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40)화 (41/582)

제40화. 무너지는 세계 (4)

차에서 내린 도현과 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맥이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말을 더듬었다.

“도, 독립 영화라며?”

분명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촬영 현장은 정말로 ‘촬영 현장’ 같았다.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고 로잔나가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출연할 배우로 보이는 분들이 한쪽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도현을 발견한 로잔나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도현!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저는 잘 지냈어요. 로잔나는요?”

“저는 죽지 않을 만큼은 잘 지냈죠.”

로잔나의 퀭한 안색과 그늘진 눈가를 보던 도현이 물었다.

“잠을 잘 못 잔 거예요? 피곤해 보여요.”

“하하. 잠이요? 잠은 죽어서 자는 거예요.”

광기가 느껴지는 대답에 도현이 당황하자 로잔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도현은 컨디션이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사실 조금 걱정했거든요. 첫 촬영 전날에 긴장 때문에 밤새고 피곤한 기색으로 오는 배우들도 꽤 많아서요.”

“음, 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보이네요.”

설레긴 했어도 긴장에 밤잠을 설치진 않았다.

도현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런 도현의 모습은 로잔나에게 대범한 성격으로 비쳤다.

로잔나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현에게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도현은 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배우들에게 다가갔다.

각자 이리저리 움직이거나 입을 풀며 연습을 하던 사람들이 행동을 멈추곤 도현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유 역의 이도현입니다.”

“오, 네가 영화 주인공이구나!”

배우들은 나이도, 성별도 다양했다. 그들은 모두 웃으며 도현을 반겨주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모두 네게 지갑을 털릴 호구들인 거네!”

자신을 로버트라 소개한 정장을 쫙 빼입은 남성이 농담을 던졌다. 사람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영화 속에서 유에게 지갑을 빼앗기는 행인 역할이었다.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지갑에 얼마가 들었는지 말하며 장난쳤다.

짓궂은 농담에 면역이 없는 도현은 살짝 뺨을 붉히고 괜히 뒷덜미를 매만졌다.

“이도현 배우님!”

한 스태프가 자신을 부르며 손짓하자 도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살았다는 표정으로 빠르게 인사를 한 후 사라지는 도현에 배우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놓아주었다.

* * *

“흐음….”

리암이 분장을 모두 마치고 나온 도현을 보더니 긴 침음성을 흘렸다.

헤진 옷과 군데군데 상처의 흔적이 남은 피부, 들쑥날쑥 잘려서 헝클어진 머리카락까지.

보통 이쯤 되면 거칠어 보이는 게 정상이건만….

말똥말똥-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고 리암이 한숨을 삼켰다.

어떻게 봐도 흙바닥에서 몇 번 구른 도련님이었다.

“아니, 아니다.”

리암이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리암의 눈앞에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도현’이었다.

이 정도 괴리감이야, 연기 실력으로 무마할 게 분명했다.

리암이 무한한 신뢰의 빛을 보내는데, 이미 그런 리암의 눈빛이 익숙해진 도현은 촬영해야 할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을 보던 로잔나가 멀리서 다가왔다.

“이 가방 보이죠? 아랫부분을 미리 잘라놓고 아주 얇은 실로 살짝 꿰매서 약간의 충격만 줘도 열릴 거예요.”

가방을 확인한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이번엔 로잔나가 접힌 나이프를 펼쳤다. 은빛 날이 번쩍였다.

“이게 겉보기엔 날카로워 보이지만, 날이 뭉뚝하게 되어 있어서 다칠 염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신에 날이 서 있지 않아서 가방을 꿰맨 실을 끊을 때 조금 더 힘을 줘야 하긴 하지만요.”

나이프를 받아든 도현이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는데, 리암이 물었다.

“연습은 안 해도 괜찮겠어?”

“네. 잘할 수 있어요.”

도현이 자신감 있게 답했다. 연습은 충분하다. 도현은 고되었던 지난날들을 되돌아보았다.

