였다.

누구보다 별처럼 빛났던.

그렇게 유성우처럼 져버린.

“…정희성.”

끼이익-

활이 현을 거칠게 긁었다.

도현의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사이 왈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 왜 몰랐을까!

너무 비슷했다.

분명히 다른데, 생김새도 분위기도 성격도 모두 다른데 너무 비슷했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던 그의 악몽!

왈트가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앞에 있는 아이의 몸 위로, 그 남자의 어린 시절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 순간 왈트는 서늘한 연습실이 아니라, 십 대 초반의 아이들로 북적거리던 대기실에 서 있었다.

* * *

‘우승할 수 있을까? 순위권에도 못 들면 어떡하지?’

아마, 긴장과 걱정, 설렘과 기대였을 거다.

그런 감정을 담아 바이올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주변의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나, 괜히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리고 왈트의 눈에 한 동양인 소년이 들어왔다.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이올린을 점검하고 있던 소년.

대기실 안에 있는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홀로 여유로웠다.

너무 태연해서 잠깐 산책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장난하러 온 거야? 뭐 저리 태연해?’

왈트가 불만을 담아 눈을 찡그렸다. 다들 진지한 자세로 준비하고 있는데 방만하게 늘어진 자세나, 묘하게 풀어진 넥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왈트는 그게 대회에 대한 진지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대회에 대한 불안감이 그런 생각을 더욱 부채질했다.

왈트는 이상한 정의감에 사로잡혔다.

저 주제도 모르고 불량한 태도로 있는 동양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줘야겠다는.

왈트가 팔을 앞뒤로 흔들며 소년의 앞에 다가가 섰다. 의자에 기대어 늘어져 있던 소년은 앞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도 고개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관심조차 없다는 듯한 태도에 불쾌해진 왈트가 시비를 걸었다.

“너 여기 장난하러 왔냐?”

다짜고짜 걸린 시비에 소년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이마를 타고 옆으로 흘러내렸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이 무심하기만 했다.

그래서 왈트는 더욱 흥분하고 말았다.

“다들 진심으로 준비하고 온 곳이야! 장난으로 할 거면 네 나라로 돌아가!”

왈트의 말에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렸던 소년이 얼굴을 구겼다.

“뭐야, 이 새낀. 시끄러우니까 꺼져.”

상상도 못했던 폭언에 왈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를 응원하는 눈치였던 주변의 아이들도 왈트를 보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네가 눈에 거슬리게 그러고 있으니까 그렇지! 이 노란 원숭이야!”

화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인종 차별적 단어를 뱉은 왈트가 스스로 한 말에 놀라 멈칫했다. 그러나 곧 스스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노란 원숭이 맞잖아?’

왈트는 전형적인 백인 우월주의자 가정에서 자랐다. 그게 남들 앞에서 당당히 내뱉을 소리가 아님은 알고 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왈트의 말에 소년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아, 귀찮게.”

소년이 모르는 언어로 중얼거렸다.

그러고선 성가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다가, 그조차 귀찮다는 듯이 쯧! 혀를 한번 차고는 금방 눈을 감아버린다.

열이 받쳐서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영어로 해!”

그러자 등받이 뒤로 팔을 넘긴 소년이 게슴츠레 눈을 뜨곤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것을 보듯이 쳐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참가 번호 3번을 부르는 안내 방송이 울렸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친 왈트는 왠지 진 느낌에 기분이 상했다.

“그래봤자 상도 못 타겠지.”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린 말에 소년의 발이 멈춰 섰다. 그러고선 갑자기 방향을 틀어 왈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야.”

왈트는 그제야 소년이 꽤 키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위압적이었다.

“컥!”

소년이 왈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정성스레 다린 셔츠가 구겨졌다.

“내가 예언 하나 할까? 나는 오늘 일등 먹을 거고, 너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갈 거야.”

툭.

소년이 가볍게 손을 놓았다.

그러고선 무대로 올라갔다. 그 일련의 동작이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유려해서 왈트는 소년을 붙잡지 못했다.

무대에 오른 소년은, 마치 거기 있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윗단추를 풀어 헤치던 방만함은 여유로움으로 보였고 두려움이란 게 없는 발걸음은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연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소년의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그날 대상을 거머쥔 사람은 그 소년이었다. 그 어떤 반론도 없었다.

그리고 왈트는 순위권에도 들지 못했다.

빛이 들지 않는 복도에 서서 미소조차 띠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트로피를 받는 소년을 보았다.

트로피를 받고 내려온 소년은 이상하게도 손에 든 꽃다발이 하나도 없었지만, 왈트의 눈에는 그런 사소한 부분이 들어오지 않았다.

복도에 멍하니 서 있는 왈트를 소년이 발견했다. 비웃을 줄 알고 울컥했지만, 소년은 아무런 반응 없이 지나쳤다.

