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41)화 (42/582)

제41화. 무너지는 세계 (5)

촬영 시작 이틀째였다.

“최대한 시간 순서를 따라가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소매치기 장면이 너무 빨리 끝나 버려서요.”

로잔나가 곤란한 표정을 하곤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뒷부분을 미리 먼저 촬영해야 할 것 같아요. 괜찮나요?”

일의 주범(?)인 도현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고, 맥은 다리를 달달 떨었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이었다.

독립 영화판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맥은 창백하게 질렸다.

오늘 촬영할 부분은 영화를 기승전결로 나누면 ‘승’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분장을 모두 마친 도현이 자리에 가서 섰다. 그리고 도현의 옆에 맥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맥의 어깨가 긴장으로 딱딱했다.

자신의 첫 촬영이었다.

‘준비한 대로만 하면 돼. 준비한 대로만!’

그리 생각하며 맥이 거울을 보고 한참이나 연습했던 표정을 지었다. 긴장으로 입이 바싹 마른 탓에 이사야의 감정에 이입하기가 수월했다.

이제 곧 있으면 유가 말을 걸어올 것이다.

‘제대로 해내자! 한 번에!’

그렇게 맥이 속으로 열띤 다짐을 하고.

“레디, 액션!”

탁!

촬영 신호가 떨어졌다.

* * *

느긋한 유의 뒤로 초조해 보이는 이사야가 뒤따랐다. 앞서 걷던 유가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살짝 몸을 틀어 이사야를 보았다.

“무서워?”

까만 두 눈이 이사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목이 턱 막힌 듯 소리가 나지 않았다.

“무섭구나.”

혼잣말처럼 읊조린 유가 하, 짧은 숨을 내뱉었다. 이사야는 그 숨의 의미가 조롱인지 탄식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유의 표정은 미지근했다.

“역시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 두려운 거잖아.”

심장을 얼릴 것처럼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탓하고 있으면서도 표정과 목소린 평온했다. 그게 더 섬뜩했다.

몇 번 리허설을 하며 느꼈지만, 도현의 연기는 소름 끼치는 부분이 있었다. 그 연기를 코앞에서 마주한 맥은, 이건 연기보다는 표현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제 안의 인격을 꺼내 놓는 것 같은….

“컷! NG!”

맥이 멍청히 눈을 깜빡였다.

“대사 타이밍 놓쳤어! 집중해야지!”

리암의 지적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촬영 중에 상대 배우의 연기를 감상하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맥은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휩싸였다.

맥에게 다가온 리암이 어깨를 두들겼다.

“괜찮아, 괜찮아. 처음부터 잘할 순 없지. 다들 알고 있고 네가 실수한다고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리암이 긴장을 덜어주기 위해서 격려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맥이 전날 거의 모든 컷을 통과시켰던 도현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쟤는요?”

“도현? 쟨 좀 특이한 경우지!”

“특이한 경우?”

“그래. 저렇게 처음부터 능숙하게 연기하는 게 더 이상한 거야. 무슨 꼬마가 긴장도 안 하고 두려움도 없고…. 거기다가 재능도 뛰어나니 괴물이지, 괴물. 쟤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돼. 너는 너를 기준으로 삼고 노력하면 된다. 알겠지?”

맥도 재능 있는 새싹이었지만, 도현은 좀… 달랐다.

그걸 알 리 없는 맥은 리암이 제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맥은 자존심이 상했다.

왜일까?

특별해지고 싶어서 배우가 되길 원했는데.

여기서도 특별하고 빛나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불공평해. 맥이 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켰다.

* * *

촬영이 재개되었다.

“역시 용서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구원받을 수 없으니까 두려운 거잖아.”

아까 보였던 연기도 충분히 훌륭했는데, 도현은 한층 더 섬세한 연기를 보였다.

비꼼인지 분노인지 헷갈리게 하는 단조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애초에 기대한 적 없다는 듯 무신경해 보이면서도 맥을 미동 없이 주시하는 검은 눈은 끈질겼다.