소매치기 장면을 연습하면서 도현은 여러 번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능숙하게 나이프를 다루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스스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몸을 쓰는 데 재능이 없었다.

그런 도현이 나이프를 ‘유’처럼 다루기까진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말 그대로, 실제로 피가 나서 서혜나가 기겁하며 병원에 데려간 적도 있었다. 그 후로 금지당해서 몰래 나이프를 구해다 연습해야 했다.

그리하여 도현은 간신히 나이프를 마스터했다. 이젠 눈을 감고도 나이프를 던졌다 잡을 수 있었다. …물론 가끔 놓칠 때도 있지만.

“첫 촬영부터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지만, 최대한 빠르게 촬영해야 해. 길거리라 통제가 어렵거든. 시민들 항의가 들어올 수도 있고. 물론 처음 데뷔하는 배우한테 너무 어려운 부탁이겠지만…!”

리암이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도현을 살살 긁었다.

일정은 내일모레까지 잡아 놨으면서 괜히 시비를 거는 그 유치한 작태에 로잔나가 혀를 찼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도현이 리암의 유치한 수작에 넘어갈 리가….

“저는 괜찮은데, 리암은 총감독이 처음이니까 어려울 수 있겠죠. 괜찮아요.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그리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로잔나는 리암과 도현이 죽이 잘 맞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리암이 사람들의 주위를 모았다.

“자, 자! 다들 첫 촬영 준비 다 됐죠?”

여기저기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럼 씬 1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도현은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자신이 서야 할 자리로 갔다.

나이프를 쥔 손에서 약간 식은땀이 났다. 손이 미끄러워 실수하기 전에 바지에 슥슥- 닦은 도현이 작게 심호흡을 했다.

“도현! 준비됐냐?”

이상한 기계 위에 올라탄 리암의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좋아. 그럼….”

리암이 긴장과 흥분이 반반 섞인 미소를 지었다.

“레디, 액션!”

탁!

역사적인 첫 슬레이트였다.

* * *

헤진 점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은 손.

불량해 보이는 소년, 유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길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입매가 긴장으로 인한 것인지, 지루함으로 인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유의 눈에 한 남성이 들어왔다.

“오.”

유가 눈을 가늘게 뜨곤 손에 든 나이프를 공중에 던졌다.

핑그르르- 탁.

말쑥한 정장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구두. 왁스를 사용해 뒤로 넘긴 머리카락.

핑그르르- 탁.

그러나 덤벙거리는 성격인지 소매 끝이 조금 접혀 있었다.

키는 컸지만, 너무 말라서 실속도 없을 것 같고….

유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공중에서 나이프를 휙 잡아챘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처럼 눈은 남자를 주시하며 소매 속에 교묘하게 나이프를 숨겼다. 그러곤 삐딱한 자세를 바로 세워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타깃이 가까워지자 유가 은근히 소매를 매만졌다.

그리고.

“뭐야!”

몸이 부딪힌 남자가 인상을 찡그렸다가, 제 몸의 반절처럼 보이는 어린애의 모습에 미간을 폈다.

“길을 걸을 땐 주변을 잘 살펴!”

두 눈을 깜빡인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살짝 구겨진 옷을 펴며 다시 갈 길을 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유가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검은 광택이 흐르는 지갑을 한번 던졌다 받았다. 지갑을 열어 안에 든 액수를 확인한 유가 휘파람을 한번 불었다.

“그러게. 길을 걸을 땐 주변을 잘 살펴야지.”

괜찮은 수입에 짧게 웃고선 지갑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 * *

“컷! 오케이!”

첫 장면부터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도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재밌다!

도현이 발을 조금 굴렸다.

진짜 재밌다!

혼자 놀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엔도르핀이 팽팽하게 도는 기분이었다.

도현이 저도 모르게 조금 흥분해 있는데, 방금 도현에게 지갑을 뺏긴 로버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우! 나는 오케이 소리 날 때까지 지갑이 털린 줄 모르고 있었어! 혹시 실수했나 싶어서 도중에 멈춰 설 뻔했다니까?”

