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무너지는 세계 (3)
“도현이 수준급이라고요?”
“네. 적어도 제가 방금 본 드뷔시의 <달빛>은요. 연주한 게 아니라 정확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건 바이올린에 어느 정도 숙련되지 않으면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도현에게 쏠렸다.
리암은 난처해졌다.
바이올린 가방을 메고 다니던 모습이나, 능숙해 보이던 손동작을 생각하면 왈트의 말은 아마 정답일 것이다.
그러나 도현이 밝히길 원하지 않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왈트가 한 박자 더 빨랐다.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속은 것 같아 유쾌하진 않네요.”
“…아, 죄송합니다.”
“물론 사정이야 있겠지만 시범까지 보인 입장으로서 놀림을 받은 기분이에요.”
왈트가 어깨를 으쓱였다. 리암이 끼어들려던 때였다.
“미안하면 사과의 의미로 한 곡 들려줄 수 있을까요?”
“예?”
“설마 그것도 어렵다고 하진 않겠죠?”
죄송하다고 한 게 거짓이었냐고 묻는 눈초리였다. 도현은 자신이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이 말을 꺼내기 위해서 사과를 유도한 거였다.
맥은 그저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서 있었고 리암은 도현을 감싸려 애썼다.
“애가 그, 부끄러워서 숨겼나 본데 고의는 아니….”
“괜찮아요, 리암.”
도현이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제가 숨긴 게 맞으니까요. 레이먼 씨를 속이거나 기만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상하셨다면 제가 책임을 지는 게 맞겠죠.”
도현은 형의 능력을 제 능력인 것처럼 함부로 드러내는 것이 불편했지만, 그보다 타인에게 빚을 지는 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도현은 이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형에게서 비롯된 성향인 게 분명했다.
도현이 리암을 보았다.
“혹시 리암도 제가 속였다고 느꼈다면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누구나 다 적당히 감추며 살아. 일일이 다 솔직히 답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니까 괜찮다.”
그리 말하면서 가늘게 눈을 뜨고 왈트를 흘겨보았다.
도현은 바이올린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진과 니콜라스를 위해 연주하던 순간부터, 이렇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다.
턱에 차갑고 단단한 촉감이 느껴졌다.
경계선을 밟고 서서 갈팡질팡하던 소년이 결국 걸음을 뗐다.
* * *
여리고 부드러운 선율이 울렸다.
아름답다.
그 말 말고는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섬세한 손끝을 따라 사방이 막혔던 연습실이 어둑한 밤하늘로 변했다.
리암은 자연스럽게 자료 조사 때 보았던 시구를 떠올렸다.
하이얀 달이
섬요하는 숲속에서
가지마다
우거진 잎사귀 사이로
흐르는 목소리
오, 사랑하는 사람아1)
어디선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리암과 맥은 도현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세계에 초대되어 밤하늘을 누비고 있었다.
달은 어찌 이리 아름다울까.
저 섬세히 흐르는 하이얀 빛.
그 황홀한 자태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드뷔시가 <달빛>을 작곡할 때 밤하늘을 보며 떠올렸을 고민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드뷔시가 폴 베를렌에게 영감을 받아 탄생시킨 달이 도현의 손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마법 같은 묘려한 빛을 일렁이고 있었다.
이내, 그들이 하얀 달의 마법에 완전히 빠져버렸을 때 즈음.
도현이 천천히 활을 내리고 감았던 눈을 떴다.
* * *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리암이 꿈결 같은 숨을 내뱉었다.
아주 환상적인 세계에 푹 빠졌다가, 현실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어?”
맥이 당황한 낯으로 얼굴을 쓸었다.
손에 축축한 물기가 묻어나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떨어지는 눈물방울에 맥이 넋 나간 표정으로 연신 얼굴을 닦았다.
스스로 왜 우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훌쩍- 훌쩍-?
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물을 닦아내는 사이, 훌쩍거림에 정신이 든 리암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리고 왈트는.
‘말도 안 돼.’
정희성과 같은 재능을 지닌 이는 두 번 다시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건 그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세계는 그에게 온갖 찬미의 말을 갖다 붙이며 칭송했으니까.
그런데 여기에 있었다.
그와 같은, 혹은 더욱 뛰어난 수준의 천재가!