맥이 손가락을 오므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짝 굳은 몸이 사냥꾼을 마주한 사슴 같다. 이사야는 배우가 아니었기에 겁먹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모르는 소년이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끝이 살짝 떨렸다.

“아니야.”

저가 들어도 자신 없는 목소리라 이번엔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자신의 파트를 무사히 넘긴 맥이 속으로 안심하던 차였다.

“그래. 샨이 내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내가 예민했어.”

도현이 슬쩍 웃었다.

이사야에게는 외면받지 않아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고, 화면 밖에서 보는 관객에게는 의뭉스럽게 느껴질.

그 미묘한 긴장감을 도현은 놓치지 않고 연기했다.

“컷!”

곧바로 만족스러움이 가득 담긴 외침이 들렸다.

“오케이!”

단 두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맥이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에 힘을 팍 주었다.

‘나도 꽤 잘하는 것 같은데?’

자신이 어떻게 연기했는지 궁금했다. 맥은 영상을 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리암은 흔쾌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이게 뭐야!’

맥의 얼굴이 충격에 물들었다.

‘저 얼간이가 나라고?’

표정은 무슨 화장실 못 간 애새끼 같았고 동작은 어수선했다.

‘왜 이리 몸을 가만히 못 둬?’

맥이 속으로 화면 속에 있는 멍청이를 욕했다.

맥은 끔찍하다고 여겼지만, 사실 맥의 생각처럼 엉망인 연기는 아니었다.

그저 도현과 한 화면에 잡힌 게 문제였다.

한 명이 너무 잘해 버리니, 상대적으로 나머지 한 명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맥이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리암이 맥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자, 자. 다 봤으면 다시 촬영 시작해야지.”

“아, 네!”

맥이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 땅이나 파고 있자고 오디션을 본 게 아니었다.

맥은 영상에서 느꼈던 부족한 부분을 되짚었다. 차근차근 고쳐 나가자. 그러다 보면 나아질 것이다.

“테이크 셋…!”

그러다 보면 나아질….

“테이크 여덟!”

나아질….

“열하나!”

나아질…?

“다시 가죠!”

…….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맥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나아지긴 무슨!

영상에서 봤던 얼간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꾸 의식하니까 점점 더 표정과 몸짓이 어색해졌다.

나는 왜 이렇게 엉망인 거지?

맥의 자존감이 하릴없이 깎여 나갔다.

촬영을 접고 다 같이 그날 촬영했던 것을 확인하는 동안 맥은 정신이 나가 있었다.

오, 그러니까 저 멍청이가 나란 거지?

“이 부분 괜찮은데요?”

“그러게. 둘 다 표정이 나쁘지 않아. 이건 쓸 만하겠는데?”

뭐야, 저 차렷 자세는.

양이야? 목소릴 왜 저렇게 떨어.

맥은 호두까기인형이 되어 끊임없이 자신을 디스했다.

평온한 낯으로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리암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촬영은 잘했냐는 엄마의 질문에 대충 대답하고 침대에 누웠다.

양손을 단정히 배 위에 올리곤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적이 흐르고.

“허억!”

벌떡!

맥이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머리를 여러 차례 베개에 박았다.

“미친, 미친, 미친!”

한참을 그렇게 발광하다가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물론 처음부터 멋지게 연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엄마한테는 당당하게 굴었지만, 맥도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하, 쪽팔려.”

리암은 내내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촬영이 지체될수록 얼굴에 쌓이던 피로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혹시 잘못 뽑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맥은 불안해졌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으니 자르진 못하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몸부림쳤다.

그의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자야 하는데 머릿속이 복잡해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맥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이나 뒤척거렸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문득 몇 시인지 궁금해져 핸드폰을 켰다.

[2:43 am]

화면에 떠오른 숫자에 그저 한숨만 푹 내쉬었다.

이제 몇 시간 뒤에 다시 촬영해야 하는데, 이대로 가다간 날을 새게 생겼다.

걔는 내일도 존나 쩌는 연기를 할 텐데….

맥의 생각이 도현에게로 닿았다.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걘 대체 어떻게 그렇게 연기하는 걸까?’

물어볼까?