도현이 웃자 로버트가 정색했다.

“나 이거 농담 아니야! 대체 언제 지갑을 빼 간 거야?”

로버트의 진지한 물음에 사람들이 하나둘 호기심을 내비쳤다.

두 사람이 붙어 있기도 했고 너무 한순간이라서 도현이 지갑을 뺀 순간을 제대로 본 사람은 카메라를 잡고 있는 리암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자 리암이 흔쾌히 카메라 방향을 돌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했다. 옹기종기 모여 영상을 재생한 사람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장난 아닌데?”

소매에서 나이프를 꺼내어 펼치고 가방의 밑단을 뜯어 지갑을 빼내기까지가 모두 한 텀에 일어났다.

그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동작은 유려하게 보일 정도였다.

“와. 전업으로 해도 먹고 살겠는걸. 길거리에서 만나면 가방을 다 털어 가도 모르겠어. 이거 진짜 재능 있는 거 아니야?”

로버트가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했다.

“연습해서 그래요.”

“소매치기를?”

“네.”

로버트가 웃겼는지 조금 웃었다.

“나이프 다루는 게 아주 익숙하던데 그것도 연습한 거예요?”

“맞아, 그거!”

로잔나의 질문에 리암이 눈을 빛냈다. 지문에 없던 행동인데, 슬레이트를 치자마자 자연스럽게 나이프를 던졌다 받아서 꽤나 놀랐다.

“즉석에서 생각한 애드리브냐?”

“아니요. 로잔나 말처럼 미리 연습한 거예요. 유는 나이프를 잘 다룰 것 같아서요. 어땠어요?”

“어땠긴! 완벽했지!”

사실 리암은 아까부터 씰룩거리는 광대를 애써 내리누르고 있었다.

연기력은 의심한 적 없다. 도현의 연기에 반해 시나리오를 뜯어고친 게 리암이었으니까.

그러나 방금 찍은 장면은 연기력과 별개의 문제였다. 일종의 기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리암의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도현은 완벽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한 번에 깔끔한 오케이 사인을 받기까지.

- 저는 괜찮은데. 리암은 총감독이 처음이니까 어려울 수 있겠죠. 괜찮아요. 제가 더 열심히 할게요.

…진짜 내가 밀리는 거 아니야?

리암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밀릴 순 없지!

감독이 배우를 향해 승부욕을 불태웠다.

그와 별개로.

“네가 내 빛이다, 도현!”

리암은 도저히 예뻐하지 않으려야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는 주연 배우를 예뻐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도현이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잠시 후.

같은 장면 재촬영이 있었다. 이번엔 손과 얼굴을 집중해서 찍는 클로즈업 샷이었다.

두 번째로 촬영할 때 사람들은 도현의 손을 해부라도 할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집중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실수할 법도 한데도 도현은 안정적인 소매치기 실력을 보여주며 로버트에게 다시 한번 소매치기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세 번째 촬영.

리암은 카메라에 가득 담긴 도현의 얼굴을 보며 감탄했다.

이게 첫 촬영이면서, 카메라가 코앞까지 렌즈를 들이밀고 있음에도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 눈동자가 한 번쯤 따라붙을 법도 한데 미동조차 없었다.

숙련된 배우들도 종종 실수를 하는데 이 어린 배우가 능숙히 해낸다.

영화판에 있는 동료들한테 도현의 이야길 하면 다들 거짓말하지 말라며 웃을 게 뻔했다. 그만큼 도현은 일일이 놀라기도 번거로울 만큼 놀라웠다.

도현의 입에서 대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 길을 걸을 땐 주변을 잘 살펴야지.”

지갑을 빼앗긴 남자를 한심해하면서도 짭짤한 수입에 기분 좋은 티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카메라에 전부 담아낸 리암이 외쳤다.

“컷! 오케이!”

어쩌면 생각보다 더 괜찮은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막연히 직감했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날, 도현은 다섯 명의 지갑을 훔치며 3일로 잡은 촬영 기간을 하루로 줄이는 쾌거를 이룩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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