차라리 비웃는 게 나았다.

그 철저한 무시가 지독한 패배로 남아 각인되었다.

그 후로 소년의 소식은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모두가 소년에게 열광했다.

천재, 비르투오소, 악마의 재림.

이내 그의 이름 자체가 명성이 됐다.

온갖 매체가 소년을 찬양했다.

소년이 청년이 된 이후에도, 온갖 화려한 별칭이 그를 따라다녔다.

한때 같은 대기실을 사용했던 왈트는 그의 그림자조차 밟을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증오심과 시기심이 그의 심장을 시커멓게 태웠다.

이게 비이성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볼 때마다 그날의 초라했던, 볼품없었던 자신이 떠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모든 혐오감을 그에게로 넘기면 편해졌다. 감정은 습관이 되었고, 곧 익숙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연주회를 마친 정희성이 갑작스럽게 쓰러졌다는 기사가 사이트에 도배가 되었다.

이어서 병에 걸려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활동은 사실상 은퇴라는 기사가 떴다. 정확한 병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왈트는 믿지 않았다.

그는 무대에 서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 바이올린은 그와 한 몸이었다. 그런데 은퇴라니? 저를 속이기 위한 술수라 여겼다.

그것이 진실임을 알게 된 건, 정희성의 사망 소식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간 순간이었다.

그날 왈트는 보드카를 들이부었다.

기분이 좋았던가.

좋았던 게 분명하다.

이제 그를 보고 패배감과 열등감에 휩싸일 일은 없을 테니까.

그는 자유였다.

* * *

왈트가 허탈하게 웃었다.

자유는 무슨.

그는 그렇게 가선 안 됐다!

패배만을 남겨놓고 그렇게 가면 안 되는 거였다.

왜 바이올린을 지금까지 놓지 않았는데! 왜 그 후로도 이어진 수많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날만을 기억했는데!

죽어버린 사람은 전설로 남았다. 영영 가도 잡을 수 없고 닿을 수 없었다. 그는 죽음으로써 완전해졌다.

끝까지 패배만 남기고선.

그렇지 않고서야, 그를 닮은 어린아이를 본 것만으로도 이리 동요할 리가 없었다.

왈트가 자괴감에 머리를 감쌌다.

도현은 예상치 못했던 이름에 동요했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니, 이렇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형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자신의 연주는 곧 형의 연주였으니까. 바이올린에 관심 있는 사람이 그 유사성을 알아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아무리 형의 기억을 훑어봐도 저 바이올린 선생님과 연관된 기억은 없었다. 그래서 도현은 형의 연주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희성과 무슨 관계죠?”

그러나 이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는데, 왈트가 도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활을 쥐는 자세, 연주할 때 제스처, 거칠게 긁는 주법, 사소한 버릇까지 흡사해. 아니, 흡사한 걸 넘어서 똑같은 수준이야.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 수 있지?”

그는 괴상한 것을 보듯이 도현을 보았다.

“…네?”

“정희성. 그와 무슨 사이죠? 그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왈트는 긴가민가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무리 인터넷에서 그의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영상을 보고 따라 할 수 있었으면 애초에 그가 지금 여기 와 있을 이유도 없었다.

어설프게 흉내는 가능할지 모르더라도, 미묘한 부분까지 동일한 건 뭐라고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정희성이 누굴 가르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세상을 혼자 사는 그 남자가 누군갈 가르칠 리도 없었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허름한 연습실에서 만난 동양인 남자애가 그의 제자라고? 웃음도 나오지 않을 소리였다.

답을 재촉하는 왈트에 도현은 고민에 빠졌다.

부모님한테는 형에 대한 이야길 스스럼없이 꺼냈지만, 그게 타인이 된다면 얘기가 좀 달라졌다.

도현은 형이 얼마나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형과의 관계는 거짓말로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얘기를 꺼냈다간 귀찮은 일을 마주하게 될 것이란 강한 예감을 느꼈다.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미리 생각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도현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뗐다.

“그한테 바이올린을 배운 적은 없어요.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요.”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당당했다.

왈트는 그 말을 정희성의 엄청난 팬이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러자 자신이 너무 터무니없는 추측을 한 것 같아 민망해졌다.

얼굴을 붉힌 왈트가 큼, 큼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놀라서…. 수업 중에 추태를 부렸군요.”

“아, 그건 괜찮습니다. 그보다 정희성이라면, 그 바이올리니스트 정희성을 말씀하신 것 맞나요?”

리암의 질문에 왈트가 수긍했다.

“네. 도현의 연주가 그와 상당히 흡사해서…. 그러고 보니 묻고 싶은 게 있군요.”

왈트가 인상을 썼다.

“배우는 학생이 바이올린을 접해보지 못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저 애는 수준급으로 보이는데요.”

왈트의 시선이 정확히 도현에게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