지난 이틀간, 도현과 맥은 의례적인 대화 이상은 나누지 않았다. 오디션 날 있었던 일 탓에 맥은 도현이 불편했고 도현은 본래 누군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성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걸 물어보면 너무 염치없지 않나.’

아직 사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맥이 생각하기에도 양심 없는 행동이었다.

염치없고, 양심 없고, 그리고….

그리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안 그래도 자신 때문에 자꾸 NG 나는 게 쪽팔려 죽겠는데 저보다 한참 어린, 게다가 돈으로 배역 따냈냐고 빈정거린 애한테 도움을 청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하아….”

맥이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밤이 깊어져 갔다.

* * *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맥은 빠르게 자존심을 내던졌다.

자존심.

그게 다 뭔 소용이냐.

맥은 쓸모없는 것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막 휴식 시간이 되어 서혜나가 싸준 코코아를 따라 마시고 있던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얘기요?”

“응. 잠깐만 저기 가서….”

멀뚱히 맥을 보던 도현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래요.”

도현을 데리고 인적이 드문 구석까지 오는 것에 성공한 맥이 어색함과 민망함에 괜히 발로 바닥을 탁탁 찼다.

도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음….”

입술을 달싹이던 맥이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멀리서 스태프가 앓는 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운을 떼야 하지.’

데려오긴 했는데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쉬운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던 맥에게 이런 상황은 낯설고 힘겨웠다.

도현은 재촉하지 않고 맥이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맥은 입을 뗐다.

“혹시 촬영 때 NG를 안 받는 비법 같은 게 있어?”

맥은 자신이 내뱉은 멍청한 소리에 놀랐다.

물론 그게 궁금한 건 맞았지만, 좀 더 괜찮게 말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그런 건 없는데요….”

“그래…?”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도현이 곤란한 눈치로 맥을 보았다.

도현은 맥이 부른 순간부터 그의 용건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맥만 모를 뿐이지 촬영 팀 모두가 맥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도현이 슬쩍 고개를 틀자 리암이 멀리서 주먹을 꽉 쥐었다. 믿고 있다는 사인이었다. 아무것도 못 본 척 자연스레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맥은 상당히 우울해 보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도현은 고민에 빠졌다.

둘 사이에 꺼림칙한 일이 있었다고 하나 앞으로 두 달간은 같이 연기할 동료 배우였다. 맥이 풀 죽어 있는 건 도현도 딱히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맥이 한숨을 한번 쉬곤 말했다.

“넌 연기 연습을 어떻게 해?”

“들어도 큰 도움은 안 될 거예요.”

“말해주기 싫어서 그래?”

도현이 눈가를 찡그렸다.

“아뇨. 듣는다고 해도 지금 맥이 원하는 답이 되진 않을 거라고요.”

“그건 내가 판단해. 싫은 게 아니면 말해줘.”

도현이 한숨을 삼켰다. 대답하지 않자 맥이 의심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도현은 이 상황이 피곤해졌다. 그냥 원하는 걸 들어주잔 심정이 되어서 담담히 설명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전문적인 훈련 방법이 아니라 그냥 제가 멋대로 쓰는 방법이에요. 저는 상상을 많이 해요. 가상의 하얀 공간을 만들고, 필요에 따라 배경을 떠올려요. 장소가 정해지면 제가 연기할 인물을 등장시키죠. 인물이 어느 정도 틀을 갖추면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하면서 인물의 행동을 추론해요. 그러다가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질 때 즈음 제 머릿속에 있는 인물을 끄집어내요. 그가 제가 되고, 제가 그가 되었다고 상상하면서요.”

도현이 맥의 표정을 확인했다.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도움이 되진 않을 거라고.”

“진짜 그 방법으로 연습한다고?”

“네.”

맥은 굉장히 이상한 것을 보듯이 도현을 보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어린애 붙잡아다 닦달하고 몰아세우고…. 스스로도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한심했다.

그런 맥을 보던 도현이 흘러가듯이 말했다.

“맥은 연기를 잘하는데 왜 자신감이 없는 걸까요.”

“뭐?”

“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 닿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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