그것만으로도 경악스러운데 소년의 연주는 정희성이 빙의라도 한 것처럼 소름 돋게 똑같았다.
이게 단순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인가?
아니, 아니다.
만약 저 소년이 거짓말을 했고 사실 소년이 정희성이 키우던 비밀 병기라고 해도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됐다.
왈트는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길 포기했다.
사실 지금 그는, 온몸에 퍼지는 열기에 전율하고 있었다.
다시는 듣지 못하리라 여겼던 연주를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왈트는 다른 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그를 흥분케 했다.
‘그래. 당신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리가 없지!’
육체는 죽었지만, 재능은 남아 저 소년에게 깃든 것이다! 하늘이 보기에도 죽어 스러지기엔 아까울 정도의 재능이었음이 분명했다!
왈트는 극도로 유쾌해졌다. 정희성의 죽음 이후로 멈춰 있던 시곗바늘이 이제야 작동하는 것 같았다.
왈트가 도현을 눈에 담았다.
악마의 재능을 타고난 이에 대한 부러움, 질투심, 열등감.
그리고 경외심, 동경, 갈망.
모든 게 한데 뭉쳐 우글거렸고 그 격렬한 감정은 왈트를 부추겼다.
“호프 씨.”
“예, 예?”
“이걸 들었으니 당신도 알겠죠. 당신의 영화에 수록될 음반의 주인이 누구인지.”
리암이 깜짝 놀라 왈트를 쳐다보았다.
“만약 당신이 내게 이 일을 맡긴다면, 당신이 살면서 한 가장 멍청한 일이 되리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리암은 우물거렸지만, 부정하진 못했다.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계약은 위약금 없이 파기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수업도 마저 하고 가죠. 비록 학생은 두 명이 아닌 한 명이 되겠지만요. 그리고 혹시 녹음할 레코딩 스튜디오가 마땅치 않으시다면 소개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왈트가 차분히 늘어놓는 말에 리암이 슬쩍 도현의 눈치를 보곤 말했다.
“크흠. 이건 배우님 의견이 중요한 거라…. 큼! 근데 그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물론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녹음할 땐 저를 불러주세요.”
리암에겐 놓치기 아까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당사자의 동의가 있을 때 이야기였다.
리암이 도현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그, 뭐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강요하는 거 아니거든? 방금 들어서 알겠지만, 혹시 녹음해 볼 생각 있으면 한 번만 진지하게 고려를 해줬으면 좋겠다. 너무 부담 갖진 말고….”
사실 부담을 팍팍 갖고 중압감에 못 이겨서라도 고개를 끄덕여 줬으면 했지만, 티를 낼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리암은 애써 대인배 흉내를 내었다.
“꼭 해달라는 건 아니니까, 응? 알지? 그렇다고 하지 말아달라는 건 아니고!”
리암은 자꾸 말이 꼬였다. 도현이 항의했다.
“하지만 원래 녹음하기로 한 건 레이먼 씨잖아요?”
“저는 안 할 겁니다.”
네? 도현이 반문하자 왈트가 답했다.
“그런 연주를 들었는데, 어떻게 당신이 출연하는 영화에 제 연주를 싣겠어요?”
왈트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도현이 한쪽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왈트는 도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뱀 같은 사람이었다. 도현이 잠시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흘렸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하니, 저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게 낫겠네요. 맥, 바이올린을 들고 이리로 오세요.”
왈트가 구석으로 걸어가며 맥에게 손짓했다. 맥이 우왕좌왕하다가, 레이먼 씨의 말대로 하라는 리암의 지시에 쪼르르 따라갔다.
구석에서 일대일 레슨을 시작한 왈트를 보다가,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도현이 조용히 수긍했다. 두 사람은 맥과 왈트의 양해를 구하고선 연습실을 나왔다.
터벅, 터벅.
두 사람은 건물 주변에 작게 조성된 공원을 말없이 거닐었다. 짧은 산책은 두 사람의 머리를 식히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침묵을 깬 건 뜬금없는 리암의 사과였다.
“미안하다.”
도현이 고개를 기울이자, 민망한 낯으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네게 너무 압박을 준 것 같아서. 내가 잠시 눈이 돌아가가지고…. 레이먼 씨가 그렇게 말하면 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부추긴 꼴이야.”
하아. 리암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욕망에 눈이 멀어 이 작은 꼬마에게 은근히 눈치를 줬다. 자신의 치태에 리암이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음….”
도현이 작게 신음했다.
“사과는 받을게요.”
여전히 고개를 땅에 박고 있는 리암을 보다가 말했다.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리암은 감독이잖아요. 더 좋은 작품을 찍기 위한 욕심이었다는 거 이해해요. 사실 리암이 딱히 뭘 한 건 아니었잖아요.”
왈트 레이먼. 그 사람이 그랬지. 조곤조곤한 말투로 직설을 날렸다.
그에 리암이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하.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 난 널 종잡지 못하겠다.”
“저도 제가 어려워요.”
흘러가듯 진심을 내비쳤다. 리암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도현은 개의치 않았다.
도현이 걸음을 멈춰 선 채 앞을 보았다. 거기에 뭐가 있나 싶어 시선을 따라간 리암은 텅 빈 벤치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제가 결정만 내리면 되네요.”
“급하게 생각할 것 없어. 천천히 고민해도 돼.”
“하지만 일정이 넉넉하진 않잖아요?”
리암은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한 박자 늦은 말이 따라붙었다.
“큼. 며칠 정도는 괜찮아. 그 정도 여유는 있어.”
괜히 섣부르게 결정했다가, 안 하겠다고 할까 봐 다급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도현이 눈을 내리떴다.
바이올린을 외면하는 고집은 그것이 불러오는 서러운 향수에 대한 애통이었고 형을 향한 시위였다.
나는 당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고 당신의 희생을 누릴 수 없어서.
연주가 아무렇지 않아지는 순간 당신의 죽음과 희생의 무게도 가벼워질까 봐 겁이 났다.
도현은 아직 준비가 덜 됐는데,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데 세상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하긴 항상 그랬다.
모든 일은 예고 없이 찾아와 도현을 뒤흔들었다.
도현의 속눈썹이 팔랑였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도현은 이 순간이 얼마나 큰 균열을 만들어낼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덩어리 님. 스쿨버스를 타도 되는데 아침마다 데려다주시는 엄마.
꽃비를 뿌려주던 진과 니콜라스. 자신의 욕심보다 도현의 의사를 살피는 리암.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라던 형.
사소한 것들이 모여 도현의 네모난 고집을 둥글게, 둥글게 다듬었다.
도현이 답을 내렸다.
* * *
“어! 우리 배우님! 어서 타!”
주택 앞, 차를 세운 채 창문을 열어 손을 휘젓는 리암에게 인사한 도현이 차 문을 열었다.
차 안에는 미리 픽업했는지, 시나리오에 고개를 박고 있는 맥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맥.”
“어어… 안녕해요.”
인사인지 뭔지 애매한 말을 남긴 맥이 다시 시나리오에 고개를 박았다.
오늘 맥은 예정된 촬영이 없었지만, 연기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출근 도장을 찍었다.
맥도 도현도 가능한 한 촬영이 있든 없는 촬영장에 오기로 약속된 상태였다.
촬영을 하는 건 도현인데, 다리를 달달 떨며 시나리오를 보는 맥을 보고 있자면 반대가 된 것 같았다.
극도의 긴장과 불안에 휩싸인 맥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도현이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자 차가 출발했다.
차 안을 조금 둘러보던 도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리암, 로잔나는요?”
“촬영 현장에서 준비 중이지. 두 주연 배우만 내가 픽업하러 온 거고.”
“혼자 촬영 현장을 지키고 있는 건가요?”
“아니.”
리암이 입꼬리를 길게 늘려 웃었다. 흐뭇함이 가득 담긴 미소였다.
“혜나 씨한테 받은 투자금을 다 어디에 썼겠어? 촬영 현장을 윤택하게 만드는 데 썼지.”
“아!”
“가 보면 놀랄 거야. 꽤 본격적이거든. 그리고 다른 배우들도 지금쯤 도착했을걸.”
리암의 말을 듣던 도현이 심장 위에 손을 올렸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맥동하는 심장에 도현이 살짝 미소 지었다.
드디어 첫 촬영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